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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의 전경
 송담서원의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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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에서 구지 방면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송담서원이 있다. 도동서원과는 달리, 도로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나무들로 앞이 가려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무심히 지나치면 그 존재마저 놓치기 쉽다. 그러나 송담서원과 신도비는 임진왜란 의병장 박성 선생을 기리는 유적이다. 찾아뵙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니다. 길가에 작은 표지석도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으로서 학행이 높았던 선비, 박성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1월 27일자에 '이항복을 홍문관 제학에, 조인득을 공조참판에, 이노를 동지중추부사에, 장운익을 충청도 관찰사에, 윤유기를 사간원 헌납에, 박성(朴惺)을 형조정랑에, 윤의립을 예문관 대교에 제수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사관(史官)이 박성에게만은 '영남 사람인데 선비로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평가를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선조실록> 1605년(선조 38) 2월 13일자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 비변사가 수령(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을 맡을 만한 재목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을 임금에게 천거하는 중에 박성을 거론하자, 사관은 '박성은 학행과 지조가 있다'라는 평언을 단다. 이 기사에서 사관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초대 의병대장을 맡은 서사원(徐思遠)에 대해서도 '명성이 있다'라는 평가를 첨부했다.

송담서원의 덕양문과 강당이 보이는 풍경, 붉게 든 단풍이 묘사철임을 말해준다. 묘사를 지내기 위해 2016년 11월 11월 이곳을 찾은 박성 의병장 후손들의 차량들이 덕양문 앞에 주차해 있다.
 송담서원의 덕양문과 강당이 보이는 풍경, 붉게 든 단풍이 묘사철임을 말해준다. 묘사를 지내기 위해 2016년 11월 11월 이곳을 찾은 박성 의병장 후손들의 차량들이 덕양문 앞에 주차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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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나오는 때는 1592년(선조 25)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이다. 수정실록은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정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었다. 김면, 박성, 곽준, 곽율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는데, 손인갑을 중군으로 삼았다'라고 전해준다.

박성은 6월 28일자, 6월 29일자 <선조실록>과 8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도 등장한다. 이 세 날짜 중에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임금을 대신해서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관리) 김성일이 임금에게 임진왜란 초기의 경상도 상황을 보고하는 6월 28일자 기사만 일부 인용해 본다.

'본도(本道, 경상우도)가 함락되어 무너지자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아니라 높고 낮은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산속으로 도망쳐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의병으로)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이 그의 동지인 현풍의 곽율, 박성, 권양 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1592년 실록에 나오는 박성 기사는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이거나, 공을 세웠으니 상을 주어야 한다고 비변사가 왕에게 건의하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박성은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그래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4-2번지에 있는 송담서원의 안내판은 '박성은 임진왜란 때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참모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청송에 머물면서 청송, 진보, 영덕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는데, 이때 체찰사 이원익이 언제나 "선생"이라 호칭하면서 공경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안내판의 문장은 박성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실록의 증언과, '선비로서 이름이 드러났다' 및 '학행과 지조가 있다'는 왕조실록 집필 사관의 평가를 잘 버무려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송담서원(松潭書院)은 박성을 추모하여 세워진 서원이다. 박성의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庵), 본관은 밀양으로, 1549년(명종 4) 대구 달성군 현풍 솔례에서 출생했다.

송담서원의 강당
 송담서원의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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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은 19세인 1567년(명종 22)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인 어머니의 권유로 사마시(과거 1차 시험)에 수석 합격하지만 아버지 박사눌(朴思訥)의 별세 이후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34세 이후 박성은 영남8현 또는 중외(中外, 전국)7현 중에서도 으뜸가는 선비로 천거된다. 그 결과 그에게는 20여 차례에 걸쳐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자의 스승) 등 많은 벼슬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는 공조좌랑, 안음현감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박성이 '전쟁 때는 명나라 군사를 접응하고 장정을 동원해 군인에 충당하며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뒤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요약하면, 임무 완수에 최선을 다했지만 중앙 정치권의 줄서기 풍토가 싫어 스스로 관직을 버렸다는 뜻이다.

박성을 기리는 사당 '대암 선생 사당'은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창리 582번지에 있다. <대암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를 재촬영한 사진이다.
 박성을 기리는 사당 '대암 선생 사당'은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창리 582번지에 있다. <대암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를 재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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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라가 전란에 빠져 있는 중이었으므로 박성은 장정들을 관리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조달, 보급하여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 않아도 흉년과 전쟁으로 형편이 극히 나빠진 터에 외국 군대의 군수 물자까지 책임지는 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 일은 누군가는 맡아서 해결해야 할 나라의 과제였기에 박성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성의를 다해 임무를 완수했다. 

