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 포스터

▲ 인페르노 포스터 ⓒ 컬럼비아 픽처스


인류 대다수를 사망케 할 수 있는 위험한 바이러스가 퍼진다.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반나절뿐. 기억을 잃고 낯선 도시에서 깨어난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은 자신을 치료한 의사 시에나 브룩스와 함께 바이러스가 감춰진 장소를 추적해 나간다.

<인페르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인 댄 브라운의 작품이다. 그의 소설 가운데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에 이어 3번째로 영화화된 작품으로, 앞서 두 영화를 연출한 론 하워드가 그대로 감독을 맡았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품 사이에 기본적인 설정이 같을 뿐 서사적 연관성은 없다. 주인공은 매력적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톰 행크스가 분해 밀도 있는 연기를 펼쳤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오스카 근처에 갔던 펠리시티 존스가 톰 행크스와 짝을 이뤘다.

개봉한 지 보름이 조금 지난 <인페르노>는 4일까지 66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급속한 관객감소로 100만 관객 동원조차 쉽지 않을 듯한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치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다. 300만을 돌파한 <다빈치 코드>, 200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막을 내린 <천사와 악마>보다 한참 못한 수치다.

저조한 관객 수는 전작을 통해 소설이 주는 재미를 영화로 재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 원작 팬들의 변심과 시리즈 가운데 가장 떨어지는 인지도, 전작보다 대폭 삭감된 제작비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평론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기는 하지만 평론가들의 혹평 역시 흥행에 부정적인 요소였다. 다수의 평론가는 댄 브라운의 짜임새 있는 소설에 비해 영화에선 주인공 랭던이 단서를 조합하고 해석하며 음모의 핵심에 다가서는 과정이 단순하게 그려졌다고 비판했다. 또 론 하워드의 연출이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같이 안이하게 이뤄졌으며 편집도 이야기의 맛과 멋을 살리기에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랭던과 극 중 여성 캐릭터의 로맨스를 암시하는 신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어색하고 억지스럽다는 평도 쏟아냈다.

소설과 영화, 매체 차이 고려한다면 훌륭한 변주

인페르노 단테의 '지옥'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인페르노>에서 상징을 해석하는 랭던(톰 행크스 분). 그의 이런 능력은 <본>시리즈 주인공 제이슨 본의 막강한 격투능력 못지 않게 매력적이다.

▲ 인페르노 단테의 '지옥'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인페르노>에서 상징을 해석하는 랭던(톰 행크스 분). 그의 이런 능력은 <본>시리즈 주인공 제이슨 본의 막강한 격투능력 못지 않게 매력적이다. ⓒ 컬럼비아 픽처스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했고 영리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에 가끔은 감탄까지 했던 나로서는 단 한 줄도 동의할 수 없는 엉터리 평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오랜만에 등받이에 기댄 몸을 일으켜 양 주먹을 꼭 쥔 채 스크린에 빠져든 나를 발견한 영화였고 드물게 만나는 멋스러운 장치들도 엿보였다.

소설 원작이 지닌 장점, 그러니까 속도감과 몰입감도 충분했는데 이는 소설이 가진 치밀하고 다양한 장치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오히려 영화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소품과 이야깃거리를 섬세한 추리극의 핵심재료로 활용하기보다는 가볍게 보여주고 지나가는 눈요깃거리로만 사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선택이 영화의 풍미를 더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소설과 영화는 매체의 특성상 그 표현방식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평론을 읽어 보면 꽤 많은 독자와 관객, 심지어는 평론가들조차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은 치밀한 설계와 다양한 소품, 충분한 대화를 한껏 활용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가능하지만, 극장 안에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펼쳐지는 영화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소설 속 대화 몇 마디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십수 분이 훌쩍 지나가고 퀴즈 하나를 치밀하게 풀어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원작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원작과 같은 매력을 독자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충분한 속도감과 빨려들 듯한 몰입감, 적절한 낭만에 지적 자극까지 주었다면 론 하워드의 영화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와 같은 매력을 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소설 원작과 같은 방식을 선택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 작품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원작과 같은 표현방식을 선택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것들이었다.

