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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제가 연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길고 긴 밤을 덩그러니 놓인 빈 침대들을 보며 하염없이 고독의 눈물을 흘릴 대통령에게도 연민이 느껴질 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아 무척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의 연민이란 게 아주 개인적 자기만족 아니면 감정적 배설에 지나지 않은 건 아닐까 고민과 의심이 많았는데, 대통령 덕에 아직 상식과 정의감을 잃지 않은 건강한 연민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뉴스를 볼 때마다 육두문자가 먼저 튀어나오고 심지어 글을 쓰면서도 'ㅆ'이 먼저 써지는 걸 보면 아직 수양이 덜 되긴 했나 봅니다(수양이 덜 된 탓에 존칭이나 존댓말이 잘 안 써지니 눈에 거슬려도 양해하고 그냥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의 사태를 보면 우리의 내일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주 속이 시원하기도 합니다. 남녀노소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추운 밤 광장을 가득 메우고 높이 치켜든 작은 촛불 하나 하나가 모여 온갖 추잡한 음모와 술수로 도저히 그 안을 살펴 볼 수 없었던 청와대 구석 구석을 환희 비추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해괴망칙한 수많은 사건들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2% 정도 부족합니다. 그 2%를 채우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꼭 하셔야 할 매우 중요한 마지막 한가지 일, 최순실이 없어도 꼭 해야 하는 '사직서' 작성을 도와주고자 합니다. 그간 경험도 없고 도와 줄 사람도 없어 여태 사직서를 쓰시지 못하는 것 같은데 사직서 쓰는 거 참 쉽습니다. 혼자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괜한 걱정이 앞서 한 말씀 드립니다. 대통령도 보셨겠지만 며칠 전 청와대 앞에 떠있던 애드벌룬에 쓰였던 글귀는 '박근혜 퇴진'입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너무 창조적인 장면이라 당황해서 '박근혜 전진' 혹은 '박근혜  최고'로 읽었을까 싶어 확인해 드립니다. 아울러 그간의 대통령 성정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최순실 말고는 도통 만나는 이도 없고 TV도 잘 안 보는 것 같아 한 말씀 더 덧붙이면, 요새 광화문 쪽에서 들리는 국민들의 함성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함성이 아니라 대통령 탄핵 혹은 하야를 고래고래 소리치는 함성이니,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소리라고 오해하진 말았음 합니다.

좀 귀찮기도 해서 사직서 쓰는 법을 글로만 설명하려 했는데 그러면 대통령이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사직서 샘플을 그림으로 붙입니다. 평소 수첩에 꼭꼭 눌러 수기하는 모습이 생각나서 직접 베껴 쓰시라 내려 받아 사용할 수 있는 워드 파일보다 그림으로 붙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사직서
▲ 박근혜 사직서 박근혜 대통령 사직서
ⓒ 이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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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시작합니다. 그림을 참고하시고 아래 베껴 쓰는 요령대로 또박또박 눌러 쓰시면 사직서 쓰기 어렵지 않습니다.

스텝 1: A4용지, 편지봉투, 검정색 펜 준비하기

하얀 A4용지와 일반 편지 봉투를 준비합니다. 대통령 문장이 인쇄된 A4용지도 상관없습니다. 빈 종이면 됩니다. 지난번 어린이집 방문 때 보니 작은 것보다 큰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종이가 그보다 더 클 필요는 없습니다. 종이가 크면 여러 번 접어야 하고 편지 봉투에 넣기도 번거롭습니다. 그래도 굳이 창조적으로 큰 종이를 고집한다면 A4 사이즈의 서류봉투를 사용하세요.

사용할 펜은 지워지거나 번지기 쉬운 연필, 수성펜 보다는 검정색 유성 볼펜을 사용합니다. 장수상품 모나미 볼펜 강추합니다.

봉투는 부의금 봉투처럼 바탕이 하얀 무지 봉투를 사용합니다. 좋아하는 건 알지만 알록달록한 오방낭은 사직서 봉투로는 어울리지 않으니 아무리 손이 가도 사용하지 마세요.

