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우리 대부분이 치를 떠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다 보면, 22일 국무회의 의결 및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를 통과한 '한일군사정보 보호협정'과 유사한 것을 만나게 된다. '1894년 조선과 일본의 군사정보 공유'라는 사건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라는 사건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1894년 연초,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반기를 들었다(동학농민전쟁). 양극화·시장개방·경제파탄으로 인한 대중적 분노를 근거로, 반군은 파죽지세를 일으키며 정부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다가 5월 31일, 전라도 중심지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때는 전주가 중심지였다.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중심지가 반군에게 떨어지자, 당황한 고종 임금은 6월 3일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기다렸다는 듯 수락했고, 6월 5일 청나라 북양함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그러자 6월 9일, 불청객이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군도 상륙한 것이다. 일본공사관과 일본영사관도 보호하고 일본인도 보호하는 한편, 반군도 제압해준다는 명목이었다.
엉뚱한 일본군까지 상륙하자, 조선과 청나라는 반군보다 일본군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조선은 청·일 양국 군대의 공동 철수를 요청했고, 청나라 역시 일본한테 "함께 철수하자"고 제의했다. 심지어 농민군도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철군의 명분을 만들 목적으로 스스로 전주성을 비워주었다. 정부군과의 전쟁을 중단한 것이다.
이로써 파병의 명분이 사라졌는데도,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의 파견 목적에 충실했다. 일본군의 진짜 목적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은 1880년대 중반부터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 증강을 추진했다. 그리고 1880년대 후반부터 전쟁의 구실을 모색했다. 그러던 차에 동학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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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 서울 광화문광장 동북쪽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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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드러나는 일본의 진짜 속내예나 이제나 일본은 치밀한 나라다. 청나라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군대를 보냈지만, 무턱대고 덤빌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그러므로 신중히 행동해야 했다.
조선 땅에서 청나라군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일본은 준비 단계를 밟았다. 그중 첫째는 영국·러시아·미국 같은 세계 각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로비였다. 자국과 청나라의 전쟁에 대해 국제사회가 중립을 유지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이 로비의 목적이었다.
외교 홍보전이 성공하자, 일본이 다음으로 추진한 것은 조선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이 벌어질 조선 땅을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제3지역 원정 경기를 홈그라운드 경기처럼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했다. 반군을 제압하고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출병한 일본군이 전봉준이 있는 전라도로 가지 않고 조선왕이 있는 한양으로 진격한 것이다. 일본의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7월 23일. <고종실록>에는 6월 21일로 적혀 있지만, 그것은 음력이다. 양력 날짜는 7월 23일이다. 이날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를 연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친일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런 다음, 일본은 조선이 일본군의 활동에 협력하도록 만들기 위해 법적 장치들을 만들었다. 8월 20일, 일본은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이란 조약을 조선과 체결했다. 일본은 이 조약 제3조를 통해 한양과 부산, 한양과 인천을 잇는 일본군 통신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일본군의 군사정보 운용에 협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엿새 뒤인 8월 26일, 일본은 조일양국맹약이란 또 다른 조약을 내놓았다. 일본은 이 조약 제2조를 통해,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줄 테니 일본군한테 각종 편의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각종 편의에는 당연히 군사정보 제공 혹은 공유가 포함된다. 제2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공격 및 방어의 전쟁을 담당하고, 조선국은 일본 군대의 진퇴나 식량 준비 등의 사항을 필히 협조하며 편의를 제공한다."일본군의 진퇴에 대해 협조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에는, 일본군이 움직일 방향과 그곳의 청나라군 동향에 대한 정보 제공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런 정보의 제공을 위해 조선 측이 협력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을 자기편으로 묶어둔 상태에서 일본군은 청나라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청일전쟁). 그때만 해도 3류 국가였던 일본이 대륙 최강을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렇게 청나라군을 꺾은 다음에 일본은 그제야 고종 임금의 희망사항을 들어주었다. 농민군 진압에 나선 것이다. 청나라를 꺾은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농민군을 가볍게 진압하고 조선을 보다 더 확실하게 장악했다.
1876년에 일본은 조선을 협박해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 후로 일본은 경제적으로만 조선을 장악했을 뿐, 정치나 군사적으로는 장악하지 못했다. 일본이 조선의 정치와 군사까지 장악한 것은 1894년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일본은 1894년에 군사정보 공유를 포함 조·일 협력체제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격파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조선에서 물러나고, 조선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학전쟁 발발과 조·일 군사정보 공유 등이 일본의 조선 장악이라는 의외의 결과로 연결되자, 고종은 명성황후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이 고종을 겁주고자 벌인 사건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다. 명성황후도 고종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황후를 시해한 측면도 있지만, 임금인 고종을 죽이기는 곤란하므로 그 대신에 고종을 겁주고자 왕비를 죽인 측면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조·일 간의 군사정보 공유라는 사건은 일본의 조선 장악은 물론이고 명성황후 시해라는 뜻밖의 사건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황후 시해 당시, 일본군과 일본 낭인(전직 무사)들은 조선 군대인 훈련대의 군인들을 거사에 끌어들였다. 일본이 조선군을 움직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군사정보 공유와 군사협력체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군사정보 공유를 발판으로 일본은 1894년에 청나라를 꺾고 1904년에는 러시아마저 격파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05년에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1910년에 조선을 삼켜버렸다. 조선이 일본과 군사정보를 공유한 것이 이런 비참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살인강도한테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었으니,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조선과 일본의 군사정보 공유, 결과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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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인 건청궁. 경복궁 내에 있다. 이 너머에 청와대가 있다. |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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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과의 군사정보 공유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군의 정보능력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정보공유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군한테 이득이 되는 측면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해가 되는 측면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강도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2일 박근혜가 재가한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일본측 명칭은 '비밀정보'보호협정이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국가안보 이익과 관련된 방위 관련 모든 정보'를 양국이 공유하도록 규정했다.
일본이 지난날 무슨 짓을 했고 지금도 어떤 야욕을 품고 있으며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일본과 비밀정보를 공유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방위 정보를 공유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1894년과 1904년의 사례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끔찍한 일을 우리 눈앞에서 재연시키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을 불장난하듯이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이 다시 태어난대도, 이렇게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일을 벌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