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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불편한 내 처지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내 삶이 소설에 나올 법하다는 말은 아니고, 귀촌한 사람으로서 시골에서 '이방인' 비슷하게 살고 있는 처지를 말하는 것. 글에 나오는 소설가 '이령'이나 베트남 여자 '쓰엉'과 닮은 점은 그뿐이다. 그럼에도 감정이입이 너무 잘 돼서는 이 책을 보며 내가 사는 곳과 내 삶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됐다.

"한국음식을 능숙하게 요리한다고 해도 쓰엉은 외국인일 뿐이었다. (…) 산골에서 나고 그곳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고 선량한 노인들은 낯선 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가일리에서 평생을 살다 죽는다고 해도 쓰엉은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더라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18쪽)

메콩 강 처녀뱃사공으로 살다가 한국으로 시집 온 지 7년이 된 쓰엉. 그이는 이령의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는 일로 돈을 받으며 살림을 꾸린다. 굳이 외국 사람이 아니어도 할매, 할배가 많은 시골에서 낯선 젊은이는 무조건 관심 대상이다(귀촌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관심이 부담스럽다). 그러니 마을 토박이 남자와 혼인한, 그것도 그 남자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외국 여자를 두고는 얼마나 말들이 많았을까.

보통 '관심'이라면 좋은 뜻으로 해석할 때도 많지만, 시골에서는 좀 다르다. 특히 마을 사람이 되겠다고 눌러앉은 '낯선' 사람에게는. '신기함'에서 출발해 '의심'과 '경계'까지 포함된 그 눈빛을 나는 알고 있다. 늙고 선량한 어르신들한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 눈빛은, 마을 토박이가 아닌 한, 수십 년을 눌러 살더라도 평생 이방인들의 뒤를 쫓아올 거라는 사실도.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금을 읽듯 빤히 읽히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베트남 여자 쓰엉. 바다 건너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금을 읽듯 빤히 읽히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베트남 여자 쓰엉. 바다 건너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했다.
ⓒ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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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밖에서 온 소설가 이령은 쓰엉처럼 젊은 여자지만 외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조금은 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고 할 수 있으려나.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하얀집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고자 바깥으로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이령. 작은 마을에서 그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런 삶은 도시에서라면 수도 없이 많을 터인데, 작은 시골마을에선 이야깃거리를 넘어 '흉'마저 된다.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집을 짓고 들어앉았을까나?" 마을 할머니가 이령 부부한테 갖는 궁금증은 애교에 불과하다(나도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산길에서 이령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는, 이령의 몸 상태에는 관심이 없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부부가 지붕이 높이 솟은 집을 짓는 바람에 동티가 난 거라고, 마을에 닥친 액을 막고자 조상들이 알아서 손을 쓴 거라고 수군거렸을 뿐이다. 외지인을 대하는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과연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일까?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다 보니 왠지 남 일 같지만은 않아서 못내 씁쓸하다.

시골 공동체 정서를 외면한 이령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조금이나마 잘못이 있다 치자. 그럼 쓰엉은? 늦은 밤 시도 때도 없이 남편과 같이 있는 방으로 쳐들어오고, 며느리 뺨 때리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시어머니 구박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온 죄밖에 없다. 집에 불이 나면서 삶터도 시어머니도 불길과 함께 사라진 뒤, 술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남편 종태를 돌보며 집안을 건사한 쓰엉에게 돌아온 건 남편의 의심과 폭력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수년 동안 살 맞대고 살아온 부인을, 시어머니를 죽이고자 불을 냈다고 의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 걸까. 쓰엉이 베트남 여자가 아닌 한국 사람이었어도 감히 그런 의심을 품을 수나 있었을까.

그래, 거기서라도 멈췄다면 내 마음이 이다지도 허망하지는 않았겠지. 하루아침에 삶터와 어머니를 잃은 종태는, 원망의 씨앗을 도시에서 온 이방인들한테까지 뿌리고야 말았으니. 아, 신이시여! 그 씨앗은 급기야 그 이방인들의 집을, 집 안에 꼭꼭 숨어 있던 이령마저 태우는 불씨가 되고야 만다. 그리고 그 불씨는 위태하게 이어져 온 쓰엉의 삶마저 태워버린다. 남편의 거짓 증언으로 불을 낸 죄인이 돼버린 것. 정작 불을 낸 것은 남편이건만.

