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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호스와 함께 멋진 포즈를 취한 마커스랩
▲ 마커스랩 소방호스와 함께 멋진 포즈를 취한 마커스랩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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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이란 단어가 낯설기만 했을 카피라이터가 소방 분야에 뛰어들었다. 바로 '마커스랩(MARKERS Lab)'의 나지훈 이사다. '마커스랩'은 소방패션브랜드 '파이어마커스'에서 확장된 포괄적인 의미의 소방 브랜드로, 소화기를 포함한 안전 콘텐츠의 기획 및 제작 등 소방 전반의 다양한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마커스랩 나지훈 이사는 파이어마커스를 만든 초기 창업멤버는 아니다. 그는 광고, 홍보 회사를 운영하며 기업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광고 등을 담당해왔다.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스타트업 멘토로서 '파이어마커스'의 이규동 대표를 처음 만났고, 젊은 친구들이 힘든 과정 속에서 소방 패션 브랜드를 시작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에게 여전히 '불을 끄는 사람들'일 뿐인 소방관들을 재조명하고 소방 자체의 홍보 및 브랜딩의 부재에 안타까움을 느껴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마커스랩을 통해 소방뿐만 아니라 생활안전을 일상에서 녹여내는 출발점을 만들고 싶어요. 인식이 잘 바뀌지 않아 어렵긴 하지만, '파이어파이팅'을 주요 키워드로 소방에 관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지난 11월 14일, 서울혁신파크에서 그를 만났다.

1325명이 1명의 소방관을 응원하는 날까지

"근거를 가져오라, 정돈된 자료를 달라." 처음 마커스랩에 합류한 나 이사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러면, 함께 일하는 식구들은 의아해했다. "이미 다 말했는데 뭐가 필요하죠?"  기존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를 위해 기안을 올리고 문서로 보고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아이디어를 내고 일단 실행부터 한 뒤 문제를 찾는단다.

"제게 아이디어 검토의 기준이 '맞느냐, 틀리느냐'였다면 다른 팀원들에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더라고요. 생각의 구조가 완전히 달랐죠. 자율적인 실행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낯설지만 좋았어요. 기업과 미팅할 때도 자료부터 만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은 눈빛을 보고 바로 결정해요. 일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죠."

현직 소방관 아버지를 둔 이규동 대표는 소방 방재학과를 다니며 만난 친구들을 통해 화재현장에서 겪는 소방관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화재현장에서 사용되는 낡은 소방 호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때 묻은 소방 호스에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녹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의 흔적'이라는 의미의 '파이어마커스'가 탄생했다. 폐소방 호스 업사이클링 가방을 통해 소방 장갑을 기부하는 등 소방관 처우 개선에 앞장서자는 기업 철학도 확실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열악한 업무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을 구하고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의 삶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 나 이사 역시 이런 설립 취지에 동감했다.

"우리나라 소방관들도 영웅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 소방관은 늘 힘들고 어려움에 휩싸인 이미지잖아요. 단지 '불 끄는 사람'이라고만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워요. 해외에서는 영웅처럼 존경을 받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긍심이 강해요. 시민들과 함께 하는 활동도 많고, 이미지가 친근하죠. 우리나라도 최근 젊은 소방관들을 중심으로 여러 움직임이 일고 있어요. '소방의 날'을 맞아 소방관들이 명동에서 프리허그를 진행하기도 했고 최근 몸짱 소방관들의 달력도 화제가 됐죠."

마커스랩, 불안전에 맞서다  

마커스랩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나지훈 이사
▲ 마커스랩2 마커스랩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나지훈 이사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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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랩은 '파이어마커스'라는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를 넘어 생활 깊숙이 안전을 생각하고, 화재와 재난이 닥쳤을 때 직접 대응할 수 있는 아이템들을 고민한다. 마커스랩 사무실 곳곳에 진열된 감각 있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소화기들이 그 첫 아이템이다. "이렇게 예쁜 소화기가 있으면 일단 기억이 잘 나잖아요. 천덕꾸러기 신세가 아닌 모니터 옆에 둘 수 있는 소화기인 거죠." 인테리어 제품처럼 어느 곳에 둬도 손색없는 소화기들은 일러스트 작가 찰스장과 디자인 일러스트 그룹 치카치카에서 작품을 기증했다.

'밀리터리룩은 있는데 왜 소방룩은 없을까?' 사무실 한편에는 이런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다양한 소방 메시지를 담은 가방과 모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소화기에 써 있는 '1/1325'이란 숫자는 대한민국 소방관 1명이 보호해야 하는 시민의 수를 표현했다. 소방관을 영웅으로 형상화한 이미지들도 다양하다.

