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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는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로 진행합니다. - 기자 말


'최순실'이란 이름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사드, 평창동계올림픽, 개성공단 폐쇄 등 국가의 중대한 결정에 그녀의 손길이 미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이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추진한 국정교과서 역시 그녀의 작품이란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자며 9월 24일 시작한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10월 28일 그 여섯 번째 시간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이만열 교수는 그동안 용산 참사, 세월호, 건국절, 국정교과서, 사드 등 굵직굵직한 문제에 자주 이름을 냈다. 꼭 성명이나 신문 기고가 아니어도 SNS를 통해 시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나누고 있다. 강의를 하러 온 날, 그의 오른편 가슴에는 세월호 사건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의 역사관 - 식민사관의 극복'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을 텐데 이 교수의 강의는 역사관이라는 주제에 충실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우리나라 역사가 바로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왜곡된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 이만열 교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역사관으로 이 두 사관을 들었다. 유교사관이 언제부터 우리 역사에 등장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부터 유교사관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만열 교수는 역사는 보통 왕조가 바뀔 때 정리된다고 했다. 고려사도 조선 초인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원년)에 완성되었다. 역사서를 편찬하는 맥락에서 보면 삼국사는 고려 초에 쓰는 것이 맞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 사람인 김부식이 썼다.


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쓸 때 '구 삼국사'를 참고해서 썼다고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영웅적인 면모가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구 삼국사'에 더 잘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이전에 쓰여진 삼국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언급한 '구 삼국사'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경파 묘청은 서경 천도에 실패하고 역적이 되었다. 이후 신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개경파 보수 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인종은 유교사관에 근거해 삼국사를 다시 쓰기 원했다. 그 후 '구 삼국사'는 사라지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만 남게 되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인종은 왜 유교사관에 근거해 역사서를 다시 쓰기 원했을까. 이만열 교수는 유교사관의 기반에는 혈통신분적 인간관이 있다고 했다. 혈통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 중심으로 역사를 쓴다.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민은 역사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는 상층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으로 역사를 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충'과 '효'다. 물론 평민들 중에도 역사서에 기록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효도로 이름이 나거나 나라에 크게 충성한 사람들이다.


충·효 중심의 역사관이 왜 문제인가. 이 교수는 만적의 난과 동학농민혁명을 예로 들어 유교사관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했다. 


"고려 무신 정권 때 최충헌 집안의 노비였던 만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적이 보니 세상이 정상적으로 권력 이양이 되지 않아요. 힘만 있으면 정권을 잡는 거지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 만적은 노비들을 모아 정권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배신자가 나와 그 모의가 탄로 나고 모두 죽임당합니다. 이 사건을 충효 중심의 유교사관으로 보면 난이지요. 그런데 민중적 시각에서 보면 신분 해방 운동 아니겠어요. 같은 사건을 만적의 난이라고 하는 것과 만적의 신분 해방 운동이라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도 마찬가지다. 이만열 교수는 어렸을 때 동학난이라고 배웠다고 한다. 농민들이 왕조에 반대하며 일으켰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을 민족사적 시각으로 보면 반란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민족사를 바로 잡고 정상화시키는 운동이요, 혁명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은 불합리를 넘어 부패와 불의가 판치는 사회였다. 지방 수령들은 있지도 않은 세목으로 백성들을 착취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당시 공식적인 세금은 세 가지뿐인데 비공식적인 것이 무려 서른 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과부가 되어도 재혼할 수 없었다. 사람을 곧 하늘로 생각했던 동학도들의 눈에는 개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개혁해야 할 것들을 담아 14개조를(27개조라고도 한다) 정리해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가 받아주지 않아 들고일어난 민중, 이게 왜 '난'인가"


"정부가 받아 주었으면 순리적으로 풀렸을 텐데 이를 받아 주지 않으니 동학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난으로 볼 수 있습니까. 왕조의 입장에서 보니 난입니다. 동학농민을 잔인하게 몰살한 일제의 눈으로 보니 난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民)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4.19 이후 민의 역사에 주목한 학자들은 동학난을 재조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만적이 천민 해방을 부르짖은 지 818년, 동학교도들이 사람이 곧 하늘임을 외친지 122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등 이 땅의 주인이 민중임을 외친 수많은 역사가 있었지만, 혈통이 자본과 권력으로 바뀌었을 뿐 권력에 대한 절대 충성을 이야기하는 변질된 유교사관은 여전히 건재하다.


최순실씨는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절차도 무시한 채 청와대를 드나들고, 국가 기밀문서를 열람했다. 대통령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가 출전한 승마대회에 시비가 있자 양측 모두 문제라고 보고서를 만든 담당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했고, 이들은 바로 경질되었다. 기업들은 청와대 수석의 전화에 이제 막 생긴 재단에 수십 억원씩을 기부했다. 대통령과 친한 영상 감독은 각종 이권 사업을 챙겼고 그의 친척과 은사는 장관, 청와대 수석의 자리에 올랐다. 전에 없던 국정농단에 대통령 지지율은 한 자리까지 떨어졌지만 이에 대한 반성은커녕 핵심 친박 국회의원 한 명은 새누리당 당원들에게 "박근혜 대통령, 기도해 달라"는 문자를 돌렸다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권력자들의 잘못이 눈감아졌다. 친일을 한 자들의 다수가 대한민국 수립 후 훈장을 받았고 사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재를 하고 무수한 국민을 죽인 전 대통령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산다. 재벌 총수들은 횡령, 배임, 불법 증여를 하고도 여전히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공기업에 정부 실세의 측근들은 성적을 조작하고 입사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학 입시도 무사통과고, 출석하지 않아도 학점을 딸 수 있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2년 동안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은 아직도 찾을 수 없다.