당연히, 그는 권세와 재물을 가진 지역 호족(豪族)들이 나랏일에 비협조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세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긴 글)에 '천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악인을 대하면 자신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는 양 여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듯이, 청탁, 부정부패, 적당주의, 봐주기가 없는 박성은 호족들의 두려움만이 아니라 미움까지 샀다.

원칙대로 나랏일을 집행한 박성, 호족들의 두려움과 미움 사

세속에 찌든 사람들은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보편적 진실로 믿는다. 실제로는 1급 청정수에만 사는 깨끗한 물고기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모른 척한다. 박성이 부담스러웠던 지방 호족들은 중앙 권력자들에게 그를 헐뜯는 말을 많이 하였을 것이고, 그 결과 강직하고 청렴한 원칙주의자 박성을 좋아하지 않는 중앙정부 실력자가 출현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청송 주왕산 아래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 이후, 박성의 공적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조정은 그에게 공조정랑, 익위사 위솔, 임천 군수, 영천 군수, 익산 군수, 군자감 부정, 통례원 상례, 청송 부사 등의 내직(內職, 중앙 조정 직책)과 외직(外職, 지방 근무) 벼슬을 맡아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송담서원 강당의 내부 모습. 넓고 장중한 마루에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송담서원 강당의 내부 모습. 넓고 장중한 마루에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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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은 44세 때 임진왜란을 만났다. 그는 김성일이 경남 거창에 진을 쳤을 때 참모를 맡아 종군하였다. 이때는 이미 왜적이 거리낌없이 북상하여 나라 안 모든 곳이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빠진 시기였다. 당연히, 거창 역시 적의 총탄과 말발굽 아래 죽음의 땅으로 초토화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김성일에게 말했다.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낙동강 서쪽을 보전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전세를 돌이킬 근거가 없어질 터인데,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공께서는 어찌 하시렵니까?"

김성일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국경을 지키는 신하는 국경에서 죽는 것이 예(禮)를 지키는 것이오. 이곳은 내 집이니 나는 여기서 죽어 마땅하오. 그대는 어서 피하시오."

박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임금자리도 사양하고 숙제와 함께 수양산에 들었다가 주나라 무왕의 전쟁 야욕에 반대한 끝에 고사리만 캐어 먹으며 살다가 굶어죽은) 백이와 (제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조나라와 위나라까지 순방하면서 진에 대항하도록 만든) 노련이 관리로서의 책임 때문에 그리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저는 공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이미 약속하였는데 어찌 이곳을 떠나 욕되게 목숨을 연장하리오."

박성은 김성일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던 김성일은 진주성 싸움을 앞두고 역질에 걸려 1593년 4월 경상우병영 진중에서 병사한다. 이때 모두들 김성일의 전염병을 무서워하여 슬금슬금 병문안조차 피했지만 박성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묘갈명은 '김성일이 병이 위독해진 순간 박성에게 "그대의 충성심과 신뢰가 오늘과 같은 줄 내 진작 알고 있었소" 하며 손을 잡았다'라고 전해준다. 실록을 쓴 사관이 박성을 두고 '학행과 지조가 있다'라고 기록한 까닭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송담서원 강당으로 출입하는 덕양문의 솟을대문 모습. 활짝 열린 문 안으로 강당이 보인다.
 송담서원 강당으로 출입하는 덕양문의 솟을대문 모습. 활짝 열린 문 안으로 강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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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은 정유재란 당시 49세로, 청송에 있었다.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김성일, 류성룡 등과 더불어 이황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인 조목(趙穆, 1524∼1606)을 찾아 의병대장이 되어주기를 청했다. 조목은 자신이 너무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박성에게 임무를 맡겼다.

사실 조목은 그 당시 74세나 되는 연로한 선비였으므로 의병대장을 사양한다 해서 결코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이후 체찰사(전쟁 중 왕권을 전적으로 위임받아 지역의 일을 처리하는 관리) 이원익은 박성을 '주왕산성 대장'으로 삼았다. 이 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원익이 박성에게 꼭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며 예의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활짝 열린 덕양문 사이로 강당과, 강당의 현판 '송담서원', 그리고 제사를 준비 중인 박성 의병장 후손들의 모습이 보이는 풍경
 활짝 열린 덕양문 사이로 강당과, 강당의 현판 '송담서원', 그리고 제사를 준비 중인 박성 의병장 후손들의 모습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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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은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소학>부터 먼저 읽으라고 권했다. '성현을 배우려면 이 글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또 곧추앉기를 권했다. 그는 '똑바로 앉으면 비뚤어지려는 마음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했다. 대략 기본이 중요하다는 뜻이니, 입시 일변도 교육 때문에 서양으로부터 '한국은 교육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비판을 듣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만하다.  

