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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는 국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에선 특히 그렇다. 국민의 신뢰가 있어야 정치체제와 그에 종속된 행위자들의 권한과 권력에 정당성이 생긴다. 대통령의 경우 지지도가 그 신뢰의 표본이다. 대부분의 대통령은 취임 초반엔 높은 지지를 받고, 갈수록 하향곡선을 그린다. 그 전임 대통령이 만행을 저질러 지지율이 낮은 채로 퇴임해도, 차기 대통령은 대부분 늘 높은 지지율로 임기를 출발했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 말하면, 대통령제 자체에 대한 불신은 국민에게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회는 다르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과거에 비해 오히려 하락하거나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회의 신뢰도는 81-84년 66%에서 꾸준히 하락해 00-04년엔 10%로 바닥을 찍었고, 그나마 회복해 10-14년에 25%를 기록했다. 청와대와 중앙부처, 대기업 등과의 비교에서도 국회는 늘 최고점을 기록하며 불신의 상징이 됐다.('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관련 공청회',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의회에 의해 총리를 선출하는 내각제는 '국회의원의' '국회의원에 의한' '국회의원을 위한'제도라고 볼 수 있다.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황에서의 내각제가 위험한 이유이자, '정부형태의 개헌' 주장이 위험한 이유다.

사실, 오늘날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정부형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입법부의 직무유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과연 국회는 제 역할을 했나

행정부(대통령)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가 부재했다. 대통령과 입법부, 특히 여당의 유착이 대표적이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이중 지위(행정부 수반과 여당의 수장)를 명시한 조항은 없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대한민국에선 대부분의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 역할을 해왔다. 공천권 등을 손에 쥔 대통령부터 여당(정당)으로 뻗어 나가는 수직적 권력 구조는 여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견제·감시하지 못하게 했다.

나아가 국회 전체 차원에선, 정치 이념과 공약보다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이루는 것이 고착돼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당과 국회를 패권싸움의 장으로 만들었다. 패권싸움에만 매몰돼, 국회의원이 가진 국정감사·국정조사·청문회 등의 권한과 권력은 그들이 가진 권한과 권력에 비해 늘 사후적 기능만 했다. 국회의원들의 힘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최소한 국정농단이 몇 년 동안 지속되진 않았을 것이다.

입법부의 무력함은 대통령 탄핵결의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많은 국회의원과 다수의 당이 정치적 셈법에만 골몰해 아직까지 탄핵 결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매주 광화문에 모이는 100만 이상의 촛불 시민과 검찰의 공소장은 탄핵의 당위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국회는 아직까지 지리멸렬한 비판과 정치 셈법에만 골몰하고 있다.

정부형태를 바꾸려는 개헌은 지양돼야 한다. 작금의 대통령제에서 수면위로 떠오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는 형태로 헌법 개정, 법 개정과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낮고, 행정부와 입법부의 유착이 강한 상태에서 내각제로 바꾼다면, 유착은 강해지고, 견제는 약해져 오히려 더 큰 새로운 미지의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먼저,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여당의 수장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대통령이 실질적인 공천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정당의 공천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법률안 제정 혹은 제도 개선이 도움될 것이다.

또한, 국정감사와 청문회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법률적 보완도 필요하다. 국정감사가 국회의원의 얼굴알리기 장(場)이 되지 않게, 국감에 대한 피드백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거부당한 '상시청문회법'의 재추진도 생각해볼 만하다.

"'기존 국정감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상시 국감' 또는 '집중 감사'로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선 19대 국회에서 의결됐지만 박 대통령이 거부한 '상시 청문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능동적 의회의 상징인 미국 의회는 청문회로 시작해 청문회로 끝난다. 입법청문회, 인준청문회, 조사청문회, 감사청문회 등 다양하다. 모든 현안에 대해 즉각적이고 강도 높은 청문회가 열린다. 가령,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재임 시 국가 기밀을 개인 이메일 계정으로 주고받은 것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도 열렸다.'"(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포럼, 상시 국감과 청문회 활성화 필요하다>, <문화일보>, 2016.10.17).

대통령 직무 해임에 관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국민의 열망을 자신들의 정치 셈법에 여과시켜 정치적 카드를 선택하는 것은 국정 공백만 길게 만들 뿐이다.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직의 생사를 다루는 것 역시, 선출된 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진퇴 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모순을 갖고 있다. 현행 지자체에만 해당되는 주민소환제를 국회의원, 나아가 대통령에게까지 포함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시간상, 이번 탄핵 정국 이후에 개헌(改憲)이 필요한 부분이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제왕적 총리로

국민의 실망과 상심이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핵심은 이것이 곧 '국민이 국회의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에 있다. 내각제의 경우, 총리(수상)과 그 소속정당(다수당)이 독재를 할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제왕적 총리'로 글자만 바뀔 뿐이다. 어쩌면 오히려 후자가 더 강한 제왕이 될 수도 있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낮은 상태에서, 내각제로의 개헌이 과연 국정혼란을 돌파할 올바른 방법인지 의심스러운 이유다.

국민의 열망을 대변한다면, 즉각적이고도 조건 없는 탄핵이 정답이다. 그리고 이 혼란 정국이 수습된 후, 대통령제 내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견제와 감시 기능 강화에 골몰해야 한다. 국민에게 대통령·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과 권력도 쥐어야 한다. 개헌은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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