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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중고생 연대가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5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중고생 연대가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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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서울에 올라가신다면서요?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저희들도 힘을 보태야죠."
"어쩌면 4.19 혁명 때처럼 역사적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현장에 함께 있고 싶어요."
"서울에 가서 우리 고등학생들이 박근혜 대통령보다 지적 수준과 판단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걸 몸으로 보여줘야겠어요."


12일(토)에 있을 민중총궐기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교무실까지 따라와 앞 다퉈 건넨 말이다. 지금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손에 들 피켓도 구상하고 있다며, 기꺼이 '요금'도 갹출해 내겠다면서 조르듯 말했다. 이럴 때조차 지방에 사는 설움을 느껴야하느냐며,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광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서울 아이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그러나 도중에 말을 끊으며 무질러버렸다.

아이들 앞에서 속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다. 솔직히 안아주고 싶을 만큼 대견했지만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자칫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하이에나 같은 일부 언론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선동한 종북 좌파 교사' 이야기는 이젠 식상할 만큼 익숙한 플롯 아닌가.

몇몇 아이들은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서라도 기어이 올라가겠다고 했다. 서울을 처음 가는 것도 아니고,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더욱이 가겠다는 친구들도 여럿이니 겁낼 것 없다며 으스대기도 했다. 더욱이 친절한 길잡이인 스마트폰까지 손에 들려 있으니 뭐가 문제냐며 웃어 보였다. 가만두면 진짜 갈 참이었다.

"촛불집회가 어린 너희들이 떠올리는 것처럼 평화로운 곳만은 아니야. 여느 때처럼 경찰이 불법 시위로 내몰아 진압하게 되면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최루액 섞은 물대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얼마 전 백남기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한 그 물대포 말이야. 너희들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엇에 홀린 듯 말을 꺼내놓고는 화들짝 놀랐다. 내 입에서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수업시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예를 일일이 거론하며 역사의 변곡점마다 고등학생이 주체가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고 강조해왔던 터다. 그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도록 실시한 계기수업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아이들 앞에서 '가만히 있어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은 것이다. 허구한 날 '생각 없음'을 개탄해왔으면서도, 정작 아이들이 행동에 나서려니 가로막는 꼴이다.  순간 '배움과 실천의 괴리'라며 손가락질했을 법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에 아이들은 곧장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것은 교사가 아닌 '꼰대'를 향한 조롱의 눈빛이었다.

평상시 진보적인 양 행세했던 나 역시 내심 아이들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일 뿐이라는 고루한 인식에 찌들어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미성숙한 존재이기에 그들의 행동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오랜 편견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시대도 변했고 아이들도 달라졌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꼰대스러움'은 더께처럼 켜켜이 쌓여 몸에서 털어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꼰대'가 되어버린 기성세대, 할 말이 없다

비단 나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한 아이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기성세대의 '비겁함'을 싸잡아 나무랐다. TV에서 연일 계속되는 촛불집회 관련 뉴스를 본 부모님이 그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니, 혹시라도 시위에 나서거나 휩쓸리지 마라"며 누누이 당부했단다. 바로 그때 부모님 앞에서 이렇게 대꾸하려던 걸 꾹 참느라 혼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역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가 벌어졌다면, 우선 기성세대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하지 않을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더구나 부모님께선 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하셨잖아요.'

실제로 '최순실 게이트'가 고등학교에 끼친 영향은 여느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수백 명의 또래 아이들이 수장된 세월호 참사를 능가하는 충격을 던지고 있다. 정치권의 예측과는 별개로, 적어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번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나 탄핵만으로 끝날 것 같진 않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 주변 인사들이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 또한 필수적인 과정이라 여길 뿐,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분개하는 건 단지 '박근혜'와 '최순실'만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대한민국 국민인 게 부끄럽다는 말이 아이들 입에서도 스스럼없이 나오고 있다. 지난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때에도 듣기 힘들었던 참담한 이야기다. 한 아이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얼마나 남우세스러운 표현이냐며, 이번 일로 우리나라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접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박근혜'를 통해 기성세대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고, '최순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도덕함과 끝 모를 탐욕을 보았다.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오는 온갖 부정과 부패는 현 정부는 물론,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조차 허물어버렸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유화하여 관직을 마치 전리품처럼 챙기는가 하면, 기업들을 협박해 돈을 빼앗고 국가 예산을 쌈짓돈처럼 펑펑 써댄 모습은 이미 아이들에게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가 됐다.

주저하지 않고 의사 표현하는 아이들, 다행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선 실세' 최순실씨 수사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4일 오전 대통령 모교인 서울 용산구 성심여고 담벼락에 선배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선 실세' 최순실씨 수사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4일 오전 대통령 모교인 서울 용산구 성심여고 담벼락에 선배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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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쏘아올린 분노의 화살은 우리나라 기성세대 전체를 향하고 있으며, 대학입시라는 이름으로 십 수 년 동안 그들을 옥죄어 온 교육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옮겨 불붙고 있다. '나라가 온통 엉망인데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라는 냉소가 그것이다. 최근 아이들 사이의 단연 최고의 유행어는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이 든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변명을 패러디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번 사태는 우선 아무리 좋은 학벌도 '금수저' 앞에선 상대가 안 된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 '승마 공주' 정유라의 명문대 입시 성공담은 1년 내내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에 시달리는 대다수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겼고, 그녀의 말마따나 '능력 없는'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애꿎은 지경에 이르렀다. 학벌도, 학점도, 국가대표도, 심지어 국제대회의 메달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빽'의 위력 앞에서 아이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어디 '승마 공주' 한 사람뿐이랴. 대다수의 아이들은 극소수 '금수저'들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고, 조변석개하는 교육과정과 입시제도 역시 그들을 위한 배려라는 근원적인 불신을 품게 됐다. 세계 유수의 대학과는 비교 대상도 되지 않을 만큼 경쟁력이 뒤떨어지는데도, 국내에서 학벌구조가 그토록 굳건한 것도 여전히 기득권 유지의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분석까지 내놓는다.

또, 양심을 따르고 소신을 지키면 결국 좌천되거나 내쫓긴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고 입을 모은다. 승진은 말할 것도 없고, 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윗사람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는 것이 공직사회의 불문율임을 아이들도 분명히 목격했다. 눈앞에서 그러한 몰상식한 일들이 벌어져도 모른 채 해야 하고, 섣불리 나서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배움이 더 이상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정 농단 사태를 겪으며 아이들은 나름대로 건강한 시민의식을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교과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지식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하고 무능한 권력자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나라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실감하며, 역사를 공부하고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지율 0%'다.

기성세대는 언제부턴가 체념과 냉소가 몸에 배었고, 시나브로 '자기 검열'이 일상화됐다. 우리 사회가 지난 보수 정권 10년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체득하게 된 '유산'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고등학생들에게까지 전염된 것 같지는 않다. 국정 붕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대통령을 보며, '헬조선'을 되뇔지언정 그 뒤틀린 사회에 편승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 아이의 말마따나, 어른들처럼 지질하지는 않단다.

요컨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현 정부의 '최고의 치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로 정부와 국가에 대한 불신이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지만, 아이들은 정치적 의사 표현을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의식화'되고 있다. 대통령이 하야와 탄핵이 가져올 일시적인 정국 혼란 정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수확이자 혁명적 변화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갈까 말까 지금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하야하라_박근혜" 분노한 시민들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밤샘 대치했다.
▲ "#하야하라_박근혜" 분노한 시민들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지난 10월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밤샘 대치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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