이만열 교수는 우리가 청산해야 할 또 다른 역사관으로 식민주의 사관을 들었다. 일제가 우리나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식민주의 사관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일본과 조선이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일선동조론, 조선 역사는 조선인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의해 전개되고 그 연장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타율성이론, 오랜 시간 동안 정치적 변동은 있었지만 사회경제적 변동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정체성 이론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수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을지문덕은 이를 크게 물리쳤어요. 평양을 직접 치러 온 30만 5천 군대 중 돌아간 군사는 27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당도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그런데 안시성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퇴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태종이 도망하다 눈에 화살을 맞아 이로 얻은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몽골이 세계를 지배할 때 몽골이 들어가 항복 받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고려는 30년 동안 맞서 싸웠지요. 그리고 항복이 아닌 화의를 했습니다."


일본은 타율성 이론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자주적인 역사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정체성 이론도 마찬가지다. 조선 사회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정체성 이론에 의하면 20세기 초까지 우리나라가 봉건제 사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봉건제를 거쳐야만 자본주의로 발전해 갈 수 있는데, 너희 힘만으로 되지 않으니 이웃의 발전한 나라인 일본이 도와줘야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18세기 이후 조선을 보면 근대사회의 싹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숙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를 살펴보면 화폐 발행 횟수가 눈에 뜨이게 증가합니다. 또 시장도 많아지지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매점매석이 등장하지요. 자본이 없으면 매점매석이 불가능합니다. 홍경래의 난도 광부들이 주력부대였습니다. 당시 광산 개발에는 자금을 대는 사람과 '덕대'라고 불리는 기술자가 있어서 광산을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분제의 붕괴입니다. 조선 중기, 숙종 때 6퍼센트에 불과하던 양반이 철종 때에는 40퍼센트가 넘습니다. 정상적으로 역사가 흘렀으면 스스로 시대적 모순을 해결했을 텐데 일제, 미군정을 거치며 오히려 정상적인 발전이 왜곡되었습니다."

 

민중이 착취당하는 현실,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만열 교수의 강의를 듣고 한 참가자가 실제 일제가 우리나라 산업을 발전시킨 부분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이 교수는 그렇게 산업을 발전시킨 목적이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한국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부정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도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위해, 도로와 기차는 수탈을 위해 건설했습니다.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황국신민으로 길러 부려먹기 위한 것이었지요. 한마디로 일제에 의한 근대화는 식민 지배를 효율화하고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제가 1910년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겉으로는 근대적 토지 소유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업이 끝난 8년 뒤에는 전 국토의 40%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1920년대 있었던 산미증식계획도 같은 결과를 낳았다. 일제는 쌀을 증산하기 위해 필요한 비료 구입, 수리 시설 개간에 필요한 비용은 소작농에게 부담시켰을 뿐 아니라 증산된 쌀은 일본으로 반출했다. 1920년대 실제로 쌀 소출이 늘었지만 증산된 양보다 일본으로 반출된 양이 훨씬 많았다. 철도, 도로 등 일제가 건설한 기간산업은 쌀, 광물 등 우리나라의 자원을 반출하는 데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일제는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 등을 독점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근대화하면 할수록 우리 민족의 자본은 위축되고 조선 민중의 삶은 열악해졌다.


2015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600달러라고 한다. 삼성, LG 등 국내 굴지의 기업은 세계적 기업이 되었다. 대기업의 순수익은 매년 수조씩 늘고 있으며 CEO들은 수십 억의 급여를 받는다. 기업이 부자가 되면 될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은 늘어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역시 벌어지고 있다. 일제라는 이름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민중이 착취를 당하는 현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역사 공부를 할 때 먼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정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 민중들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통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위한 역사발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용산 참사, 강정마을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FTA, 정리해고, 세월호, 사드 등 국민이 제기하는 수많은 문제에 귀를 막고 대답하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접한 민중은 또다시 촛불을 들었다. 신분 차별을 노정한 유교사관, 식민주의 사관이 우리 역사를 지배하던 모든 순간마다 우리 민중은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빨리 일어났다.


최근 17년 만에 삼례나라슈퍼 살인 사건 3인조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17년이나 걸렸느냐고 볼 수도 있고 17년이나 지난 사건을 무죄로 이끌어 냈다고 볼 수도 있다. 전자로 보면 우리 역사는 패배의 역사이지만 후자적 시각으로 보면 승리의 역사가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수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축되어 오다 최근 한겨레와 jtbc 등의 활약으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어쩌면 이 사건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 역사를 쓰라는 하늘의 기회 말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가기( http://cafe.daum.net/kyungdang/coIz/142)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만열, #최순실, #역사, #배움터경당,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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