폐소방 호스로 만든 리사이클링 제품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방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바로 소방 스타일 '파이어파이팅'이다. 소방복의 검정과 주황색을 활용한 아웃도어룩, 화재 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장착한 가방 등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다. 화재를 늘 중심에 두고 사고하다 보니 생각은 재난과 안전으로도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지진의 위협을 받잖아요. 재난은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커요. 두려움을 키우기 전에 사람들과 예방법을 먼저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재난을 준비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더욱 냉정하게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더 나아가 마커스랩이 안전하지 않은 것들, 정의롭지 않은 것들에 주목하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이 됐으면 좋겠어요."

현재 '마커스랩'의 수익금 일부는 소방관의 외상성 스트레스 치료와 순직 소방관들의 유가족 생계비 지원은 물론 취약계층을 위한 소화기, 화재경보기 지원에도 쓰이고 있다. '파이어마커스'라는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로 출발했지만 '마커스랩'이란 이름으로 소방에 대한 인식과 안전의 중요성을 동시에 알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셈.

"'마커스'가 표시라는 뜻이잖아요. 우리 사회 곳곳에 방점을 찍을 의미 있는 것들을 연구하고자 해요. 타인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조명하고 싶고요. 처음엔 파이어마커스만 소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소방관을 위한 크라운드펀딩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변화라는 것이 참 무서워요."

마커스랩은 우리가 놓친 수많은 영웅들을 기억하고, 사회 도처에 깔린 불안을 지우는 흔적이 되고 있다.

혁신가의 공간

나 이사가 서울혁신파크 재생동 한편에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호스들을 조심스럽게 끌어 내린다. 호스 하나당 기본 30m 길이에 무게는 23kg 정도. 초등학교 저학년 몸무게다. 소방호스들은 동작, 노원, 도봉, 충북소방본부 등이 한국소방복지재단을 통해 고정적으로 기부해 주신다고 한다.

재생동에는 마커스랩 외에도 장난감 공유매장 '금자동이', 업사이클 디자인기업 '터치포굿', 쓰지 않는 피아노에 그림을 그려 아트플랫폼을 만드는 '달려라피아노' 등 다양한 리사이클링 단체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 공간이다. 나 이사는 덕분에 리사이클링 기업 간 협업의 기회가 늘어났다며 즐거워한다.

소방호스를 세척 중이다.
▲ 세탁 중인 모습 소방호스를 세척 중이다.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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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받은 호스들 중 비교적 깨끗한 것은 통돌이 세탁기에, 지저분한 것은 드럼 세탁기로 돌린다. 세탁기 역시 모두 소방복지재단에서 기부를 받았다. 세제를 털어 넣고, 1시간가량 세탁기를 돌린다. 일주일에 몰아 빨기 때문에 하루 열 번 넘게 세탁기를 돌릴 때도 있다고.

혁신파크의 볕 좋은 곳에서 호스를 말리는 중이다.
▲ 호스를 말리는 마커스랩 혁신파크의 볕 좋은 곳에서 호스를 말리는 중이다.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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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를 말리는 공간은 사실 '볕 좋은 곳 어디든'이다. 나 이사는 보통 빨래 널 듯 '탁탁' 털어 말린다며 손수 시범을 보인다. 뒤늦게 합류한 이규동 대표와 박용학 실장이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반대 의견을 펼친다. 잠시 어색한 기류를 깬 건 이규동 대표. "재질 자체가 폴리에스테르라 하루 정도면 어떻게든 말라요." 혼자서는 경직돼 있던 나 이사의 표정이 함께 일하는 동료들로 인해 천군만마를 얻은 듯 팔팔 살아난다. 완연한 가을, 오락가락하는 비 소식에 걱정되는 마음으로 물었다.

"비가 오면 어떡하죠?"
"...다시 빠는 거죠, 뭐." 

덧붙이는 글 | '혁신가의 자리'는 혁신가를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울혁신파크 활동단체 릴레이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서울혁신파크 블로그 및 뉴스레터:채널서울혁신파크에서 <혁신가의 자리> 연재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서울혁신파크 공식 서포터즈 파크캐스터 1기 한지선, 사진: 서울혁신파크 커뮤니케이션팀 문하나



태그:#서울혁신파크, #혁신가의자리, #마커스랩, #파이어파이팅,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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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혁신파크는 도시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국내 최초의 사회혁신 플랫폼입니다.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곳으로 250여 혁신 그룹, 1300여 명의 혁신가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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