"똑바로 앉으면 마음이 바로 잡힌다"

그는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를 한 뒤 머리를 빗고 옷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다음 어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가묘(家廟, 집 안에 둔 조상의 사당)에 참배한 후 학문에 매진했다. 그리고 한밤에야 자리에 누웠다.

20년 동안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박성은 3년 동안 쌀밥을 먹지 않고 고깃국을 물리쳤다. 묘소 앞에서 한결같이 슬퍼하며 3년상을 마치고 나자 지나치게 야위어 뼈만 남았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雙髥愁催老
양 귀밑 흰 머리 늙음을 재촉하고
三年病轉深
삼년 앓던 병은 더욱 심해졌지만
雲林藏拙迹
구름 낀 숲에 드니 자취가 사라지고
玉井濯煩襟
옥 같은 샘물에 마음이 맑아지네
曾灑哀鵑淚
두견새 슬픈 눈물 진작에 뿌렸고
空添蹈海心
바다에 빠질 마음 더욱 짙어지는데
荒村滯秋夜
황량한 산골에서 가을밤을 지내노니
不寐獨悲吟
잠 못 이뤄 나 홀로 슬픔만 쌓이누나'
- 초정야음(椒井夜吟) 전문

서원 강당과 덕양문을 등지고 반우향우 정도의 각도에 자리잡고 있는 박성 신도비와 비각. 거리상으로는 덕양문에서 100미터가량 된다.
 서원 강당과 덕양문을 등지고 반우향우 정도의 각도에 자리잡고 있는 박성 신도비와 비각. 거리상으로는 덕양문에서 100미터가량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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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은 형제들도 끔찍하게 보살펴서 1백 명에 이르는 노비들을 모두 종생과 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본디 몸만 가릴 만큼의 옷을 입었고,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먹었으며, 온갖 화려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검소한 인물이었다.

58세 되던 1606년, 이윽고 병이 들어 박성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제사를 맞아 슬프게 통곡하던 중 열이 치솟고 머리에 종기가 돋아 10월 4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그는 청송에서 현풍으로 운구(運柩, 관을 상여에 실어 옮김)되어 선영(先塋, 선조들의 산소가 있는 묘역) 아래에 묻혔다.

'羸病淸秋獨掩關
파리하게 병이 들어 맑은 가을 사립문을 닫으니
故園雲隔幾重山
고향 하늘로 갈 저 구름도 몇 겹 산에 막혔구나
寂廖楓菊無人間
단풍과 국화꽃도 찾는 이 없어 쓸쓸한데
幽鳥數聲庭樹間
나지막한 새 소리만 줄곧 나무 사이를 흐르네'
- 추일병음(秋日病吟) 전문

그의 사후 28년인 1634년(인조 12) 무렵, 왕조실록을 쓴 사관이 서사원과 더불어 '선비로서 명성이 있다'라고 평했던 장현광이 발의하여 쌍계에 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화재 때문에 미처 봉안하지 못했다. 그 뒤 60여 년이 더 경과한 1694년(숙종 20) 사림에서 다시 선생의 산소 아래에 서원을 건립하고, 편액을 송담서원이라 했다.

<대암선생문집> 책판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54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있을 때 의병을 소집하기 위해 쓴 격문인「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대암선생문집> 책판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54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있을 때 의병을 소집하기 위해 쓴 격문인「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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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국 대부분의 서원들처럼 송담서원도 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지만, 1993년 이래 자손들이 뜻을 모으고 나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서원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미 웅장한 덕양문과 강당, 그리고 가로로 길게 늘어진 담장은 크게 눈길을 끈다. 강당 안 마루에 서서 담대하게 설치된 창살들을 헤집고 들어온 햇살에 눈이 부시는 느낌을 받아보는 경험도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체감이다.