한국말을 잘하던 쓰엉이 조사를 받는 순간부터 갑자기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대신 가서 사실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이럴진대, 쓰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음 좋은 벙어리 동주 아저씨는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을까. 나와 동주 아저씨가 현실과 소설 속 인물이라는 차이는 제쳐두고 말이지.

뒤엉켜 버린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동정과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헛된 꿈을 좇아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을 떠났고 돌아갈 수 없었다. 수년 동안 갇혀 살았지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다." (98쪽)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금을 읽듯 빤히 읽히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쓰엉. 바다 건너 근본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험이, 늙고 야윈 할머니께 평생 만질 수 없었던 것을, 깨끗하고 아늑한 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선택이라고 믿었건만. 그리하여 언제까지라도 할머니의 자랑이자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이고 싶었건만.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뒤엉켜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140쪽)

"그녀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순응하며 살려면 고향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대신 가난하고 비루하지만 안전한 삶을 선택했어야 했다." (239쪽)

쓰엉은 젊고 활기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를 꿈꿨다. 산골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동경했던 게 죄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고향을 떠나는 것은 위험하고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화를 내던 쓰엉 할아버지의 말씀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내 마음 속을 내리누른다. 할아버지는 쓰엉 앞에 닥칠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단 말인가. 쓰엉은 정녕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인가.

"쓰엉은 꾸억의 손을 뿌리쳤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또다시 꾸억을 외면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외딴집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239~240쪽)

오토바이를 장만하고 날마다 품을 팔러 바깥을 다니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쓰엉.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그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건 무엇이었을까. 도시의 삶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해 준 외딴집과 그 주인들이었을까, 아니면 베트남이나 산골마을이나 벼랑 끝이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일까.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왔나, 자괴감이 든다"는 분위기로 한 마디 내뱉을 법도 한데, 쓰엉은 후회하지 않는단다. 지독한 현실 앞에서도 후회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그이의 처연한 삶이 너무 아프다.

'이방인'이 '이방인'을 만났을 때

"날이 저물면 어둠과 침묵에 싸이는 마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명명되지 않은 채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존재였다. 쓰엉은 부피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212쪽)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두운 밤이다. 벌레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조용한 마을이 유독 낯설게 느껴진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딱 저 글처럼, 우리 집이 마을과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령의 하얀집처럼 외딴집이 아님에도. 

 산골 마을에 살면서 버스를 타거나 읍내에 나갔을 때 더러 외국 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안 그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디서 왔을까, 몇 살일까, 잘 살고 있을까, 이것저것 혼자 마음속으로만 물어볼 때가 많았다.
 산골 마을에 살면서 버스를 타거나 읍내에 나갔을 때 더러 외국 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안 그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디서 왔을까, 몇 살일까, 잘 살고 있을까, 이것저것 혼자 마음속으로만 물어볼 때가 많았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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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에 살면서 버스를 타거나 읍내에 나갔을 때 더러 외국 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안 그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디서 왔을까, 몇 살일까, 잘 살고 있을까, 이것저것 혼자 마음 속으로만 물어볼 때가 많았다.

이 책을 보고 나니 그동안 내가 본 사람들 가운데, 아니 한국으로 건너온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쓰엉처럼 모질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겁이 난다. 어딘가에 분명 있는 삶일 것만 같아서. 어쩌면 쓰엉보다 더 지독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불안하기도 하고.

쓰엉과 이령은 '가일리'라는 한 산골마을에서 비슷한 '이방인' 처지로 만났다. 서로 다른 까닭으로 그곳에 왔고, 그곳에 사는 것이 힘겨웠던 두 여자. '이방인'이라는 공통분모가 둘을 엮어 주었고, 낯선 땅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주었는데... 마을은, 아니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참하게 짓밟았다. 한 사람은 목숨을 잃고 또 한 사람은 남편의 죄를 덧없이 뒤집어쓰게 하는 것으로.

'이방인'은 다른 나라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도 한국 사람인 이령마저 이방인으로 그려낸 소설, <쓰엉>. 이 글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아팠던 건, 나 또한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외지것이 어쩌구~' 하는 소리 안 듣고 싶어서 보이지 않게 발버둥 친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서일 거다.

나름 무난하게 귀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내 생각뿐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살기는 한다만)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데, 쓰엉과 비슷한 처지로 한국에 온 많은 여자들은 이 소설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 가운데 누구라도,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왔구나, 참 잘 왔다. 행복하다"면서 환하게 웃어 준다면 이 불편한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도 같은데.


쓰엉

서성란 지음, 산지니(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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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