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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정조·박제가·박지원·박정희>를 읽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정조와 박제가, 박지원은 동시대 인물이다. 실학자였던 박제가와 박지원은 정조 시대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라는 이름은 다소 생뚱맞기까지 했다.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한아름 안은 채 책 읽기는 시작됐다.

'수원 화성은 레고성.'

<정조·박제가·박지원·박정희> 책 표지
 <정조·박제가·박지원·박정희> 책 표지
ⓒ 매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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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자극적인 소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수원 화성을 장난감 레고성에 비유한 것은 파격적이기까지 했다.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정조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수원에 화성을 쌓았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직접 설계에 나섰고, 거중기와 같은 선진 기술이 적용됐다.

동·서양의 건축기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후기 건축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박물관식 설명을 거부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간다.

"아름다웠지만 활이나 조총으로 전쟁하던 시대에 어울릴 법한 성이었다. 부분 부분은 성 안쪽에 흙을 쌓아 화포공격에 견딜 수 있었지만, 일부였다. 재래식 무기 홍이포를 방어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벽돌로 쌓은 화성의 4대문, 성, 암문, 수문, 공심돈, 장대, 포루, 노대, 치 등은 장난감 레고로 쌓은 성과 다르지 않았다" - p.7 

저자는 "외침을 고려하면 막대한 국방예산을 투입해서 낡은 프로펠러 전투기에 페인트를 새로 칠한 정도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화성 건설에 매진했던 정조와 실학자들이 듣는다면 서운해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비판이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라고 밝힌 저자는 스스로 "사회통념상 역사를 논할 자격증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잡설'이라 칭하면서 비주류적인 시선으로 주장을 펼쳐나간다. 학계라는 구속에서 자유롭기에 이렇듯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다양한 역사적 견해를 접할 수 있어 오히려 흥미롭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수원 화성의 야경
 수원 화성의 야경
ⓒ 무예24기 한양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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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새롭게 대두된 북학(北學)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저자가 수원 화성을 비판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수원 화성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극단적인 표현으로 외침방어설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또 다른 의미란 무엇일까. 화성은 조선의 '북학혁명'을 위해 국운을 걸고 지은 시범도시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북학(北學)이란 18세기 조선에서 새롭게 대두된 학문적 경향이다. 중국(당시 청나라)을 배우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북학파가 등장하기 전까지 후기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북벌이었다. 인조 당시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을 국시로 내세웠다. 청나라의 강대한 군사력에 짓밟힌 조선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야만족이라 멸시하고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다. 조선은 성리학 교조주의로 똘똘 뭉쳐 창문 하나 없는 방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청나라의 번영과 풍요를 보았어도 구역질나는 오랑캐 문화로 비하해야만 사람대접을 받았다. (…중략…) 조선은 시나브로 자폐국가가 됐다. 그 중심에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호란을 몰고 온 원죄가 있는 노론세력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청을 인정하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집단이었다. 조선이 '숭명반청'이라는 역사의 반동을 선택한 대가로 얻은 것은 낙후뿐이었다" - p.108

정조 대에 이르러 비로소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박제가·박지원으로 대표되는 북학파다. 북학의 흐름은 청나라를 방문하는 연행사절로부터 시작됐다. 조선과 달리 나날이 발전하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북학은 연행의 경험에서 태동했다. 폐쇄된 국가의 경제개혁은 다양한 사고와 문물을 수용하는 개방의 문호가 열려야 가능하다. 개방의 동기부여는 열린 마음으로 선진문물을 직접 목격하고 접할 때 강한 자극을 받는다." - p.111

저자의 말에 따르면 정조 즉위 전까지 연행사의 업무는 단순의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저 달력을 받아 오거나, 책봉을 요청하고, 청나라 황제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정조는 청나라를 관찰하기 위해 연행사의 업무를 혁신했다.

파견 횟수를 대폭 늘렸을 뿐만 아니라 '자제군관제도'란 것을 도입해 자신이 지목한 인재들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요컨대 정조는 청나라의 선진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스파이'로 활용한 것이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촬영.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아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 정조 어진(초상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촬영.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아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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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혁명의 시범도시, 수원 화성

저자가 주장하는 북학혁명이란 북학을 통해 낙후된 조선을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국왕 정조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정조는 우리에게도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북학파를 중용하여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서얼 출신을 기용하여 신분차별 타파에 앞장섰고,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물꼬를 텄다. 개혁의 정점에 수원 화성이 있었다.

실제로 수원화성 건축에 이용된 기술들에는 정조의 의도가 숨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벽돌을 들 수 있다. 원래 조선에서는 성을 쌓을 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석을 이용해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그러나 화성은 청나라에서 주로 쓰던 벽돌로 쌓았다.

