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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지난 10월 30일 오전 최씨 변론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정곡빌딩 서관에서 최씨 귀국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지난 10월 30일 오전 최씨 변론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정곡빌딩 서관에서 최씨 귀국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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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는 세월의 풍파를 견딜 나이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이해할 만한 그런 아량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 말은 지나가도 자꾸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날 때마다 말을 곱씹어보면, 저 말이 내포하는 의미에 넌더리가 난다.

한쪽에서는,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풍파가 닥친다. 아니, 풍파를 일부러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한다. "어릴 때부터 힘든 게 앞서가는 거야"라면서 청소년에게, 아이들에게 풍파를 준다. 그들의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어른들의 선택을 강요한다. 그렇게 청소년 자살률이 올라가도 알 바는 아니다. "다 너를 위한 것"이니까.

빈곤청소년은 어떤가. 그들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지속할 때,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풍파를 맞았을 때 우리나라는 "풍파를 견딜 나이가 아니다"며,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지켜줄 아량이 있지 않나"며 그들을 지켜준 일이 있는가. 그 청소년들이 자라나 청년이 되면 "공부 안 하고 자라면 저렇게 된다"라는 딱지를 붙일 것이다.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낮은 임금은 "그러길래 어릴 때 공부 좀 하지 그랬냐"라는 핀잔으로 설명될 것이다. 우리는 그 문장 하나로 어릴 때부터 풍파를 겪은 청년의 그 존재를 짓밟아왔다.

10월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교내 곳곳에 ‘비선실세’ 최순실 딸 정유라(승마특기생)의 부정입학 및 학사 특혜를 규탄하는 각종 대자보가 붙어 있다.
▲ '비선실세' 딸 각종특혜에 분노한 이대생들 10월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교내 곳곳에 ‘비선실세’ 최순실 딸 정유라(승마특기생)의 부정입학 및 학사 특혜를 규탄하는 각종 대자보가 붙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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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씨보다 몇 살은 어린 청소년들이 풍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면 "나약한 놈"이라며 잊었다. 청소년들이 사고를 당해서 그 원인을 찾자고 하면 "이제 지겹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행복률이 낮다는 데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행복이 낮다는 풍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10대에 풍파를 겪는 만큼 대학이란, 취업이란 결과가 돌아온다면서. 아무도 "그들의 풍파를 이해해줄 아량"을 갖지 않았다.

청년들이 삼각김밥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것에 이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도, 하루에 4, 5시간 잠을 자며 1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뛰어도, 취업 전쟁에 내몰려 온갖 스펙을 쌓아도, 직장에 들어가서 퇴근도 못 하는 삶을 이어가도 어른들은 그 풍파에 대해서 "너무 모질다"거나 "우리 사회는 아량으로 그들이 겪는 풍파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우리 때는 더 심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풍파와 고난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마법의 단어, "나 때는 더 심했다". "내가 풍파를 겪었으니 너도 겪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풍파마저 경쟁하는 사회, 그 경쟁의 승리자는 무조건 "나이 많은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풍파에 대한 아량"을 찾는 것은 허망하다.

덕분에 이제 그 어떤 청소년도, 그 어떤 청년도 자신들이 겪는 것을 '풍파'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모름지기 청소년이라면 10 to 10 공부를 10년간 해야 하는 거고, 그렇지 않은 내가 '잘못된' 것이다. 토익 990이 아니라 900점인 '내'가 잘못한 것이고, '고작 그 정도 대학'을 간 '내'가 잘못한 것이고, 노동법을 지키지 않는 회사에 들어간 '내'가 잘못한 것이다. 모든 것들이 내가 잘못한 것이고 내가 게으른 것이다.

왜냐하면 풍파는 "노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10대의 풍파, 대학생의 풍파는 곧 그만큼의 노력을 의미한다. 20대 초반에 가지는 대학 이름은 10대 풍파의, 10대 노력의 결과였다. 20대 중 후반에 가지는 회사 이름은 그 모든 인생 풍파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온갖 모진 풍파를 정당화해왔다.

