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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님을 보고자 하나 만날 길이 없사옵니다."

전등사 대웅전 바닥에 엎드려 여인은 빌고 또 빌었다. 구중궁궐의 한 귀퉁이, 별궁으로 밀려난 정화궁주(貞和宮主)는 애타게 지아비를 그리워했다. 태자비로 지낸 세월이 17년이었다. 슬하에 자식들도 여럿 두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왕비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왕자 역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의 정비였던 정화궁주 이야기다. 

왕비가 되지 못한 태자비 

고려 왕실은 전통적으로 같은 왕족끼리 혼인을 하는 근친혼을 했다. 왕실의 권위와 경제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제1비는 반드시 왕족에서 얻었다. 태자비였던 정화궁주도 왕가의 후손이었다. 고려 20대 왕인 신종이 정화궁주의 증조부였으니 충렬왕과 정화궁주는 촌수가 가까운 혈족 사이였다.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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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 자녀도 셋이나 태어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정화궁주는 왕비가 됐을 것이고 그녀의 아들은 부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는 정략상 원의 부마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화궁주는 별궁으로 내쳐졌고, 이후 다시는 충렬왕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정화궁주를 내쫓고 대신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칭키즈칸의 손자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Kublai Khan,1215~1294)의 딸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다. 그녀에게 정화궁주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별궁으로 내치고 충렬왕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정화궁주의 슬픔과 한이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태자비로 17년간이나 있었는데도 정치적인 힘에 밀려 정작 왕비는 될 수 없었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마음을 뒀고 옥등과 대장경을 전등사에 시주했다.

정화궁주가 바친 옥등은 단순히 옥으로 만든 등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널리 전하는 등불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등불을 밝혀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불법을 널리 펼쳐 이 세상을 돕고자 함이 옥등에 담겨 있었다. 이후 절 이름을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바꾸었다.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 대조루.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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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궁주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은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졌는지 고려의 대시인이었던 목은 이색(1328~1396)은 전등사의 대조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星歷蒼茫五太士       먼 옛날 오태사의 일은 까마득한데
雲煙慘淡三郞城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네
貞和願幢誰更植       정화궁주의 원당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壁記塵昏傷客情       벽기에 쌓인 먼지 나그네 마음 상하게 하네

– 대조루에 올라서서(登對潮樓)

전등사에는 정화궁주의 설움이 담겨 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죄로 마땅히 누려야 할 왕비의 자리도 내줘야 했다. 충렬왕 이후의 왕들도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해야 했으니, 원의 간섭 아래 놓여있던 고려 백성들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화궁주, 옥등을 바치다

대제국을 이룬 몽골은 정복 전쟁 당시 그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한 곳은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들이 거쳐 간 곳은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수레바퀴 높이보다 키가 큰 남자는 다 죽였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포로로 끌고 갔다. 

1231년에서 1259년까지 여섯 차례나 몽골의 침략을 당한 고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30년 동안 치른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됐고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다.

항복을 한 고려에게 몽골은 금은 따위의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그 속에는 '특정한 일에 종사할 사람을 보내라'는 것도 들어 있었다. 즉 궁중에서 일할 사람을 뽑아서 보내라는 요구였다.

 정족산에서 내려다본 전등사.
 정족산에서 내려다본 전등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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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일을 하는 사람에는 궁녀와 환관이 있다. 고려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 역적이나 천민의 아내와 딸들을 보냈다. 이렇게 보내어진 여자를 '공녀(貢女)'라고 한다. 이후로도 원나라는 계속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궁녀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궁녀는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었는데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에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몽골족은 사람도 많지 않아 원나라는 고려를 비롯한 제후국에서 궁녀를 뽑아갔다.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희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 교육을 받고 자라 교양이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의 황실 사람들은 고려 여인들이 곁에서 수발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조공품으로 간 고려 여인들

