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국통일3대헌장탑  북한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김대실 감독은 <사람이 하늘이다> 촬영을 위해 2013,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방북했다.

▲ 북한 조국통일3대헌장탑 북한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김대실 감독은 <사람이 하늘이다> 촬영을 위해 2013,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방북했다. ⓒ 김대실


"청주에서 다큐영화 <사람이 하늘이다> 상영회가 있는데, 영화 만든 감독님을 승용차로 모셔다 드릴 수 있나요? 날짜는 10월 16일이고요."

10월 12일 서울의 한 강연회에서 만난 액션원코리아(Action One Korea) 정연진 대표가 내게 부탁했다. 미국에 살면서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정 대표와 나는 올 봄에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라는 책의 공동 필자로 참여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지난 5월 정 대표가 서울에 왔을 때, 재미교포 활동가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열성적으로 통일운동 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다음에 오면 기사 노릇 한번 하겠노라 약속했다. 정 대표는 자기 대신에 뉴욕에서 왔다는 영화감독의 청주행을 도와 달라 요청한 것이다.

79세의 할머니 감독

영화감독의 이름은 김대실이었다. 이름을 들었을 때는 남자 감독이려니 했다.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도 그렇고, <사람이 하늘이다>(People are the Sky: A Journey to North Korea)라는 작품이 북을 방문해서 찍은 정치성향이 짙은 다큐라고 해서 그런 선입견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해보니, 여자 감독이었다. 193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9세이고, 이젠 할머니 소리 들을 만한 나이다. 은퇴를 해도 몇 번은 했을 나이에 김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북을 방문해서 다큐영화를 찍었을까?

10월 16일 1시, 김대실 감독을 그의 숙소에서 가까운 상도동 숭실대 정문 앞에서 만났다. 김대실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는 머리모양이다. 1990년대 말 위안부(성노예) 할머니들을 촬영하기 위해 혜화동에 있던 나눔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들은 김 감독의 둥그런 머리 모양을 보고 '광주리 머리'라고 했다 한다. 운전석 옆에 앉은 김대실 감독은 청주 가는 길에 자신의 인생보따리를 쭉 풀어놓았다.

한국전쟁 시기 참혹한 양민학살로 널리 알려진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김대실 감독은 1945년 외할머니(최대현 마리아, 1959년 작고) 손을 잡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 김 감독의 부친은 미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선망했고, 오빠도 대학에서 반공단체 활동을 했다고 한다. 월남 후 6.25 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종교적 질문을 품게 됐다. 어른들에게 물어봐도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서울 원효로 집 부근에서 같이 놀던 동무 두 명이 폭격으로 죽은 모습을 보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에게 왜 죄 없는 아이를 죽게 했는지, 왜 전쟁이 벌어지게 했는지 묻고 싶었어요."

그 뒤로 이 질문이 그에게 떠나지 않았고, 결국 신학을 공부해서 직접 답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감신대에 진학했다.

'영적인 동지'인 남편 단을 만나다

감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이화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김대실은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마운트홀리케 대에서 강의하다가 연방 정부의 인류국가기금 소속 공무원으로, 뉴욕주 예술위원회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했다. 이때 같은 직장 동료인 남편 단(Don)을 만났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마흔 한 살의 나이인 1979년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단이 2009년 1월 세상을 먼저 뜰 때까지 '영적인 동지'로 지냈다고 한다.

"아이오와 농촌 출신의 단을 처음 만났을 때 전생부터 알던 사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연이라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됐죠. 그는 가식이 없고 진실했어요. 우리는 부부였지만 일생동안 지적인 동반자였죠. 소외된 사람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내가 나이 들어 영화감독 할 수 있게 용기를 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했어요."