모든 것은 노력하지 않은 내 탓... 고생이 '당연'한 사회

10대의 풍파, 대학생의 풍파는 곧 그만큼의 노력을 의미한다. 20대 초반에 가지는 대학 이름은 10대 풍파의, 10대 노력의 결과였다.
 10대의 풍파, 대학생의 풍파는 곧 그만큼의 노력을 의미한다. 20대 초반에 가지는 대학 이름은 10대 풍파의, 10대 노력의 결과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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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요즈음 나는, '노력'하지 않고, '같은 평가를 받지 않고'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었던 누군가에 대한 비판이 "어린 나이를 감안하지 않고 가해지는, 아주 조금의 아량도 없는 풍파"로 이해되는 꼴을 본다. 그 누군가에게만 다르게 해석되는 '노력'과 '풍파'를 본다. 그동안 모진 것들을 견뎌내는 것도 모자라 당연하게 이해하는 그 수많은 인생들의 노력과 풍파는 그 순간 무의미해진다. 무의미해지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인생을 부정하는 파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풍파', '고생'에 나이를 따졌던가. 수능 성적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모르는 어른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당연한 사회에서 대체 언제부터 "풍파를 견디지 못할 나이"라는 게 있었던가. 그들에게 나이라 함은 "나이도 어린 게 어디 감히" "공부나 해야 할 애가 어디 감히 시위 장소에"란 말로, 그들의 성적과 꿈과 실력과 인성을 모두 배제해도 되는,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온갖 간섭과 모욕을 해도 되는 특권이 아니었던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아랫사람으로 깔아뭉개도 된다는 기준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나이"가, 그들이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 개개인을 짓밟고 "어린놈"으로 치환할 수 있는 그 거대한 힘을 가진 "나이"가 어떤 청년을 보호하는 이유가 되는 것을 본다. 십수 년 간, 어쩌면 수십 수백 년 간 이어진 강력한 특권이 어떤 청년에게만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본다.

"나이를 따지지 마라"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지겨운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지금의 10대, 20대, 30대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노력=풍파'라는 이야기를 통째로 부정하는 사례를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바뀌지 않을 어른들을, 앞으로도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에게 당연하게 가해질 풍파와 그 풍파에 하등 관심이 없는 사회에 많은 이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왜 그 넓은 아량을 어떤 이들에게만 베푸는가

스크린도어 수리작업 도중 사망한 19세 청년 비정규직노동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현장에 국화꽃을 놓거나, 추모쪽지를 붙이며 고인을 추모하고 근본적인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스크린도어 수리작업 도중 사망한 19세 청년 비정규직노동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현장에 국화꽃을 놓거나, 추모쪽지를 붙이며 고인을 추모하고 근본적인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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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리는 지금 청소년과 청년에게 가해지는 풍파를 인식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은 인권유린을 일삼던 이가 자신들의 노력을 허망한 것으로 만드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혹은 알더라도 늘 그랬듯 쓴웃음 지으며 다시 살아남기 위해 하루를 보낼 것이다. 비단 청소년과 청년만의 얘기도 아니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다른 이에게 가해지는 풍파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안전규칙도 지키지 못한채 작업을 하다가 죽음을 맞은 청년, 그 일련의 과정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어른. 도리어 그 청년이 잘못한 것이라며 죽음의 죄를 물으려던 어른. 그런 어른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풍파에 대한 아량"을 논하는 것은 참으로 웃긴 일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기나 한가? 그런 달달한 것을 지워낸 것은 "우리 때는 말이야"라고 떠들던 당신네들이 아닌가? 기껏 삭제된 아량을 살려보려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어디 어린 것들이"라고 떠들던 것도 당신네들이 아닌가? 우리는 정유라에게 줄 아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 사회에는 그런 아량 따위가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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