<인페르노>와 <본 아이덴티티>는 데칼코마니?

인페르노 안정된 연기로 영화를 이끈 로버트 랭던 역의 톰 행크스와 시에나 브룩스 역의 펠리시티 존스.

▲ 인페르노 안정된 연기로 영화를 이끈 로버트 랭던 역의 톰 행크스와 시에나 브룩스 역의 펠리시티 존스. ⓒ 컬럼비아 픽처스


영화 <인페르노>가 가진 커다란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소설과 철저히 분리된 블록버스터 영화로써 출발했고 그 모델로 전설로 자리매김한 첩보물 <본> 시리즈를 참조한 듯 보인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주인공 제이슨 본은 자신이 누구이며 왜 그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 채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어부들에게 구조된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한 마이크로필름을 단서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으려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인페르노>의 주인공 랭던 역시 사고를 당해 며칠간의 기억을 잃고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눈을 뜬다. 그는 애써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만 총을 쏘며 그를 쫓는 추격자를 피해 의사 시에나와 함께 도망치기 급급하다. 사고 당시 갖고 있던 소지품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려던 그는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의 계획에 휘말리게 된다.

여러모로 <본 아이덴티티>와 유사한 이 영화는 제이슨 본이 고도의 훈련으로 살인에 특화된 특수요원인데 반해 고도의 공부로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을 읽고 담긴 뜻을 풀어내는데 특화된 교수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단순하게 말하면 제이슨 본은 육체파 블록버스터 주인공이고 랭던은 지성파 블록버스터 주인공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아무래도 고급스러운 취향의 지성파 주인공이다 보니 영화엔 그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장치가 등장해 눈을 호강시킨다. 단테의 '지옥'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그림과 피렌체의 커다란 미술관 등이 그것이다. 랭던이 특유의 추리능력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며 추격자를 따돌리고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은 제이슨 본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밝혀가는 것 못지않은 긴장감과 쾌감을 준다.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악의 대립이 아닌 방법론의 문제

인페르노 인간이 너무 많아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주장을 펼치는 조브리스트(벤 포스터 분). 실제 그의 주장이 허구이며 과장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인페르노 인간이 너무 많아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주장을 펼치는 조브리스트(벤 포스터 분). 실제 그의 주장이 허구이며 과장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컬럼비아 픽처스


아울러 영화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의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흥미로운 물음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랭던이 막아야 하는 영화 속 악당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려 수억, 어쩌면 수십억의 인간을 살상하려 한다. 한데 영화가 내보이는 그의 목적이란 인류의 멸망이 아닌 영속에 가까운 것이다. 당혹스런 일이다. 수많은 인간을 죽여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인간의 영속이라니.

바이러스를 개발한 악당 조브리스트는 인류가 인간이 터 잡은 생태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마침내는 그 스스로를 멸망시키게 될까 우려한다. 그래서 그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개발, 인간 상당수를 죽여 다시 지구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가 자초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니 자신이 대신 많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인류에 더 많은 시간을 선물하겠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랭던은 그의 주장에 '제법 설득력이 있다'며 동의의 뜻을 표하면서도 인간 다수의 살상이란 방법론에는 차마 동의하지 못하고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같은 영화의 설정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악의 세력과 공익이나 근본적 권리를 우선시하는 선의 세력 간의 대립구도로 짜인 대다수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본래 소설의 미덕이었을 테지만 원작 역시 영화를 이루는 일부라는 걸 고려하면 영화의 미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충분한 속도와 몰입, 적절한 낭만에 참신한 설정까지 충분한 매력의 영화였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나는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인페르노 컬럼비아 픽처스 론 하워드 톰 행크스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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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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