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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벽파정 전적비'에서 내려다 본 벽파정과 바다의 풍경이 아름답다. 벽파정은 고려 희종 3년인 1207년에 이 지역을 오가는 사신들의 휴식처로 처음 지어졌다.
 '충무공 벽파정 전적비'에서 내려다 본 벽파정과 바다의 풍경이 아름답다. 벽파정은 고려 희종 3년인 1207년에 이 지역을 오가는 사신들의 휴식처로 처음 지어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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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97년 11월 11일자를 보면, 이순신이 명량대첩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다'라고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선조수정실록> 같은 해 9월 1일자에는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장 마다시를 죽였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실록을 읽은 덕분에, 진도대교 옆의 우수영관광지만이 아니라 벽파정도 꼭 답사해야 할 유적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흔히 울돌목만 명량대첩의 현장으로 알지만, 사실은 전라우수영성 앞바다에서 벽파정 앞바다까지 모두가 이순신의 13척 배가 왜적 전선 330척을 격파한 세계적 승전지인 것이다. 그래서 벽파정을 찾아본다.

'天邊日脚射滄溟 기울어진 햇살은 쏘듯이 바다를 비추고
雲際遙分島嶼靑 구름 너머 섬들은 흩어져서 푸르네
閶闔風聲晩來急 서쪽 바람 부는 소리 해질녘에 몰아치니
浪花飜倒碧波亭 부서지는 물보라꽃 벽파정을 뒤집네'

장유(張維, 1587~1638)의 '진도 벽파정(珍島碧波亭)' 전문이다. 어느 가을날 일몰 무렵, 진도 바닷가 벽파정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한 서경적 한시 작품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시를 읽을 때 거친 파도에만 유난히 주목할 수도 있다. 만약 이순신(1545~1598)이 장유보다 앞선 시간을 살았더라면 아마도 그 역시 그랬을 것이다.

벽파, 파도가 푸르다는 뜻이다. 수평선과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을 연상시키는 해운대(海雲臺) 같은 지명에 견주면, 벽파라는 이름은 훨씬 거칠고 파괴적인 심상을 가졌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곳은 수많은 장졸들이 죽음과 선혈의 생애를 남긴 현장이다.

'거친 파도'를 뜻하는 벽파진의 이름, 명량대첩 싸움터답다

'충무공 벽파정 전첩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빗돌 아래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 둘레에 동그랗게 물길을 파둔 것이 흥미롭다. 거북을 너무 오래 맨 땅에 내놓으면 안 된다는 측은지심의 발로로 보인다.
 '충무공 벽파정 전첩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빗돌 아래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 둘레에 동그랗게 물길을 파둔 것이 흥미롭다. 거북을 너무 오래 맨 땅에 내놓으면 안 된다는 측은지심의 발로로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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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정 앞바다가 물살이 거센 곳이라는 사실은 '벽파정당(碧波亭堂) 할아버지'라는 전설도 증언해준다. 아득한 옛날 어느 날씨 좋은 날, 벽파진과 해남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의 사공은 평온한 날씨와 잔잔한 파도를 보고 마음이 놓여 승객 십여 명을 싣고 벽파항을 출항했다. 그런데 배가 감부섬 앞까지 나아갔을 때, 콧노래를 부르며 노를 젓고 있는 뱃사공의 귀에 누군가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보시오, 사공! 급한 일이 있으니 나 좀 태워서 가시오!"

웬 낯선 백발노인이 벽파부두에서 크게 손짓을 하며 목청껏 사공을 부르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배를 돌려서 벽파부두까지 가려면 시간은 물론이고 힘도 무척이나 든다는 점이었다. 사공은 승객들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어떤 이는 노인이 사정을 하는데 어찌 그냥 가버리겠느냐면서, 예상에 없던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하지만 그래도 부두로 회항하자고 했고, 더러는 그냥 해남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본래 심성이 착했던 뱃사공은 반대하는 손님들을 달래어 마침내 배를 되돌렸다.

벽파정에서 쳐다본 '충무공 벽파정 전첩비'. 어마어마한 넓적바위 위에 세워진 점이 이채롭다.
 벽파정에서 쳐다본 '충무공 벽파정 전첩비'. 어마어마한 넓적바위 위에 세워진 점이 이채롭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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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배가 부두 가까이 닿았을 때, 사람들이 '저것 보시오! 저것 보아!' 하며 숨이 넘어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조금 전 배를 돌렸던 지점에는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빙빙 돌고 있었고, 집채보다도 더 큰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곳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모두가 물귀신이 되고 말았을 터였다.

