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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트로의 부고가 전해지자 뉴욕타임스, CNN, BBC 등 주요 외신들은 그의 타계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카스트로의 부고가 전해지자 뉴욕타임스, CNN, BBC 등 주요 외신들은 그의 타계소식을 대서특필했다.
ⓒ CNN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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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현지 시각 25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혁명' 그리고 '미국'이었다.

그는 1926년 쿠바 오리엔테 주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던 부유한 스페인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쿠바 최고 명문인 하바나 대학에 진학한 그는 재학 시절을 시위를 조직하는 데 보냈다. 이어 33세 때인 1959년 동지인 체 게바라와 함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카스트로에게 혁명은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미국'이라는 적과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바티스타군과 싸울 당시부터 이미 미국과의 대결을 염두에 뒀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둘러싼 흑막을 다룬 책 <0시 1분전>의 저자 마이클 돕스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카스트로는 수년 간 미국과의 결전을 준비해왔다. 산악 지역에서 바티스타군과 싸울 때조차 언젠가는 미국을 상대로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전쟁'에 착수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중략) 미국을 상대로 결전을 치른다는 카스트로의 확신은 미국 정부가 쿠바의 진정한 독립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했다. 쿠바에 걸려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카스트로를 포함한 쿠바인 다수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쿠바 관계는 이상주의로 포장된 제국주의 이야기였다."

카스트로의 판단은 옳았다. 미국은 쿠바가 사회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1960년 미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존 F. 케네디는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를 '적대적이고 전투적인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넋 놓고 있다"고 성토했다.

케네디는 권좌에 오른 지 3개월만에 쿠바에 대해 침공작전을 감행했다.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이 바로 그것이다. 미 중앙정보부(CIA)는 15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쿠바 피그스만에 상륙시켰다.

이에 맞서 카스트로는 침공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미국은 쿠바 앞바다에 미군 함정과 전투기를 배치해 놓았다. 그러나 케네디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교전을 허가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피그스만 침공 작전 실패로 단단히 체면을 구겼다. 이에 대해 마이클 돕스에는 "이 사건 이후 케네디는 미숙하고 배짱 없는 지도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고 했다.

미사일 위기 불러온 카스트로의 반미 정책 

카스트로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부른 원인이기도 했다. 그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적 시각에서 조명돼 왔다. 무슨 말이냐면 "미국은 구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강력한 봉쇄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존심이 강해 힘의 열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중국이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놓고 소련에 도전장을 내밀고 나섰다. 이때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해 미국을 겨냥한다면
, 그간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시선에서 보자면 쿠바는 장기판의 '졸'에 불과하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미사일 위기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카스트로는 피그스만 침공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전면적인 침공을 막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카스트로는 1962년 열린 몬카다 병영 습격 9주년 기념식에서 '제국주의자의 직접적인 도발'이 쿠바 혁명의 결정적 위협이라고 말했다. 명확히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자'가 미국을 겨냥한 것임은 분명했다.

더구나 1962년 카스트로는 경제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미국의 무역봉쇄조치가 취해진 데 이어 쿠바 중산층은 대거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쿠바 경제에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경제정책 실패였다.

쿠바는 중앙계획 경제와 강압적 산업화라는 소련식 모델을 도입했다. 불행하게도 이 모델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되려 만성적인 결핍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쿠바의 주 수출품목이던 사탕수수 수확량은 전년 대비 30%p 감소한 5백만 톤 가량에 불과했다. 또 여전히 준동하고 있는 반혁명 세력도 카스트로를 어렵게 했다. 결국 카스트로는 소련과 동맹으로 난국을 타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한편 소련은 쿠바와의 동맹에서 새로운 혁명의 활력을 얻었다. 마이클 돕스는 <0시 1분전>에서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기 전만해도 소련인 대부분은 지도에서 쿠바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소련인들의 머릿속에서 쿠바는 멀고 먼 카리브 섬에서 냉전의 최전선으로 바뀌었다. 소련의 선전원들은 쿠바를 '자유의 섬'이라고 했다. 신문은 쿠바에서 진행 중인 사회 개혁과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사악한 제국주의자들에 관한 기사를 차츰 더 비중 있게 실었다. 수백만 가구에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략) 소련인 다수가 카스트로의 혁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이 경직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지식인들은 쿠바가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 훈련장'이라고 했다."

미-쿠바 국교정상화에 침묵 지킨 카스트로 

쿠바 혁명 55년째 되는 해인 2014년부터 미국과 쿠바의 관계개선은 급물살을 탔다. 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국교정상화 추진을 선언했다. 이어 다음해 4월 두 정상은 미주기구(OAS)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나 이 같은 입장을 재확인하더니 7월 오바마 대통령은 국교정상화를 선언했다.

미-쿠바 국교재개 과정에 카스트로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가 침묵한 배경은 알려진 바 없다. 2008년 동생 라울에게 권좌를 넘기기까지 거의 60년 가까이 11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하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던 그가 미-쿠바 국교정상화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지 사뭇 궁금하기 그지없다.

카스트로는 대중선동에 능했고, 수많은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끝으로 그가 남긴 어록 몇 개를 적어 본다.

"우리 모두, 남녀 노소할 것 없이 이런 위험한 시기에 모두가 하나다. 우리 모두 혁명가와 애국자 모두는 같은 운명이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우리가 승리하리라"

"우리는 양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독립했다. 지구상에서 우리를 제거해야만 우리의 주권을 앗아갈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은 없다. 무능력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유를 얻거나 순교자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미국 뉴욕에 있는 한인매체 <뉴스M>에 동시 송고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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