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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제 앞에 있는 이 칼이요. 아주 정확하게 잘 썰어집니다. 우리나라가 요즘에 무척 혼란스러운데 정직한 이 칼처럼 시원하게 정리할 수 있는게 없을까요.(웃음)"

자신의 직업을 현 시국과 비유한 사이다 발언이다. 지금은 정육 프랜차이즈를 관리하는 회장이면서 동시에 한 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점주로써 입지를 다져가는 정경표씨. 고단했던 젊은날은 이제 추억으로 남길만한 여유가 생겼음에도 그는 아직도 멀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고향 서울을 떠나온 지 10여 년, 서울을 떠나오기 전부터 그의 별명은 '마이너스의 손'이었단다. 손대는 것마다 손해를 보니 그런 별칭이 붙은 것은 당연지사, 꼭 성공을 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고 탈 서울 한 뒤에도 '마이너스의 손'이란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적인 절망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접한 정육업이 지금의 그에게 성공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과거를 거쳐 한층 여유로워진 현재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에 앞서 정경표 회장이 직원들과 함께 화이팅을 하면서 찍은 사진(가운데 정경표 회장)
 인터뷰에 앞서 정경표 회장이 직원들과 함께 화이팅을 하면서 찍은 사진(가운데 정경표 회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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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 1년만에 휴학

97학번인 그는 대학생활은 오직 음주가무였다. 학문을 익히려고 들어온 대학은 그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시험은 낙제 점수를 간신히 면할 정도.

"야, 정경표, 너 이 따위로 학교 다니려면 때려쳐라. 너 이러는 거 보려고 대학 보낸 줄 알어? 대학 등록금 마련하느라 엄마아빠 고생하는 거 안 보이냐."

일상이 돼버린 엄마의 잔소리, 그 잔소리가 그에겐 소귀에 경 읽기기가 돼 버렸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생활 1년을 겨우 넘겼다. 엄마의 잔소리도 오랜세월에 약이 되었던지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으려고 휴학을 하고 경남 거제에 있는 조선업체의 취부사(용접공 조수)에 취업했다. 이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아도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제적 독립을 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서울에서 응석받이로만 살다가 조선소에 취업을 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죠. 잔소리를 듣지 않게되어서 매우 좋더라고요.(웃음) 정말로 숨도 안쉬고 일을 했습니다. 돈 버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유흥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빨리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 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조선소 취업 1년 즈음하여 입대를 하게 됐다. 1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은 사회생활의 잠깐동안의 맛만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마이너스의 손', 서막이 열리다

군 전역 후 복학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학업에 매진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두 번째는 돈 벌 욕심이었다. 전역 후인 2002년은 월드컵 특수와 함께 대한민국 4강 쾌거를 이룬 해이기도 했다. 경기도 매우 좋았던 터라 그에겐 뭘 해도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대 가기 전 모아뒀던 돈과 부모님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 동대문상가에서 패션의류 유통업을 시작했다. 경험은 없었지만 의류 유통업계의 바닥부터 한다는 생각으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또 뛰고 또 뛰었다.

"당시 뭘해도 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사업을 하는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복학을 포기했기 때문에 사업에 더욱 매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죠."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의류산업과 유통산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뛰어들었기 때문에 트랜드를 따라가기가 너무 버거웠다. 의류공장에 주문해 의류 도매업자들에게 넘기는 구조였는데, 트랜드를 제때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공장에서 출고되는 족족 불용재고로 남게 돼 빚만 쌓여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1년 정도 버티고 버티다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미련없이 털고 나왔다.

설상가상

그는 당시 한창 유망하던 자격증이던 타워크레인 자격증을 땄다. 부모님으로부터 얼마간의 용돈을 받고 노력 끝에 손에쥔 자격증은 그에게 무한한 경제력의 원천이 될 것만 같았단다.

건설 경기에 불이 붙은 시기여서 타워크레인 자격자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자격증을 받고 난 후 여기저기 불러주는 업자들 때문에 전화가 불이 났다. 덩달아 지갑 또한 두툼해져 갔다. 월급을 탄 날엔 지인들 불러다 술집에서 한 달 월급을 죄다 탕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부모님께 죄송해요. 왜그리도 철이 없었던지, 내복은 고사하고 천 원짜리 한 장도 못드렸으니.."

한숨을 쉬며 그는 말을 잇는다.

"대략 5개월 까지는 돈 버는 재미로 크레인 작업을 했었요. 돈을 벌면 지인들과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일에 흥이 날 수 밖에요. 그런데 딱 5개월까지 였습니다. 경기가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업자 한테서는 전화가 안오고 언제 술 먹냐는 친구들 전화만 오더라구요.(웃음)"

이후 몇 달간 일거리가 없어 부모님께 또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2년 동안 말아먹은 것을 이번엔 기필코 다 만회하리라 다짐을 하고 시작했던 PC방 사업.

