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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 대국민담화 마친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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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제3차 담화를 발표했다. 자신의 진퇴와 임기 단축 문제를 국회가 정해주면 따르겠노라고 공약했다. 촛불 집회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그의 대국민 담화도 이렇게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자신의 진퇴 문제는 국회가 아닌 자기 스스로 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둘 마음이 있으면, 그냥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평소 국회의 생산성에 대해 강력한 불신감을 표출했던 그가 국회를 상대로 그런 주문을 하는 것은, 촛불시위와 탄핵 위기 앞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국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또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라고 규정한 헌법 제70조를 포함해서 현행 헌법 전체를 준수해야 할 국회를 상대로, 대통령 임기단축에 대한 합의를 부탁하는 것은 국회를 자기모순의 늪에 빠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현행 헌법 하에서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통령 임기는 5년'이라는 규정을 전제로, 이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초헌법적 또는 위헌적 결정을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출석의원 3분의 2나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국회가 그런 결정을 하려 한다고 해도, 의결 정족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임기 단축 문제는 국민투표에 의한 개헌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한 국회 합의를 조건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진하겠다는 것은, 실제로는 퇴진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게 아니라면, 임기단축 문제를 미끼로 지금의 정국을 개헌 정국으로 바꾸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꼼수, 과거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위키백과 영문판(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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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퇴진 위기를 모면한 통치자가 있었다. 1871년에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기 이전이었다. 그 이전에 독일을 구성한 여러 국가 중 하나였던 프로이센에 그런 왕이 있었다. 1840년부터 1861년까지 이 나라를 통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840년이면 동아시아에서 제1차 아편전쟁이 벌어진 때이고, 1861년이면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다. 조선에서는 1863년에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등장했다. 1840~1861년이면 헌종과 철종이 왕으로 있었을 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박근혜 스타일의 꼼수를 부린 시점은 1848년이었다. 그가 1861년까지 왕위를 지켰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48년의 꼼수가 통했기 때문에, 13년간이나 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1848년에 유럽은 프랑스발(發) 혁명의 열풍에 휩싸였다. 1789년 대혁명 이후로 프랑스는 진보적 이념과 혁명을 수출하는 나라였다. 그 해 2월 프랑스에서 또다시 혁명이 발생하자(2월 혁명), 유럽 전역도 연쇄적으로 그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프로이센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3월부터 혁명의 열기에 빨려들었다(3월 혁명).

그 열기 속에서 프로이센 시민대중이 추구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자유의 확대와 독일 통일이었다. 이런 흐름을 지지한 것은 주로 독일의 상공인들이었다.

부르주아로 불리는 상공업 자본가들이 자유의 확대를 지지한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제를 해체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해야만 자신들의 지위를 신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일 통일을 지지한 것은 독일 전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일돼야만 좀더 넓은 범위에서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부르주아들이 가장 진보적이고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노동자 계급도 상당히 성장해 있었지만, 부르주아 만큼의 파워는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낡고 오래된 봉건체제에 맞서 싸우는 일에서는, 부르주아가 참신하고 믿을 만한 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자유의 확대와 독일의 통일을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은 그때로써는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세력은 곧바로 무장봉기에 돌입했다. 이들은 촛불이 아니라 무기를 들었다. 이들의 무장봉기로 베를린에서 시가전이 발생하고, 프로이센은 대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당시 54세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군대로 진압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는 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에 유폐를 당하거나 해외 망명을 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의 앞에 놓인 운명이었다. 

그는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자리를 지키면서도 백성들의 분노를 비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결국 그는 방안을 찾아냈다. 29일 제3차 대국민 담화 전에 박 대통령이 찾아낸 것과 비슷한 방안을 그도 찾아낸 것이다. 

3월 혁명 당시의 베를린 봉기를 묘사한 그림.
 3월 혁명 당시의 베를린 봉기를 묘사한 그림.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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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프로이센 백성들에게 국회 창설을 약속하고 국회에 공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그는 백성들한테 프로이센 국민의회의 개설을 약속한 뒤 이 국회에서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노라고 약속했다. 또 백성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고자 독일 통일을 위해서도 힘쓰겠노라고 공언했다.

1848년 3월 혁명의 열풍 속에 독일 전역을 망라하는 국회가 개설되었다. 이것을 흔히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라고 부른다. 프로이센을 포함해 독일을 구성하는 국가들이 이 의회에 참가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은 그것과 별도의 것이었다. 프로이센 차원의 국회를 따로 만들고 여기서 결정된 대로 따르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프로이센 백성들은 순진했다. 왕의 약속을 믿었던 것이다. 시민세력은 프로이센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이 과정에서 혁명의 열기를 스스로 잠재우고 왕과 더불어 보조를 맞춰 갔다. 이로 인해 군주 퇴진의 위기는 어디론가 증발되고, 백성들의 관심은 국회로 쏠리게 되었다.

1848년 5월에 개원한 프로이센 국민의회가 내놓은 혁신적 프로그램 중 하나는 군주의 권력을 헌법으로 제한하는 입헌군주제였다. 이를 포함해서 전근대적인 봉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국회에 제출되고 논의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났다. 가을마저 다가왔다. 국회가 법안들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그 긴 시간 동안,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반격의 채비를 갖추어 나갔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동안, 그는 시민세력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꼼수'에 넘어간 국회, 결국 해산당했다

11월이 되자 왕은 자신감이 생겼다. 무력으로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그는 시비부터 걸었다. 국회의원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일방적으로 방을 빼버린 것이다.

시민세력은 이미 저항의 동력을 상실한 뒤였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횡포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3월에 했던 것처럼 시가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베를린 시내 곳곳을 전전하면서 국회를 계속 여는 방법만 모색했다. 이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왕을 퇴진시키는 게 아니라 국회라도 계속 여는 것뿐이었다. 국회만 열 수 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왕은 그 정도도 용인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왕에게 기회를 줬지만, 왕은 백성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는 국회 해산을 결심했다.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탄압하던 그는 12월 5일 국회를 해산하는 데 성공했다. 혁명의 열기를 일단 국회 안으로 밀어 넣은 뒤, 그 열기가 식은 뒤에 진압해버리는 그의 방식은 그렇게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이센 백성들은 '국회를 개설한 뒤 국회에서 결정해주는 대로 하겠다'는 왕의 말만 믿고 결정적 순간에 스스로 '촛불'을 꺼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3월 혁명이 무산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2년간이나 더 집권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의 사회발전은 그만큼 지체되고, 백성들은 낡고 오래된 구체제 속에서 좀 더 오래 신음하며 살아야 했다.


태그:#3월혁명, #프리드리히빌헬름 4세, #박근혜, #국회, #박근혜최순실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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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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