평생 옆에 있을 것 같았던 남편 단이 죽은 뒤 김 감독은 <단을 그리며(Looking for Don)>라는 회고록을 냈다. 원래 부부는 '어깨동무(Shoulder Friends)'라는 제목까지 미리 정하고 공동의 회고록을 쓸 계획이었다. 혼자 쓴 회고록에는 김대실 감독이 직접 그린 18점의 그림이 들어 있다.  김 감독의 친구인 그레이스 카발레씨는 이 책의 서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자란 동갑내기 두 사람이 미국 땅에서 만나 마흔한 살에 부부의 연을 맺고 30년간 살아온 길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썼다.

 김대실 감독의 '영혼의 벗'이었던 남편 단은 2009년 세상을 먼저 떠났다. 김 감독은 2011년에 <단을 그리며(Looking for Don)>라는 책을 썼는데, 이 부부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책 속에 넣었다.

김대실 감독의 '영혼의 벗'이었던 남편 단은 2009년 세상을 먼저 떠났다. 김 감독은 2011년에 <단을 그리며(Looking for Don)>라는 책을 썼는데, 이 부부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책 속에 넣었다. ⓒ 김대실


첫 작품 <사이구>

1988년 영화제작을 위해 50세의 나이에 사직한 김대실 감독의 첫 작품은 1992년 LA 흑인폭동을 다룬 <사이구(4.29)>(1995)이다. 4.29는 흑인폭동이 발생한 날이다. 그리고 뒤이어 <잊혀진 사람들: 사할린의 한인들>(1995)을 발표했고, 1999년에는 <깨어진 침묵: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으며 코닥 영화제작자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6년엔 쿠바에 정착한 한인의 갈등을 그린<모국>을 제작해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김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인권, 소수민족, 평화, 디아스포라,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김 감독의 여덟 번째 작품인 <사람이 하늘이다>는 2015년 뉴욕한인영화제(KAFFNY)에서 처음 발표했다. 2013년,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북을 방문해 제작한 이 다큐는 올해 9월 22~29일 파주에서 열린 DMZ 다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하다. 북한 당국에 영화 촬영 허가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공식 허가를 얻어서 영화를 찍으려고 북한 당국에 3페이지의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바로 허가가 나왔다. 김대실 감독이 그동안 찍어온 영화가 북의 현실을 왜곡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김 감독의 <사람이 하늘이다>가 파주  DMZ 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된 뒤에 전국의 사회단체, 대학, 교회 등에서 상영 요청이 들어왔다. 그 첫 번째 행사가 충북 청주에서 열린 것이다.

김대실 감독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청주를 향하다가, 잠시 망향휴게소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 그때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행사 주최 측에서 비가 오는 관계로 원래 예정되었던 상당공원이 아닌 청주의 하늘북이라는 단체 사무실로 장소를 변경했다는 연락이 왔다. 망향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청주 시민단체의 사랑방과 같은 하늘북에 도착했다. 공간이 비좁아 30여 명이 들어서자 자리가 꽉 찼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오후 6시부터 90여 분간 상영했다.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 상영 포스터 2016년 10월 16일 청주에서 열린 다큐영화 <사람이 하늘이다>를 알리는 포스터. 상당공원에서 상영할 계획이었으나 비가 와서 하늘북 사무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 상영 포스터 2016년 10월 16일 청주에서 열린 다큐영화 <사람이 하늘이다>를 알리는 포스터. 상당공원에서 상영할 계획이었으나 비가 와서 하늘북 사무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 6.15충북본부


고향 신천, 예전과 같은 것은 하늘뿐이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김대실 감독의 생애와 맥을 같이 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분단, 한국전쟁,  4.19, 남북의 대치, 이 모든 것은 김 감독이 직접 겪은 역사적 현실이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전의 영화와 달리 <사람이 하늘이다>에서는 감독이 직접 인터뷰도 하고,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 영화에서 김 감독은 북에 가기 전 한국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했다. 소설가 황석영, 강정구 교수도 나온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한테 통일에 관한 상반된 의견도 들었다.