"당시 저희 PC방 이용객 중 70% 이상이 청소년들이었어요. 24시간 주야간 쉬지 않고 운영을 했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자유자재로 이용했어요. 좀 창피한 이야기 이지만 애들 코 묻은 돈으로 매장 운용을 했지요.(웃음)"

호황도 잠시 청소년 규제법으로 오전 9시~오후 10시 이외에는 청소년들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 주 고객이 이탈하는 상황에 처했다. 여기에 PC방 내부 금연제도, 경쟁업체 증가, SNS 게임 등이 인기를 끌면서 서서히 PC방 사업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몇억 원 까먹는 거 순식간이더라고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밤낮을 안가리고 부지런히 일해서 일어서려고 노력했는데, 생각치도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사업을 말아먹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지인이 운영하는 퀵서비스 센터에 취직해 6개월 배송일을 했지만, 배우기도 전에 사무실 부도로 배송일을 그만두게 됐다.

약속의 땅으로

뭘 해도 안 됐떤 20대 시절의 정경표씨. 당시 죽고 싶었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으로 셋째 이모가 살던 전주로 내려왔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 내려온게 아니었기 때문에 맹목적인 휴식이었던 셈이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되는 것이 없으니 삶의 목표를 상실할 수밖에요."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나. 그렇게도 굳게 닫혀있던 운은 정육점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서광이 비쳐왔다.

"셋째 이모가 전주 시내에서 정육업을 하세요. 전북 정읍에서 제법 큰 농장도 하시고 계시구요. 하릴없이 뒹구는 제가 안쓰럽게 보였던지, 이모님께서 자신이 운영하시는 정육매장에서 한 번 일해보는 것이 어떨지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승낙했습니다."

이모와 조카 사이라도 엄연한 위계질서가 있는 법, 독수리가 새끼에게 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둥지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이모는 일할 때 만큼은 정경표씨에 냉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고깃집에서 불판에 구워서 먹기만 했지 손으로 만지는 것은 처음, 말캉말캉한 고깃살을 만지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단다. 3개월 동안은 칼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청소만 시키는 것이 내심 좋지많은 안았을 터. 고깃살을 만지면서 느꼈던 '뭔가 되겠다'라는 기운으로 다른 정육점으로 이직했다.

"이모가 정육점내에서는 되게 냉정했어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이모지만요(웃음). 정육점 3개월즈음 되니깐 뭔가 되겠다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모네 정육점에 있으면 일을 하는데 스스로 부담을 느껴서 이직하게 됐습니다. 이모가 많이 말렸는데도 자신감이 생겨서 과감하게 결정했어요."

이직한 곳이 전주 시내에 있는 고기백화점이란 곳이었단다. 수개월 동안 청소와 고기 써는 것을 병행을 했다. 초보지만 고기 육질을 느낄수가 있었다. 어쩌면 그 느낌이 지금의 그를 있게한 동력을 것이다.

정육점 사장이 되다

"초보가 뭘 안다고 겁도 없이 매장을 열었을까요. 당시 상황을 보면 식겁한 결정일 수도 있지만 육고기가 제게 준 행복과 물질을 본다면 천생연분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이번이 마지막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좀 빌렸습니다. 부모님께서 도저히 말씀을 못드리겠더라고요. 다행히도 매장을 오픈한 직후부터 매우 장사가 잘됐습니다. 목이 좋기도 했지만 마진이 좀 적더라도 좋은 품질의 육고기를 쓰니 손님들이 늘어날 수밖에요."

정경표씨는 품질에 대해 힘을 주어 말한다. 좋은 육고기를 선별하기 위하여 1주일에 2번씩 우시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한다. 직원들을 놔두고 직접 운전해 소를 보고 고른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골라야 직성이 풀린단다.

장성에 있는 우시장이다. 정경표 회장은 이곳을 일주일에 두번씩 새벽 출장을 다닌다.
 장성에 있는 우시장이다. 정경표 회장은 이곳을 일주일에 두번씩 새벽 출장을 다닌다.
ⓒ 정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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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는 군산 인근에 있는 도축장에서 가져온다. 물론 손님들에게 팔 물건을 선택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인터뷰 전에 소 뼈에서 살을 발라 내던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살과 뼈가 분리된 것을 가져와서 손님들에게 판매를 하면 수고가 덜 할텐데요." 질문에 그가 힘주어 말한다.

"정육점 마다 판매 방식의 차이는 있습니다. 도축장에서 발라진 살과 뼈를 가져와서 판매를 하는 경우가 있구요. 저 처럼 소를 직접 사서 도축장에서 작업을 해서 저희 매장 작업장에서 발골(살과 뼈를 분리하는 작업)하는 방식, 2가지로 나뉩니다. 발골 작업이 좀 번거롭긴 해도 건강한 소를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자부심이 생기죠."

발골 작업하는 정경표 회장과 직원들(맨 우측이 정경표 회장)
 발골 작업하는 정경표 회장과 직원들(맨 우측이 정경표 회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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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을 실천하다

"육고기가 저를 살렸듯이 주위의 힘든 이웃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필리핀에 있는 몇 명에게 정기적으로 물질 후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후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필리핀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답한다.

"6.25 전쟁이 났을 때, 필리핀이 제일 먼저 달려와서 도왔다네요. 일종에 보답 차원도 있구요. 다른 이유는 정육점을 하면서 육가공 쪽으로 관심이 매우 많았어요. 지인이 필리핀을 가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필리핀 출장을 많이 가는데 육고기 가공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았으니 돌려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웃음)."

편안한 인생만을 살아온 기자에게 온갖 역경을 딛고 나름 성공한 그에게서 사람 냄새나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태그:#군산, #정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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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의 열혈남아... 백강 입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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