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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자초한 루이 16세(재위 1774~1792년). 조선 정조 임금과 동시대 인물인 그는 정말로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 그래서 대혁명을 자초한 왕이었다. 소혁명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혁명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상황을 대혁명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박근혜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12일 밤 광화문 앞에서 울린 100만의 함성이 루이 16세의 귓전에도 들렸다면, 그는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베르사유 궁전을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혁명을 자초했다.

루이 16세.
 루이 16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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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국민들이 광화문 앞까지 가 친절하게 자신들의 뜻을 알려주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면서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니, 이제 그만 나오라'고 요구하는데도, 여전히 '대통령'으로서 '국정 정상화'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루이 16세가 보여준 아둔한 태도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박근혜가 루이 16세를 훨씬 능가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대혁명' 불러온 루이 16세의 선택들

프랑스 대혁명은 얼핏 보면 혁명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서 폭발했다. 1789년의 프랑스 인구는 2500만 정도였다. 1715년에 1500만 정도였으니, 74년 만에 1000만 명이 늘어나 67%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그 사이에 평균 수명도 21세에서 27세로 늘어났다. 인구증가와 평균수명 연장은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을 반영한다. 이것은 프랑스가 18세기에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을 반영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백성들이 너무 가난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런데도 혁명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에서 재정위기까지 겹쳐 정부가 국민통제 수단을 갖추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1775년부터 시작된 경기불황으로 물가는 급등하는 데 반해 실질임금은 감소하면서 대중의 불만이 극을 향해 달리던 차에 돌발적으로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루이 16세는 분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이 점은 몇 건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재정위기가 가중되자 루이 16세는 성직자(제1신분) 및 귀족층(제2신분)에 대한 특별과세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래서 소집된 게 1787년의 특별 명사회다. 하지만 이 회의에 모인 두 신분은 왕의 요구에 불응했다.

대신, 그들은 평민층(제3신분)에 대한 과세로 재정위기를 해소하도록 왕을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1789년에 소집된 게 그 유명한 삼부회다. 제1신분·제2신분·제3신분의 3부로 구성된 의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174년간이나 열리지 않던 삼부회는 이렇게 소집되었다. 

루이 16세가 성직자와 귀족들의 꼬임에 빠져 삼부회를 연 것은 그가 평민들의 불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반영한다. 제3신분한테서라도 돈을 뜯어내자는 심산으로 삼부회를 열었을 뿐, 상공인 계층인 부르주아가 이끄는 제3신분이 예전과 달리 얼마나 강해졌으며 그들이 얼마나 불만을 품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루이 16세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왕이 '친절하게도' 모임의 공간을 만들어주자, 제3신분은 이를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욕구를 분출하는 기회로 바꾸어버렸다. 삼부회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들만의 국민의회를 따로 소집하고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공포했다. 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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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보면, 루이 16세가 제3신분에게 광장을 제공하고 혁명 분출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평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을 못했던 것이다.

만약 혁명 이전에 100만 명의 제3신분이 궁궐 관저 앞에 모여 촛불을 들고 고함을 쳐댔다면, 아무리 눈치 없는 루이 16세일지라도 백성들의 뜻을 알아채고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그것이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불행이었다.

루이 16세의 눈치 없음은 삼부회 소집 이후에도 나타났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베르사유에서 나와 파리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 그를 연금한 혁명 주체세력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되 왕권만은 보장해주는 쪽으로 상황을 전개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 1791년에 파리를 빠져나가 국경 쪽으로 도주하다가 붙들린 것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입헌군주제하에서 상징적 군주 자리라도 지킬 수 있었는데, 필요 없는 불만을 품고 도주하다가 붙들린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갖고 있던 지지층마저 그를 떠나고 말았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태도는 같은 해에 또 나타났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반혁명운동을 벌이려다가 들통 난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예전의 왕권을 되찾으려고 외세와의 야합까지 꿈꾸었던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분위기 파악을 못하던 루이 16세는 1792년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폐위된 뒤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왕 최초로 재판에 회부된 왕이 된 것이다. 결국 1793년 1월 21일, 그 유명한 단두대에서 그는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박근혜는 아직까진 '지혜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 파문 관련 대국민 담화를 마친 뒤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 파문 관련 대국민 담화를 마친 뒤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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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필연의 결과물이 아니다. 대체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역사다. 상황에 따라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공인의 판단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만약 루이 16세가 분위기 파악을 하는 왕이었다면, 애당초 삼부회를 소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명한 군주였다면, 재정문제와 양극화 해소를 위한 다른 대안을 모색했을 것이다.

또 그가 약간의 눈치라도 있었다면, 혁명이 발생한 뒤에라도 도주를 선택하거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혁명 후에도 그에게 예의를 다했다. 계속해서 왕으로 대우해주었다. 그가 백성들의 정성을 알아주고 백성들의 처분을 기다렸다면, 프랑스 혁명이 그렇게 급진적으로 전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프랑스혁명은 대혁명이 아니라 소혁명으로 끝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자리와 권한에 연연하다가 결국 단두대 위에 서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호미로 막을 수도 있었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루이 16세는 100만 국민의 함성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런 기회를 누렸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박근혜를 곧바로 단죄하지 않고, 토요일 늦은 밤 광화문까지 달려가서 박근혜에게 지혜로운 선택의 길을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묵묵부답이다. 대통령으로서 국정 정상화를 고심하고 있다는 말만 전해줄 뿐이다. 이런 박근혜가 루이 16세보다 분위기 파악을 더 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앞으로 박근혜의 운명이 루이 16세의 운명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태그:#광화문_촛불집회, #루이_16세, #박근혜, #프랑스혁명, #삼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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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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