"지금처럼 사는 게 좋다"(이십대 청년)
"독일처럼 통일해야 한다."(달동네 할아버지)

영화에는 감독의 머리스타일을 언급하는 장면이 두어 번 나온다. 남한의 강남에서 만난 젊은이는 헤어스타일이 멋있다고 추켜세운다. 북의 안내원은 어린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김 감독에게 "그 머리 때문에 애들이 도망갈 수 있어요"라며 뼈있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북을 방문했을 때 김 감독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길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즉석 인터뷰도 많이 했다. 북 안내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국에서 온 자유분방한 할머니 감독 때문에 진땀 좀 흘렸을 것 같다. 안내원은 힘들어 하면서도 어지간한 인터뷰는 눈감아줬다고 한다.

평양 봉수교회에 갔을 때는 6.25를 겪은 평양시민을 즉석에서 소개받아 인터뷰했다. 1968년까지는 가정교회에서 예배 봤다고 하는 여성신자는 "평양이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고 말한 뒤  미군이 평양시내 예배당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격했다고 비판했다. 북한 주민들의 반미주의 근원은 미군의 폭격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미국의 침략적인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녔다. 한국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와 찰스 암스트롱 콜롬비아대 교수(어머니가 한국계 )가 등장해 이와 관련된 증언을 했다.

영화의 뒷부분에 김 감독이 고향 신천을 근 70년 만에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고 싶지 않았다는 신천학살 박물관도 들른다. 박물관의 안내원은 14만 명의 신천 주민의 4분의 1인 3만5천여 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고 설명했다. 텃밭, 논, 친구는 어디에 있나? 예전과 같은 것은 하늘뿐이었다. 1945년 떠나올 적의 고향은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게 됐다.

신천에서 북녘 동포들과 <고향의 봄> 노래를 함께 불렀다. 이들에게서 고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묘향산 보현사의 스님 얼굴에서, 금강산 안내원 처녀의 얼굴에서 하늘을 본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외할머니와 단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끝을 맺었다. <사람이 하늘이다>의 주제는 한반도 분단인 것 같은데 영화 곳곳에는 남편 단에 대한 기억이 깔려있다. '사람이 하늘이다'(인내천)라는 제목도 동학과 단을 떠올리며 지은 것이라 한다. 김 감독은 이 제목에서 단의 하늘과 동학의 하늘이 합쳐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지난 10월 16일 청주 시민단체의 사랑방인 하늘북에서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상영을 한 뒤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는 김대실 감독(좌측).

지난 10월 16일 청주 시민단체의 사랑방인 하늘북에서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상영을 한 뒤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는 김대실 감독(좌측). ⓒ 정연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든 영화

영화가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저녁을 거른 김 감독은 빈속에 소주잔을 들이켜 가며 늦은 시간까지 관객의 질문에 답했다.

-촬영 동기는 무엇입니까?
"해방 때 일곱 살이었는데 38선을 할머니 손잡고 건너왔어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은 아마도 이북을 떠난 이후로 인생 전체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내 얘기 속에서 역사를 전하자라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누가 뭐라 하면, 이건 내 개인의 삶이야, 네가 내 생을 살아봤어, 라고 말해요."

-이 영화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미국이 무식하고 무지한 나라인 줄은 알았지만, 미국 인텔리들 정말 자기 나라가 외국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잘 몰라요. 이 영화 보고 쇼크 받은 사람도 많아요. 그동안 내가 만든 영화는 미국 공영방송 통해 나갔는데, 이 영화는 쉽지 않아요."

-교수, 공무원 하다 영화 만들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첫 번째 영화 <사이구(4.29)>를 만든 직접 동기는 1992년에 발생한 LA 흑인 폭동이었어요. 당시 미국 주류 언론은 한인-흑인 사이의 갈등으로 몰고 갔죠. 그게 주원인은 아니고 미국 건국 때부터 있었던 흑백 갈등이 주요인인데, 언론이 불공평한 해석을 했어요. 이런 불합리한 언론보도를 보고 영화제작을 결심했죠. 글이나 그림보다는 영화가 피해자의 마음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했어요."

