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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청소기의 배터리를 교체하는 모습
 진공청소기의 배터리를 교체하는 모습
ⓒ 인라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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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동네 전파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엔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었다. 고장 난 라디오며 TV며 온갖 가전과 부속품이 꽉 들어차 있던 작은 공간. 그곳엔 무엇이든 고쳐내는 장인이 있었고, 그가 하는 일은 마치 죽은 생명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였다. 추억의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 속 '순돌이 아빠'도 그런 동네 전파사의 장인이었다.

여기 신개념 동네 전파사와 기술장인을 되살리려는 이들이 있다. 소셜 벤처 '인라이튼(ENLIGHTEN)'이 서울시(서울혁신파크 리빙랩)의 지원으로 '다시 쓰는 더 나은 방법 - 배터리뉴(BETTER REnew)'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잠들어 있는 가전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사라져가는 기술을 시민에게 돌려줌으로써 더 오래 가는 세상을 만들려는 실험이다. 지난 16일 신기용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무를 심듯 배터리를 갈다

 인라이튼 사무실 모습
 인라이튼 사무실 모습
ⓒ 인라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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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쉽고 싸게 무선 가전의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다면 멀쩡한 가전이 버려지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의 실험은 이런 작은 생각에서 출발했다.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 가전들, 특히 전동공구나 진공청소기처럼 배터리를 쓰는 무선 가전들이 짧은 배터리 수명 탓에 멀쩡한 채로 버려지곤 하는 현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무선 가전은 1년쯤 지나면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데, AS센터에선 제품가의 절반에 달하는 비용을 청구하니 차라리 새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멀쩡한 제품이 버려지는 거다. 우리는 배터리 안의 셀만 새것으로 교체하는데, 그 절반의 비용으로 성능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 나아진다."

이번 실험을 이끌고 있는 '인라이튼' 신기용 대표의 말이다.

'인라이튼'이 가진 기술은 무선 가전의 배터리팩(묶음)을 구성하는 셀을 새것으로 바꿔주는 기술로, 아주 오랜 훈련이나 값비싼 첨단 장비가 필요하진 않다. 그런데도 이 방법이 널리 쓰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기업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판 가전이 배터리 수명만큼만 쓰이다 버려져야 더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실험은 세상에 꼭 필요하지만 자본이 감추려는 기술을 시민에게 돌려주려는 시도다. 기술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갈 때 새로운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 더 이상 기업의 이익에 길들여진 소비자가 아니라 내 이웃과 공동체의 내일을 염려하는 시민으로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선 진공청소기 한 대를 1년간 더 쓰면 나무 네 그루를 심는 것과 맞먹을 만큼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신기용 대표는 말한다.

세상을 밝히려 학교를 나와 창업의 길로

 배터리셀을 교체하는 모습
 배터리셀을 교체하는 모습
ⓒ 인라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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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용 대표는 대학에서 디자인과 공학을 융합 전공했다. 졸업 작품으로 '유니버셜 디자인'(장애 유무나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을 적용한 재활치료용 자전거를 개발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혁신을 위한 PSS(Product-Service System, 제품-서비스 통합시스템) 디자인을 연구했다. 사회혁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것. 그 시절 전 세계의 에너지 불균형이 경제 불균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아프리카에 보낼 '태양광 램프'에 들어갈 작고 오래가는 배터리를 찾아 나섰던 게 배터리와 첫 인연이었다.

뜻이 맞는 이들을 모아 개발에 나선 끝에 그는 2013년 소셜 벤처경연대회에서 '병렬연결식 모듈형 태양광램프'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민 끝에 그는 그 길로 학교를 나와 '인라이튼(ENLIGHTEN)'을 설립했다. 세상을 밝히겠다는 뜻이다.

창업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태양광 램프의 사업화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변으로 눈을 돌렸고, 그때 아직 쓸 만한 채로 버려지는 스마트폰 배터리가 눈에 들어왔다. 밤낮없이 개발에 매달린 끝에 '휴대전화 배터리를 이용한 외장형 보조배터리'를 개발했고, 2014년 말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 '레드닷디자인어워드'에서 제품 콘셉트 부문 본상을, 2015년에는 삼성투모로우솔루션에서 다시 최우수상을 받았다. 기술력과 사회적 가치,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는 그야말로 탄탄한 '소셜 벤처'임을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용산과 세운전자상가 장인들에게 하루가 멀다고 찾아가 모르는 것을 묻고 또 물었다. 당연히 혼도 나고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너희들이 해봐야 안 된다'는 말을 들을 땐 힘이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선뜻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준 이들이 있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막상 어깨너머로 배워온 것을 마땅히 실습할 장비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일일이 사서 하자니 종류가 너무 많았고, 그렇다고 고객이 맡긴 가전으로 실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객의 물건을 망가뜨린 일도 몇 번 있었다. 새 제품으로 물어줘야 했던 적도 있었는데, 신 대표는 'R&D 비용으로 생각한다'며 웃었다.

