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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집에 수험생이 있다는 것이 여러모로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어제 고사장 학교 교문에서 딸아이에게 도시락을 건네는데 전장에 혼자 보내는 것처럼 짜안합니다. 혹시 무슨 실수나 하지 않을까 부모가 더 불안합니다. 전날부터 잠을 설친지라 한숨을 더 자고 일어났더니 폰을 보던 아내가 혀를 찼습니다.


"이런... 어느 수험생 도시락 가방에서 엄마 폰이 울려 퇴실당했데네. "
"아이고... 저걸 어쩌냐..."


같은 수험생을 둔 부모로서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이 얼마나 힘들까요. 아휴... 무슨 말로도 위로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을 당하면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죄책감'이기 때문입니다. 꽤 시간이 지나도 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일 뿐만 아니라 살면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실수들을 떠올리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회는 후회로 그치지 않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죄책감을 파고듭니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하다가도 한끼를 배불리 먹은 그 포만감에도 '아이, 너무 먹었네'하는 마음이 들면서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한순간 마음이 불편하지요.


이 죄책감은 화나 욕망이나 두려움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크고 무서운 호랑이입니다. 게다가 이 호랑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근원인 '죄'와 함께 피해갈 수 없이 맞닥뜨리는 것이 '신(God)'입니다.


기독교의 근간을 건드리게 되는 민감한 부분이라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신'과 '죄'를 언급하기엔 지면도 짧고 적당한 자리가 아닌 듯하지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 거대한 호랑이는 '죄'가 아니고 '죄책감'이기에 '신'과 '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을 믿든 안믿든 우리 모두의 의식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이 '신'이란 무엇인가요. 무한한 존재인 '신'을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무엇이 '신'이 아닌지는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이해했을가요.


그들은 신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너무도 자주 분노하기 때문이었지요. 성서에 보면 '신'이 백주 대낮에 땅을 갈라서 수백명을 흔적없이 사라지게도 하고, 저 멀리 산위에서 천둥과 번개 속에서 임재한다고 믿었지요. 고대에는 엄청난 자연의 파괴력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지진이나 양치는 들판의 천둥과 번개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지요.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옜날, 맨틀의 지각변동인 지진과 대기의 불안정으로 일어나는 천둥과 번개를 고대인들은 신의 분노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특히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의 분노는 자신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는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가히 공포와 전율이었지요.


그들이 믿었던 '신'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 파괴적인 자연 현상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저 '뒤틀린 신인식'이 '죄'의 근원으로 보여집니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징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뒤틀린 신인식의 저편에 '죄'가 도사리고 있고 그래서 '신'에 대한 뒤틀린 시각을 바로 잡으면 '죄'도 바로 잡힐 것입니다. 대체 왜 형태가 없는 성스러운 '신'이 육체를 가진 인간처럼 화를 내고 그 징벌로 사람을 죽이나요.


예수께서 어느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형제가 잘못하면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줘라."


인간처럼 화를 내고 질투하며 진노하여 세상을 쓸어버리는 폭군의 모양을 한 구약성서의 야훼와, 무한정 용서하라시며 자신을 창으로 찌른 병사들을 용서하신 예수님 사이의 이 간극은 고대사회의 뒤틀린 신인식으로는 메꿀수 없습니다. 중세시대 교조주의자들이 그 오랜세월 동안 뒤틀린 신의 형상에서 만들어낸 죄를 사람들에게 덮씌워 왔습니다. 교회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어느날 동네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짱돌로 칠 기세였습니다. 현장범이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을 예수께서 한방에 정리합니다.

 

"너희중에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살기 등등하던 동네사람들이 슬금슬금 짱돌 쥔 손을 감추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들이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 인간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죄'가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뼈아픈 실수에 대해 적당한 후회는 반성으로 이어지지만 우리의 감정이 그렇게 조절이 잘되면 얼마나 좋을가요. 그러한 기억은 거의 매번 후회로 시작해서 어김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며 쌓입니다. 


이 호랑이를 벗어나는 길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지나간 잘못에 대해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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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죄책감, #신,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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