-머리 스타일을 지금처럼 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미국에 사는 친구가 나 좀 예쁘게 보이게 하려고 연구하다, 좁은 이마를 가리게 하는 파마가 좋겠다면서 나를 데리고 미용실에 갔어요. 미국에선 아프리카 사람 닮았다고 에프로(afro) 스타일이라고 불러요. 우리 남편이 이 헤어스타일 너무 좋아했지요. 이 스타일 바꿀 생각 없어요. 지금은 한국에 오면서 짧게 다듬었는데, 다시 기를 생각이에요."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돈, 시간, 힘이 없어요. 본격적인 다큐영화는 <사람이 하늘이다>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찍었어요. 간단하게 하나 더 찍는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25세 흑인남자를 촬영할 계획이에요. 그냥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소형 카메라로 찍으면 되니까, 어려운 작업은 아니거든요."

이날 한 시민은 다큐영화 <사람이 하늘이다>는 "남북의 대립, 미국, 일본 등의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우리의 근현대사를 칼로 수박을 단박에 썰어서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듯 명쾌하게 설명했고, 그 수박의 맛을 제대로 맛보게 한 영화"라고 평을 했다.

청주 상영회 이후에도 <사람이 하늘이다>는 전국의 여러 단체, 교회 등의 초청을 받아 상영이 됐고, 그때마다 김 감독도 참석해서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광주 흥사단, 파주지역신문 <파주에서>, 전주 열린문교회,  전주 고백교회, 익산 남이랑북이랑, 수원 통일나눔의 초청을 받아 영화상영을 했으며, 10월 27일엔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 28일엔 서울대 강의실, 그리고 29일 토요일에는 강화도 교동 통일문화제에서 상영하기로 예정돼 있다. 10월 31일 출국하기 직전까지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이 나이에 비해 체력이 강하다고 하면, 김대실 감독은 체력이 아니라 '윌 파워'(의지력)가 강한 거라고 답변한다.

 방북 촬영 중에 만난 북한 어린이들. 김 감독은 길에서 만난 북한 주민과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하곤 했는데, 미국에서 온 교포 할머니의 자유분방한 행동때문에 북한 안내원이 애를 먹기도 했다.

방북 촬영 중에 만난 북한 어린이들. 김 감독은 길에서 만난 북한 주민과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하곤 했는데, 미국에서 온 교포 할머니의 자유분방한 행동때문에 북한 안내원이 애를 먹기도 했다. ⓒ 김대실


북에서 상영하고 싶지만...

김대실 감독은 내게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만나 술을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즐겨 마시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와인을 좋아했는데 와인은 우울증을 악화시킨다고 해서 스카치위스키로 주종을 바꿨다고 한다. 미국에 있을 때는 오후 4~5시 경에 위스키를 딱 한 잔씩 마셨다고 한다. 한국음식엔 소주가 어울리는 것 같아 반주로는 와인보다 소주를 즐겨하는데, 막걸리는 아직은 맛을 잘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10월 25일 오후 4시, 홍대전철역 부근 카페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둘이서 맥주 두 병씩 마시고, 보쌈집으로 저녁을 하러 갔는데 반주로 마시자며 주저함 없이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이쯤 되면 애주가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지난 번 청주에서 영화를 본 뒤 궁금했던 점에 관해 몇 가지 물어보았다.

-어렵게 북에 가서 촬영했는데, 북쪽에서 상영 가능한지 알아보셨나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활동하는 북한 정부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아직 답변이 없어요. 내 생각엔 북쪽을 불편하게 할 대사가 몇 번 나오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라 판단해요."

북의 당국자가 곱게 보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영화 속 대사는 "3대 세습 이해하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그래도 지도자는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기념비가 너무 많았다. 대리석에 내 마음이 굳어갔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최근 확인된 자료로는 남침인 듯하다. 목적은 조국통일이라고 한다." 등과 같다.