여러 종류의 가전을 섣불리 다루기보다 기술에 자신감이 붙은 무선 청소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이른바 '육아맘'과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많이 찾았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미세) 먼지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청소기 안팎도 깨끗이 청소해주기 시작했다. 배터리를 갈려면 어느 정도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스스로 더 건강한 서비스가 되도록 청소기 안팎을 새것처럼 청소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가전의 내구성도 높아져 더 오래 새것처럼 쓸 수 있다. 최근엔 물량이 넘치는 바람에 청소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한 명 새로 뽑았다. 고객들의 만족도도 당연히 더 높아졌다.

"고객들이 너무 좋은 후기들을 남겨 준다. 새것 안 사길 진짜 잘했다는 말, 버릴 뻔했는데 너무 다행이라는 말을 들을 땐 정말 뿌듯하다. 손편지를 써서 응원해주신 분도 있고. 본인들에게도 지구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남는 것 같다."

'최순실이냐'는 욕도 먹어가며 조금씩 앞으로

 배터리뉴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배터리뉴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 인라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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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을 타고 물량이 두 배씩 느는 바람에 '서비스 예약제'를 도입했다. 현재와 같은 7명 체제가 자리 잡기 전에는 교체 작업과 청소, 포장과 전화 응대까지 적은 인원이 도맡다 보니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100대가 넘는 물량이 밀려있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성수공고 졸업예정인 예비장인까지 모두 7명이 함께 일한다. 10월부터는 전동킥보드와 전동휠, 전기자전거의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는 전문가팀도 힘을 보태고 있다. 배터리팩 안에 셀이 많이 들어갈수록 균형을 잡아주는 고도의 기술과 장비가 필요한데 이를 책임질 팀이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급한 고객을 위해 5000원을 추가로 내면 앞당겨 처리를 하는 서비스를 도입했는데, 어떤 분이 "최순실이냐"며 거칠게 항의를 했던 것.

하루에 정해진 물량을 순서대로 모두 처리한 뒤 일을 더 하겠단 뜻이었고, 5000원은 초과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것인데 새치기로 오해를 한 것이다. 새치기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돈 없으면 줄 서고, 돈이면 다 되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막무가내로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결국 그 서비스는 없앴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동네 전파사와 함께 기술장인의 가치를 되살리는 실험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전자제품 수리와 배터리 교체 작업을 해오다 설 자리를 잃거나 일거리가 떨어져 손을 놓은 기술장인들을 다시 현장으로 불러내는 것도 이번 실험의 중요한 과제다. 되살림 팩토리에는 50대 기술장인 한 명이 나와서 함께 일하고 있다. 그 50대 기술장인은 지금껏 자신도 몰랐던 일의 가치를 새롭게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들은 새로운 관계 맺기에도 힘쓰고 있다. 서로 얼굴조차 모르고 지내는 동네 주민들 사이의 관계, 또 시대가 바뀌면서 설 자리를 잃은 기술장인과 시민 사이의 관계 말이다. '되살림 팩토리'란 이름의 신개념 전파사와 되살림 가전을 가져와 파는 플리마켓이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다리'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래 가는 배터리처럼 오래도록 빛나길

'인라이튼'은 지난해인 2015년 '외장형 보조배터리'를 앞세워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에서 약 7만 달러의 투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더 쉽게 더 큰 돈을 벌 수 있음에도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힘든 길로 돌아가는 청년들, 이들의 도전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이번 실험명인 '배터리뉴'는 '배터리를 새롭게 한다'는 'Battery New'로 읽히기 쉽지만, '더 나은 되살림(회복)'이란 뜻의 'Better Renew'가 본래 뜻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답게 이름 짓는 솜씨도 남다르다.

"거창한 환경 이슈도 중요하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이들은 앞으로 더 많은 기술장인을 모으고 또 시민과 연결할 꿈을 가지고 있다. '가전 되살림 플랫폼' 애플리케이션도 만들 계획이다. '되살림 팩토리'도 더 큰 곳으로 옮겨 장인과 메이커 그리고 시민이 함께 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키우고 싶다고 한다.

"IoT(Internet of Things, 사물인터넷)시대라고 하지만 사실은 BoT(Battery of Things, 배터리 중심) 시대다.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는 제품이 없다. 우리는 이제 겨우 작은 성공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더 오래 가는 세상을 만들려는 꿈처럼, '인라이튼'의 아름다운 도전도 오래도록 이어지며 빛을 발하길 기대해본다.

'다시 쓰는 더 나은 방법 - 배터리뉴(BETTER REnew)' 실험은...'

올해 8월 서울시(서울혁신파크) 리빙랩(Living Lab) 사회혁신 실험 공모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에 선정된 6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수명이 다 한 무선가전의 배터리를 더 쉽고 싸게 교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자원의 낭비를 막고 되살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이 실험의 목표다. 또 자본의 논리와 시대 변화로 사라져가는 '착한 기술'과 장인을 되살려 시민에게 돌려주려는 실험이기도 하다.

되살림 신청은 배터리뉴 홈페이지 http://betterre.co.kr/ 에서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서울혁신파크 블로그 http://s_innopark.blog.me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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