놀라운 일 또 한 가지는, 백발노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실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백발노인이 일반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려주기 위해 잠시 인간세상에 나타났다가 되돌아간 신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사당을 차려놓고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삼별초군도 닿고, 정벌군도 닿은 포구 벽파진

장유의 시와 마찬가지로, 이 전설 역시 벽파정 앞바다의 물길이 매우 드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70년 6월 2일 삼별초 군은 1천여 척의 배를 타고 강화도를 떠나 1270년 8월 19일 진도 벽파진에 닿는다. 최씨 무인정권의 특수 사병 부대로 출발했지만 몽고군에 대항하는 임무도 지니고 있던 삼별초는 몽고에 항복하려는 정부에 반대하여 집단 항거를 일으킨 상태였다.

그 후 김방경(金方慶, 1212~ 1300)의 고려 정부군과 흔도(忻都)의 몽고군도 진도 용장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삼별초 군을 진압하기 위해 벽파진에 상륙했다. 삼별초 군도 진압군도 모두, 아득한 옛날부터 진도와 해남 대륙을 잇는 포구였던 벽파진에 배를 대었던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벽파정. 1207년(고려 희종 3)에 처음 지어졌고, 1465년(세조 11)에 중건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는데 2016년 9월 26일 다시 지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벽파정. 1207년(고려 희종 3)에 처음 지어졌고, 1465년(세조 11)에 중건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는데 2016년 9월 26일 다시 지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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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연합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잘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의 해안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했던 삼별초는 그러나 1271년 5월 총지휘관 배중손(裵仲孫)이 전사하면서 제주도로 후퇴한다. 김통정(金通精)이 이끈 삼별초는 그 후 다시 전라도 해안에서부터 경기도 연해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는 등 세력을 키우지만 결국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된다.

삼별초의 전신은 최충헌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1219년(고종 6)에 만든 특수부대 야별초(夜別抄)이다. 별초(別抄)는 용맹한 군사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으로, 야별초는 인원이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뉜다. 그 후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신의군(神義軍)도 조직된다. 이 셋을 합친 이름이 삼별초이다. 벽파진에서 도로 따라 약 4km가량 지점에 남아 있는 용장산성의 현지 안내판에는 '삼별초는 대몽(對蒙) 항전에서 고려의 정규군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순신이 명량대첩 때 정박해 있었던 벽파진

용장성 성터 유적 앞 안내판에 게시되어 있는 용장성 구조도
 용장성 성터 유적 앞 안내판에 게시되어 있는 용장성 구조도
ⓒ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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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이 다시 역사의 전쟁터로 각인되는 것은 정유재란 때이다. 1597년 8월 29일 이래, 벽파진에는 조선 수군 전체가 머무르고 있었다. 수군 전군, 이름은 거창하지만 겨우 10여 척에 불과한 소규모 부대였다. 지난 7월 16일 벌어진 한산도 북쪽 칠천량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과 더불어 조선 수군 대부분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9월 7일자 <난중일기>는 벽파정 앞바다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를 증언해준다. 탐망(적의 동향을 살피는)군관 임종형이 아침 일찍 이순신에게 와서 보고한다.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어란(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우리 수군 전체를 공격하려는 듯합니다."

임종형의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장수들을 불러 상황을 설명한 다음, 철저히 경계를 설 것과, 전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을 여러 차례 지시했다.

신시(오후 3∼5시)가 되자 적선 13척이 쳐들어 왔다. 이미 이런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아군은 배에 닻을 올려 바다로 나아가 적선을 공격했다. 적들은 뜻밖의 신속한 대응에 놀랐는지 부랴부랴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군은 먼 바다까지 뒤를 쫓았지만 바람과 풍랑이 거센데다가, 적의 복병선이 있을 우려도 있었으므로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 벽파진으로 귀항한 이순신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장수들은 각자 맡은 바에 따라 철저히 대비를 갖추도록 하라.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그렇게 지시를 하고도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거듭거듭 당부를 반복했다. 과연 이순신의 예측대로 이경(밤 9시∼11시)이 되자 적들이 몰려와 마구 대포와 조총을 쏘아댔다. 이순신은 '놀라지 마라! 적들은 우리를 놀라게 해서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술책을 부리고 있을 뿐이다' 하고 호령한 다음, 맞대포를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이 탄 배가 앞장서서 지자포(地字砲)를 쏘니 강산이 흔들렸다. 적들은 우리 군사들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네 번에 걸쳐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물러갔다를 되풀이하며 화포만 쏘아대다가 삼경이 끝난 무렵(새벽 1시경) 아주 물러갔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은 <이충무공 행록>에 이날 일을 두고 '왜적들이 그렇게 한 것은 지난날(1597년 7월 16일) 한산도(칠천량)에서 밤중에 아군을 놀라게 하여 큰 이득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실제로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군은 비가 쏟아지는 캄캄한 야밤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원균을 비롯한 조선군 수뇌부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모두가 죽는 참사를 겪었다.