-이런 대사 때문에 북에서 상영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면, 편집에서 빼는 것도 검토해보시지 않았나요?
"내가 죽은 뒤에도 영화는 남잖아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만들기는 싫었어요. 나는 누가 하라는 대로 안 하는 사람이에요. 작품을 만들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미국도 한국도 북한도 다 마찬가지였어요. 두려운 마음에 미리 은폐하고, 눈치 보며 만들면 좋은 작품 만들 수 없어요."

 10월 26일 청주 행복카페 극장에서 열린 <사람이 하늘이다> 앵콜상영회.김대실 감독은 이 영화를 마지막 영화라 여겼으나, 전국 순회 상영 이후 자신이 통일을 위해 더 해야할 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기회가 된다면 '가시철조망 6백리'라는 영화를 하나 더  제작하고 싶은 맘이라고 했다.

10월 26일 청주 행복카페 극장에서 열린 <사람이 하늘이다> 앵콜상영회.김대실 감독은 이 영화를 마지막 영화라 여겼으나, 전국 순회 상영 이후 자신이 통일을 위해 더 해야할 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기회가 된다면 '가시철조망 6백리'라는 영화를 하나 더 제작하고 싶은 맘이라고 했다. ⓒ 정연진


마지막 영화 '가시철조망 6백리'를 볼 수 있을까?

-먼저 돌아가신 남편의 회고록도 펴내시고, 영화에도 남편 이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도 남편 얘기를 할 때면 목이 메이곤 하는데,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도 단의 이름을 들으면  눈물이 나와요. 단과 나는 단짝 친구 같은 사이였어요. 영어로 단을 회고하는 책을 냈고, 기회가 되면 한국어판도 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생각해요. 지금 살아있는 땅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두 랜드에서 같이 산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이고, 그래서 난 여전히 단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그럴 때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겠죠. 단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동시에 내 인생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해요."

김대실 감독은 남편이 죽고 나서 자신의 집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남편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어보다는 영어로 말하는 게 편하다는 김 감독은 북에 가서 고향을 찾았지만, 산과 들이 아닌 사람 속에서 고향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 속에서 집과 고향을 느끼고, 사람을 마음의 안식처로 여기는 김대실 감독은 이번에 남쪽에 와서 관객들을 만난 뒤에 다시 영화를 한 편 더 찍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2009년 남편 단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뒤부터 술을 즐기게 됐다는 김대실 감독과 홍대전철역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김 감독은 이날 카페에서 맥주 두 병, 저녁 반주로 소주 반 병을 마셨다.

2009년 남편 단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뒤부터 술을 즐기게 됐다는 김대실 감독과 홍대전철역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김 감독은 이날 카페에서 맥주 두 병, 저녁 반주로 소주 반 병을 마셨다. ⓒ 최진섭


"전국 순회 상영하면서 <사람이 하늘이다>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내가 분단과 통일에 관해 더 할 얘기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회가 되면 북에 가서 한 번 더 촬영도 하고 싶어요. 얼마 전 어느 영화제작작가가 DMZ는 사실과 다른 말이다. 거기는 비무장지대가 결코 아니다. '철조망 6백리'라고 해야 맞는다는 말을 내게 했어요. 그때 큰 울림이 있었고, 이를 주제로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제목은 <가시철조망 6백리>라고 정했고요."

김대실 감독은 어릴 적 떠나온 북의 신천도, 남의 서울도, 20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수십 년 거주한 뉴욕도 자신의 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혼의 벗이었던 남편 단에게서 발견한 집을 다른 사람에게서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 남쪽 사람, 북쪽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남북을 초월해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분단을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이라 믿는다. 영화  <가시철조망 6백리> 안에서 사랑으로 분단을 녹여내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글 김대실 감독은 10월 31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출국 직전인 10월 28일 오후 12시서울대 사회과학관 312호, 10월 29일 오후5시 강화 교동도 통일문화제에서도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 상영을 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김대실 사람이 하늘이다 다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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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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