처음에는 고려 조정에서 보통 계급에서 사람을 뽑아 보냈지만 원나라에서는 명문가의 딸을 보낼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간 명문가 딸 중에 기씨 성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황실에서 일을 하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됐고, 몽골 출신의 여인 말고는 결코 황후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어기면서까지 황제는 그녀를 황후로 삼았다. 이것은 기황후의 지혜 덕분이기도 했지만 고려 출신 환관과 궁녀들의 도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기황후의 사례를 접한 고려의 고관대작들 중에는 딸을 원나라로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딸이 원나라 고관의 아내가 되거나 황제의 후궁이 되면 고려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의 경우일 뿐 대개는 딸이 공녀로 뽑힐 것을 두려워해 숨기기에 바빴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 딸을 보내고 싶어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녀를 뽑으러 사신이 오면 딸을 숨기고 내놓지 않아 나라에서는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고는 했다.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삼랑성.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삼랑성.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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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녀로 징발되는 모습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집집마다 수색하여 만약 여자를 숨기기라도 하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한다. (중략) 뽑힌 여자의 부모와 친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이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다."

80년간 계속된 공녀 수탈

집집마다 딸을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으니 여인들을 수색하느라 전국이 마치 전쟁터나 매한가지였다. 개들도 낯선 수색원을 보고 어찌나 짖어댔던지 "개들도 편안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오죽 했으면 조혼의 풍습까지 다 생겼을까. 공녀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찍 결혼을 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딸이 열두서너 살만 되면 서둘러서 혼인을 시켰다.

1274년(원종 15년)에 시작된 몽골의 공녀 요구는 충숙왕 4년(1335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암암리에 공녀 요구가 계속되다가 원나라의 폐망과 함께 끝난다. 무려 80여 년간 고려의 여인들이 원나라로 뽑혀 가고 끌려간 셈이다.

공녀는 두 해에 한두 번 꼴로 보냈다. 1320년(충숙왕 7)에는 53명의 미혼여성과 23명의 화자(火者, 거세된 환관)를 보냈는데 이는 가장 많이 보낸 경우였다. 80년간 보낸 공녀의 수는 176명 정도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니, 모두 합하면 이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공녀로 간 고려의 여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며 비관 속에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고려 여인들은 영리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서 점점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갔을 것이다. 마침내 의복이며 신발, 모자 등의 차림새에서 고려의 풍습이 원나라 황실과 일반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유행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들의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등사의 가을.
 전등사의 가을.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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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해석해야 할 공녀(貢女)

'조공품으로 바친 여자'라는 뜻의 '공녀'는 이제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비록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끌려가거나 조공품으로 바쳐지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원나라에서 고려 출신 여인 얻기를 강력히 원할 정도였으니, 공녀는 조공품이라기보다는 황궁에서 일하는 전문직 여성으로 자리 매김을 해야 마땅할 것 같다. 약소국 출신 여인들이 거대한 원제국의 풍습을 바꿀 정도였다.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한류'이기도 할 것이다.

정화궁주의 설움이 담겨 있는 전등사에서 고려 여인들의 애환을 생각해 본다. 그 애환 너머로 지혜롭게 운명을 개척해 나간 그녀들의 기개도 엿보인다. 대국의 문화까지 바꿀 정도로 수준 높았던 고려의 문화 역시 살펴볼 수 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했던 공녀를 달리 생각해 본다. 그녀들은 문화의 첨병이었으며 삶을 아름답게 개척해 나간 전문가였다.

원나라 공주에게 제1왕비의 자리를 내준 정화궁주에게서도 설움과 비탄 너머 지혜로움을 본다. 제국대장공주의 시기와 질투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던가. 하지만 정화궁주는 지혜롭게 처신해 지아비인 충렬왕을 지켰고 나라를 평화롭게 했다. 또한 둘 사이에서 난 자식들도 모두 건사했다.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천 년 전 고려시대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이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들은 이처럼 고초를 겪는다. 지금 현재 우리는 어떠할까. 전등사 마당에 서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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