받침돌인 귀부 둘레에 둥글게 움을 파서 물을 담아 두었다. 바다 속에서 사는 거북에게 늘 물을 제공하려는 마음의 소산이기도 하고, 이 거북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하는 표식이다. 귀부 위에 얹혀 있는 전첩비는 높이가 거의 4m나 되어 동양에서 가장 높은 빗돌이라고 한다.
 받침돌인 귀부 둘레에 둥글게 움을 파서 물을 담아 두었다. 바다 속에서 사는 거북에게 늘 물을 제공하려는 마음의 소산이기도 하고, 이 거북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하는 표식이다. 귀부 위에 얹혀 있는 전첩비는 높이가 거의 4m나 되어 동양에서 가장 높은 빗돌이라고 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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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 조선 수군이 소수인 줄 알고 계속 공격하는 일본군

다시 9월 14일, <난중일기>는 전한다. 이순신이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벽파정 맞은편을 바라보는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를 보내어 연기를 피워올린 임준영을 실어왔다. 적의 동향을 살피러 갔던 임준영은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앞서 어란 앞바다에 들어 왔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임준영은 왜적들에게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김중걸의 말도 전했다.

김중걸은 지난 9월 6일 달마산 아래에서 적들에게 붙잡혀 묶인 채 왜선에 실렸는데, 임진년(1592)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잘 말해주어 결박이 풀린 채 배에서 함께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김중걸은, 한밤중에 김해 사람이 자신의 귀에 대고 왜놈들의 의논 내용을 속삭여 주었다고 했다.

"(며칠 전 벽파정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군사를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다. 통분할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선들을 모두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자. 그리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

이순신은 김중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어서 일단 피란민들부터 급히 배를 떠나 육지로 올라가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군사를 가진 형편에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진지 이동이 완료되자 이순신은 장수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병법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가르쳤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은 재차 장수들에게 다짐을 하였다. 그러면서 '어젯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말도 덧붙였다. 장수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려는 배려였다. 장수들의 표정이 환해지면서 모두들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적선이 바다를 덮었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 명량이 온통 왜적들로 가득찼다. 명량(鳴梁), 우는(鳴) 바다(梁)라는 뜻이다. 물길이 뒤엉키면서 회오리를 일으키고, 바다가 뒤집어지는 듯한 굉음을 내는 곳이 바로 명량, 곧 울돌목이다. 일본군은 울돌목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이순신과 조선 수군들은 잘 안다. 이제 곧 명량해전이 벌어질 찰나이다.

벽파정 앞바다를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는 전첩비

정면에서 본 전첩비
 정면에서 본 전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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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수백 평도 넘음 직한 어마어마한 넓적바위 위에는 길이 5.7m, 높이 1.2m, 폭 4.7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座臺, 받침돌) 위에 얹힌 높이 3.8m, 폭 1.2m, 두께 0.58m의 거대 비석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동양 최대 높이를 자랑하는 비석이라는 '忠武公(충무공) 碧波津(벽파진) 戰捷碑(전첩비)' 앞은 감히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엄두를 내지 못한 까닭에 완벽하게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저 아래로 삼별초 군과 여몽 연합군이 화담 장소로 사용했다는 벽파정 정자가, 아득한 옛날의 피비린내나는 역사는 잊었는지, 그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에 들어온다. 비문은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손재형이 썼다.

'벽파정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1597)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령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는 상기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매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닷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7일엔 적선 13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9일에도 적선 2척이 감보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3척 적은 배로써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하략)'

12척? 13척? 133척? 330척?

칠천량 대패 이후 조선 조정은 수군 장수들에게 수군 해산과 육군 합류를 명령한다. 얼마 남지도 않은 수군 전력으로는 전쟁 수행에 도움이 못 된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상유십이(신에게는 아직도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하고 반대, 수군통제사로서 명량해전을 수행하여 세계적 대첩을 이룬다.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해남 우수영관광지 소재)이 발행한 소책자에는 '1597년 9월 16일 새벽,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를 출발한 일본 왜선 133척은 순류인 밀물을 타고 명량해협에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이순신에게는 칠천량 해전에서 인수한 12척의 배와 이후 수선한 배 1척 등 총 13척의 배만 존재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벽파진전첩비의 원문 '12척 적은 배로써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를 '13척 적은 배로써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로 수정하여 이 글에 옮겼다. 그러나 330척은 133척으로 고치지 않았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자에 '적선 300여 척이 우리 여러 배를 에워쌌다'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벽파정과 용장성에서 남서쪽으로 약 6km와 4km 떨어진 고군면 도평리 산111-4에는 '정유재란 순절 묘역(문화재자료 216호)'이 있다. 이 묘역에는 정유재란 때 전사한 진도 지역 선비 가문의 조응량(曺應亮, 선무원종공신), 조응량의 아들 조명신(曺命新, 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 병조참판 증직), 김성진(金聲振, 선무원종공신), 김홍립(金弘立) 등의 묘소가 있다. 물론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이 더 많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곳을 찾으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왜적들과 싸우다가 죽어간 선열들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태그:#벽파정, #명량대첩, #삼별초, #용장성,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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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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