강당에서 반우향우 쪽으로 100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신도비와 비각도 있다. 강당에서 이 비각까지가 모두 서원 경내이다. 비각 앞에서 강당 쪽을 쳐다보노라면, 장차 부속 건물들이 다 갖춰져 대단한 위용을 뽐낼 송담서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임진왜란 의병장이자 성실한 선비였던 박성, 우리는 그의 후대를 이어가는 이 땅의 겨레된 도리로서 송담서원을 더욱 훌륭하게 복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선생은 <소학>부터 읽으라고 했다. 굶지 않을 만큼만 먹고, 예의를 지킬 만큼만 입으라고 했다. 똑바로 앉고, 새벽에 일어나 효도를 실천하고, 밤늦도록 책을 읽고 생각하라고 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목숨을 던지라고 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참 많다.

박성 의병장의 묘소는 저 아래로 낙동강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더 위에 있는 묘소는 의병장의 아버지 박사눌의 산소이다.
 박성 의병장의 묘소는 저 아래로 낙동강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더 위에 있는 묘소는 의병장의 아버지 박사눌의 산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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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
김성일의 참모로서,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창의를 독려하기 위해 쓴 글

나라의 운수가 지극히 불행하여 이빨을 검게 물들인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다. 이에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란을 하였고, 종묘와 사직이 먼지를 뒤집어썼다. 아아, 사람은 누구나 떳떳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신하와 자식된 자로서 어느 누군들 절개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래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 즉 유학이 깊은 지역)이라 일컬어 왔다. 또한 이곳 응천(밀양) 고을은 선비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지금 왜적들이 성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모두가 우리의 부형이거나 그 처자식들이다. 왜적들은 위로 임금의 원수이니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고(不俱戴天之讎, 불구대천지수),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깊은 숲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만은 잠시고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적을 공격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것이 어찌 적들이 가득하여 우리 백성들이 싸울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겠는가.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 때문에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하고 계책이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뜻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비밀히 서로 연락하여 깨닫게 하고,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리하여 왜적을 칠 만하면 고향에서 원충갑(元沖甲, 1291년 의병을 일으켜 원주성을 지킨 인물로, 선조가 배포한 창의 독려 교서에도 거론되어 있다)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만하지 못하면 경상좌병사의 군대를 찾아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내가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의병이 되어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도 좋으리라.

지난번에 좌랑 김면과 의령현감 정인홍이 충성을 드날리고 의리를 드높여 한 번 수리치자 각 지역에서 그 소리에 맞춰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군사의 세력이 크게 떨쳐 일어나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울 만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도 왜적의 기세에 겁만 먹지 말고 더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떨쳐 한결같이 군부(君父)와 형제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라. 그렇게 하면 충성을 실천하려는 분노가 백 배 솟구칠 터이니, 어찌 왜적들이 우리를 당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의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기세가 꺾여 송도의 청석령에서 크게 패하였고, 평양의 대동강에 반쯤 빠져 죽었다.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들어간 자들도 순변사 이일에게 도륙되었다. 중국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 우리를 돕고 있는데, 조승훈, 곽몽진, 왕수신 등 세 대장이 각각 정예병 수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지원차 내려오고 있으며, 수군 10만 명도 산동에서 곧바로 왜적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형세는 이미 기세가 올랐으니 왜적이 멸망할 날은 어마 남지 않았다. 그런즉 지금이야말로 뜻 있는 선비들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이다. 만약 시간을 끌다가 기회를 놓치면 공을 세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큰 윤리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낯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 중에는 무식하여 군신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도 있을 터이다. 이들은 오직 상과 벌로만 권장하고 또 징계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공천(公賤, 관청의 노비)과 사천(私賤, 양반 가문의 노비)을 막론하고 적의 머리를 하나 얻은 자는 급제(及第, 벼슬길을 열어줌)를 주고, 둘을 얻은 자는 6품직을 주고, 셋을 얻은 자는 가선대부를 주기로 했다. 칼을 다룰 줄 알거나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의병으로 나아가 마음을 굳게 하여 힘껏 싸우면, 위로는 2품의 벼슬까지 알 수 있고, 아래로는 훈신(勳臣, 공을 세운 신하)의 대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한 몸에 영광이 가득하고 후손에게 혜택이 이어질 것이다.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속에만 숨어 있으면, 비록 왜놈의 칼날을 모면할지라도 깊은 산에서 굶어죽고 말 것이다. 또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렝서 형벌을 내릴 것이다. 싸움터에 나아가지 않은 자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까지 처형되리라. 그러므로 힘껏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도록 하라. 그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할까.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태그:#박성, #송담서원, #임진왜란,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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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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