벽돌은 건축자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산업 전반에 걸쳐 규격화와 표준화를 확립할 수 있었다. 또 백성이 만드는 벽돌을 관청에서 후한 값으로 구매하면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벽돌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산품의 생산과 유통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매개체이기도 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던 개혁

결과적으로 정조의 북학혁명은 실패했다. 무리한 건축으로 재정은 파탄 났고, 신료들은 왕의 이해할 수 없는 개혁에 불만을 제기했다. 정조는 금령(禁令: 언로를 통제하는 것)까지 내렸다. 언론 통제를 시도한 것이다. 정조의 독선에 친위세력이나 다름없던 남인과 노론 시파까지 정조를 공격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대신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후 낙향을 결의했다.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정조는 스스로 자책감에 시달렸다.

"해마다 나 자신을 점검해 보지만 세월만 덧없이 흐르면서 실제 효과는 까마득히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설령 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공이 과오를 덮어주지는 못할 것이니, 어찌 두렵고 떨리면서 겸연쩍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년) 12월 13일

정조 스스로도 개혁이 실패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저자는 실패의 원인을 두고 "정조와 실학자들 모두 북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북학파들은 청나라에 가서 기술과 제도를 오랜 시간에 걸쳐 정밀하게 전수 받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연행사절이라는 방식을 통해 청의 기술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오는 방식으로 수입해왔다. 심지어 화성의 설계자였던 정약용은 청나라를 방문한 경험조차 없었다. 그가 정조에게 올린 설계도는 16세기 중국에서 전래된 병법서들을 참고로 한 것이었다. 서양의 최신식 화포인 홍이포가 등장하기 이전에 출간된 서적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닥다리 설계도를 참고해 화성을 쌓은 셈이다.

무리한 개혁 추진 끝에 남은 것

문제는 정조 사후에 벌어졌다. 개혁의 실패가 몰고 온 후폭풍을 모두 백성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환곡'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환곡은 보릿고개 때 국가가 농민들에게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추수가 지나면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제도다.

저자는 "화성 건축 당시 모자라는 재정은 대부분 군정과 환곡이자수입으로 충당했다"고 말한다. 정조는 군대를 동원해 백성들로부터 건축비용을 거둬들인 것이었다.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부대가 바로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정조는 군사비 명목으로 타 기관의 자산들을 지속적으로 장용영에 이속시켰다. 그리고 재정이 모자라는 지방관아에 비용을 대출해 화성 건축 비용을 상납토록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장용영을 악덕 사채업자로 만들었다.

"비용을 떠안은 기관들은 장용영에게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 누적된 환곡결손, 자체 재정적자 보충분까지 합산해서 환곡을 운용했다. 백성들은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살인적인 이자를 지불하는 환곡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연간 국가 총수입의 35%가 바로 백성들의 고혈인 환곡이자였다" – p.168

장용영은 '군복 입은 고리대전주'였던 셈이다.

북학의 핵심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생활에 이로운 도구를 통해 민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정조는 백성 모두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 국운을 걸고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은 실패했고 백성들은 민생 파탄에 이르렀다.

"19세기 민란이 발생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북학혁명의 실패였다. 정조가 사망한 이후 조선은 울음바다가 됐다. 왕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왕이 남긴 부채를 갚아야 하는 신세가 힘들었고 원통했기 때문이다." - p.245

정조의 개혁을 완성한 것은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식에 참석한 한 시민이 박 전 대통령 동상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식에 참석한 한 시민이 박 전 대통령 동상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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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실패의 씁쓸함을 되씹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런데 결론이 다소 엉뚱하다. 정조의 개혁은 실패했으나 170년 뒤 대한민국에서 그의 개혁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개혁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이 중심이 된 5·16 쿠데타가 정조의 개혁을 계승했다는 논지의 주장이다. 비로소 책의 제목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리는 시간이었다.

"그의 경제개발은 과격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용'을 착근시키는 과정에서 분배의 '후생'과 민주주의 '정덕'을 희생시킨 과오는 있지만 5·16 쿠데타의 당위성만큼은 완벽하게 검증이 끝났다. 광속도로 경제성장을 하는 중국변수를 대입하면,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이 없었음이 자동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 p.255~256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고속성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가져왔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도 언급한 것처럼 분배의 후생과 민주주의의 정덕(正德)이 희생된 것은 너무나 큰 역사적 과오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정착시켰던 재벌독식의 경제구조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부추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악의 연대기'의 시작, 5·16 쿠데타

여러모로 박정희는 정조를 닮았다. 전제군주였던 정조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역시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정조와 박정희 모두 개인의 권력을 토대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가장 큰 공통점은 사후 그들이 남긴 빚을 청산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통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정조 사후 빚잔치에 시달리며 고혈까지 빨리던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유신독재가 남긴 그늘 아래 신음해야만 했다. 개발독재로 억압된 민주화의 꿈은 요원했고, 그를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박정희가 남긴 유신독재의 그늘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운 유신의 그늘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 피나는 투쟁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 흘린 피들을 생각하면, 이 책의 결론에 섣불리 동의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추운 겨울에 매 주말을 반납하며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어야 하는 엄혹한 현실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그렇다. 5·16 쿠데타는 기나긴 '악의 연대기'의 시작일 뿐,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정조 박제가 박지원 박정희 - 정조의 북학혁명과 삼정문란

주찬범 지음, 매홀북스(2016)


태그:#박정희, #박근혜, #정조, #수원화성, #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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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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