스텝 2: '사직서' 제목쓰기

준비한 편지 혹은 서류 봉투 가운데에 큰 글씨로 '사직서'라 씁니다. 편지 봉투는 세로쓰기가, 서류봉투는 가로쓰기가 보기 좋습니다. 우주의 기운을 모아 예쁘게 오방색으로 치장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지저분해 보이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속지에도 맨 위에 조금 굵고 큰 글씨로 '사직서'라고 씁니다. 제목 글씨는 좀 굵고 커야 전체적인 균형이 맞아 보기에 좋습니다. 이 제목글에도 오방색으로 채색하진 마시고 그저 정성껏 정자체로 쓰면 됩니다.

스텝 3: 내용쓰기

오독의 여지없이 누구나 단박에 정확히 읽을 수 있도록 흘려 쓰지 않고 정자체로 꼭꼭 눌러 씁니다. 유성볼펜을 사용하니 종이를 몇 장 받쳐 쓰면 미끄러지지 않고 잘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받쳐 쓰면 나중에라도 사직서가 대통령 본인이 쓴 게 맞냐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해대는 의심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 막을 수 있는 좋은 물적 증거로 밑장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두 줄이면 되니 손이 떨려도 좀 참고 보이는 대로 차분하게 쓰세요.

밑줄이 그어진 첫 번째 빈 칸에는 본인의 한글 이름, '박근혜'를 또박또박 쓰면 됩니다(있어 보이려고 영어, 중국어, 불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로 표기해선 안 됩니다).

두 번째 빈 칸에는 사직할 날짜(예: 2016년 11월18일)를, 세 번째 빈 칸에는 사직의 이유를 쓰면 됩니다. 사직 이유는 말도 끊지 못하며 구구절절 길게 작문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깔끔하게 '일신상의'라고 쓰면 됩니다. '일신상의'라는 표현은 민간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사직하려는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직서 표현이고 사표를 수리할 상사나 경영진들도 이유 불문하고 사직서를 수리해 주는,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스텝 4: 날짜, 서명 및 도장 찍기

맨 마지막으로 사직서를 작성한 날짜를 쓰고 이어 한글 이름을 서명하고 도장을 찍으면 사직서 작성이 끝납니다. 도장은 가급적 개인 인감 도장을 사용하세요.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으니 막도장은 안됩니다. 인감도장을 최순실이 갖고 있어 쓸 수 없거나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냥 오른쪽 혹은 왼쪽 엄지 손가락 중 한 손가락의 지장을 찍으면 되니 당황하지 마세요.

다섯(5)이라는 숫자가 너무 좋아 다섯 손가락 지장을 모두 찍어도 됩니다만 그럴 땐 지장들이 겹치거나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 찍습니다. 뭉개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찍는 것은 한 손가락만 찍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쉽지요? 이렇게 잘 써진 사직서를 작성하고 나면 미리 준비한 봉투에 곱게 접어 넣고 평소 사용했던 집무실 책상 가운데 반듯하게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청와대 문을 나서면 됩니다. 평소 집무실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사직서는 집무실 책상에 놓습니다. 자던 침대나 운동했던 기계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정문으로 곧장 나오지 마시고 춘추관에 들러 그간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아주 낯설지 않은 기자들에게 '전 오늘부로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사직합니다.' 짧게 한마디 인사만 하고 나오면 정말 끝입니다. 질문은 이번에도 받을 필요 없습니다.

읽어 보니 사직서 쓰기 참 쉽지요?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을 읽을 줄 알면 90초 정도면 숙지할 수 있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춘추관을 들려 인사하고, 아무리 천천히 걸어 나와도 7시간이면 청와대를 나올 수 있습니다.

그간 감당하기 벅찬 대통령직을 수행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직서도 써봤던
대한민국 시민 배상.


태그:#박근혜_사직, #박근혜_하야, #박근혜_탄핵, #새누리당, #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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