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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이 우리 사회에 묵직한 울음을 토해내던 때, 저는 애써 눈을 감았습니다. '꼭 봐야 한다'는 생각과 '하지만 못 보겠다'는 생각이 며칠을 다퉜고, 끝내 영화를 보러 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연기일지라도 소녀들의 눈과 입, 표정에 어린 슬픔과 고통을 눈으로 지켜보기가 두려웠거든요.

그러던 제가 어찌 소설 <한 명>을 읽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귀향>을 회피했다는 죄책감이 제 손에 이 책을 들려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덜 힘든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몰라요. 소녀들의 이야기를 영상이 아닌 문자로 접하는 것이 조금 덜 힘들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는 한동안 다른 책을 읽지 못했어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야기도, 어떤 감정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가슴이 뻐근하고 가끔은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소녀들이 당한 일, 그리고 그곳을 나온 후 할머니들이 겪은 삶에 대해 제가 알고 있던 건 거의 없었다는 것을요.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들이 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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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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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부터 1945년. 20만 명의 한국인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갑니다. 하지만 이는 추정치일 뿐, 또 다른 연구자들은 50만 명 정도가 끌려갔다고 해요. 그중 돌아온 소녀는 2만 명.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은 아마 대부분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갔거나, 버려졌을 겁니다. 끌려간 소녀들의 나이는 평균 열예닐곱 살. 열한 살 아이도 있었습니다.

돈을 벌게 해준대서, 간호사 시켜준대서, 공장에 취직시켜준대서, 또는 납치를 당해서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던 소녀들은 위안소로 끌려옵니다. 끌려온 소녀들에겐 일본 군인을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소녀들은 묻습니다.

"군인 받는 게 뭐예요?"
"군인들이 오면 데리고 자야 한다."
"우리가 군인을 왜 데리고 자요?"
"군인을 받는 데 왔으니, 군인들을 받아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소녀들은 군인을 받으러 베니어합판으로 대충 만들어 놓은 방으로 들어갑니다. 군인들은 소녀들에게 달려들고, 소녀들은 군인들에게 빕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한 장교는 대검을 꺼내 소녀의 옷을 찢고, 한 군인은 주머니칼로 소녀의 허벅지를 찢습니다. 소설은 말합니다.

"소녀들은 자신의 비명 소리를 따라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는 비명 소리들을 들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돌림노래였다." - 본문 중에서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의 군인이 다녀갑니다. 일요일에는 50명 정도입니다. 많을 때는 70명도 넘습니다. 몸이 아파 정신을 못 차리는 소녀에게도 "군인들은 알아서 다녀"갑니다. 군인들이 다녀갈 때마다 소녀들은 "식칼로 아래를 포 뜨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임신을 하면 자궁이 들어내지고, 자궁을 들어낸 소녀에게도 군인은 다녀갑니다.

말을 듣지 않는 소녀는 못이 박힌 나무판 위에 굴려져 피를 뿜으며 죽습니다. 도망친 소녀는 발이 잘리고, 목에 가죽 끈이 매여 끌려 다닙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소녀들은 자기 피와 아편을 함께 먹고 자살합니다. 죽은 소녀는 허허벌판에 버려지고, 변소 속에 처박힙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일지라도 삶을 버릴 수 없던 소녀들의 유일한 소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돌아가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는 겁니다.

소설 <한 명>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픽션이 아닌 팩션이고, 어느 면에선 팩션 보다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인 '그녀'는 창조된 인물이지만, '그녀'의 기억 속 이야기와 대화들은 증언록에서 그대로 발췌해 온 것들입니다. 피해자들의 기억이 '그녀'의 기억이 되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지요.

노청자 할머니는 "밭을 매다가", 진경팽 할머니는 "목화를 따다가", 최일례 할머니는 "물동이 이고 동네 우물가에 물 길러 갔다가", 김화자 할머니는 "냇가에서 빨래해 오다가", 여복실 할머니는 "집에서 아버지 병간호 하다가"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합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옥선 할머니는 자신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길원옥 할머니는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을 거라 말합니다.

기억이 역사를 만든다

70년이 지나도 그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아요. 소설 속 위안부 할머니인 '그녀'에겐 일 년 전 일은 기억이 가물해도, 70년 전 일은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때의 기억은 일상 틈틈이 질기게 흘러들어옵니다. 골목길을 걷다가도 문득 기억이 떠올라 중얼거립니다. "왜 하필 나인가?".

국가가 위안부 등록을 하라고 할 때, '그녀'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피해자요"라고 밝힌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위안부 소녀였던 할머니들이 하나둘 세상에 고백해 올 때도, '그녀'는 가제손수건으로 본인 입을 틀어막습니다. 열세 살에 만주로 끌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군인 3만 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요. 죽은 어머니 무덤가에서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요.

소설의 시점은 미래입니다. 제목이 <한 명>인 건 국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가 단 '한 명' 생존해 있기 때문이에요. 밤 9시 뉴스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을 전합니다.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걸 밝힌 이후로 위안소에서 겪은 일들을 세상에 널리 알려왔던 윤금실 할머니. 스무날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이었습니다.

윤금실 할머니의 모습에 아흔셋의 '그녀'는 흔들립니다. "여기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조용히 종이에 글을 적어봅니다. "나도 피해자요." '그녀'는 이 말 한마디를 적기 위해 70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릅니다.

씻고 또 씻어도 본인이 더럽게 느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을 향해 들이대던 가혹한 잣대를 거두고 세상에 외치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요.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내게 그런 일을 버젓이 행한 사람들의 사과를 받아야 하겠다고요.

소설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본인의 이름 '풍길'을 기억해 내요. 위안소에서 "일생을 망"친 그녀가 감히 떠올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이름 '풍길'. 이름을 기억해 낸 풍길이 할머니는 아직 무섭긴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서기로 합니다. 기억을 지닌 '한 명'으로서. 세상을 향해 기억을 알릴 '한 명'으로서.

소설 제목이 <한 명>인 것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겁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지요.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뒤 그다음 '한 명'은 누가 되겠는가. 누가 기억을 이어가겠는가. 저자는 또한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명'이 되어야 한다고요. 기억을 이어가는 수천만의 '한 명'. 기억을 역사로 만들어 줄 수천만의 '한 명'. 역사는 잠시 권력을 잡은 집단끼리 뚝딱 100억을 주고받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들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지고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한 명>(김숨/현대문학/2016년 08월 05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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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현대문학(2016)


태그:#위안부, #일제강점기, #김숨,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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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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