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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인터뷰하며
▲ 동부비정규센터 소장 김태을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며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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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듯하지만 그 앞에 '비정규'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동부비정규센터는 사무실도 일하는 환경도 소박하다. 일꾼은 김태을 소장 한 명이고, 사무실은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와 같이 쓴다. 김태을이 소장을 맡은 건 2015년 말이다. 금속노조 서울지부 사무국장 임기를 마치고 소장을 맡았다.

짙은 눈썹, 쌍꺼풀, 파마를 하지 않은 생머리, 차분한 말투, 말할 때 눈을 살짝 감는 모습, 당차 보이는 김태을이 현재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대변해 주는 동부비정규센터 소장이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이의 삶은 어땠을까, 어린 시절부터 되돌아본다.

1973년 목동

1985년 3월 20일, 오후 6시 경에 오목네거리에서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목동 철거에 항의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했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처참한 공방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됐다.
▲ 목동 철거 투쟁 1985년 3월 20일, 오후 6시 경에 오목네거리에서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목동 철거에 항의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했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처참한 공방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됐다.
ⓒ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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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안양천 제방 위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도심 지역 철거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빈민들로 이루어진 빈민촌이 있었다. 이들은 19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 시내 각 지역의 무허가 주택 지역에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쓰레기차에 실려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서울시는 목동을 철거민 정착지로 정해 대지를 가구당 8평씩 나눠 줬다. 빈민들은 판잣집을 지어 살면서도 희망을 키워 나갔다. 그곳에서 조그만 종이 재단 공장을 하던 김기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기선은 충주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을 전전했다. 종이를 자르는 재단을 배워 을지로에서 일하기도 했다. 월남을 갔다 온 뒤 최경옥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1973년, 두 사람 사이에 김태을이 태어났고 두 살 터울로 딸 둘과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김기선과 아내는 구파발, 효창동, 합정동으로 월셋집을 전전했다. 김기선은 장모가 대 준 돈을 기반으로 빈민들이 살던 목동에 조그만 종이 재단 공장을 운영했고, 아내는 공장 직원들 밥과 빨래를 해 주는 일을 했다. 김태을 부모는 드디어 허름한 집을 장만했다. 옆쪽으로 도로가 있고 그 밑에 집이 있어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김태을은 여섯 살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어릴 적 가난이 싫었다. 저녁이 되면 먹을 게 없었다. 늘 동네 쌀가게와 구멍가게 외상을 졌다. '저희 엄마가요, 저녁에 오시면 주신다고 쌀 조금만 달래요' 하는 심부름이 가장 싫었다."

김태을이 초등학교 때인 1983년. 전두환이 독재를 휘두르고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은 목동의 빈민촌을 없애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목동의 판자촌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외국인들이 김포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첫 번째로 보는 풍경이었다.

1983년 5월 11일, 서울시는 서민형 아파트 대신 20~58평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계획을 번복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한다. '당신들이 사는 집은 무허가 건물이다.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다만 배려 차원에서 가옥당 이주비 50만 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되 입주권이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에 주겠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주민들은 기가 막혔다. 서울시가 정착지로 정해 줘 주민들이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집을 지었던 터전이었는데 무허가라니 청천벽력이었다.

새로 짓는 아파트 중 가장 작은 20평형이 2100만 원이었다.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거액이었다. 그해 8월 27일부터 주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면서 한 할머니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실신했고 많은 부녀자들이 폭행당했고 100여 명이 연행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주민들은 심야까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오목교에서 목동네거리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여기서 무려 40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의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연행되었다.

목동 투쟁은 무려 3년이나 계속되면서 시위가 총 마흔아홉 번이나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의 시위나 YH 또는 사북 같은 노동자들의 시위는 겪어 보았지만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일반 민중들의 시위, 그것도 부녀자들과 할머니까지 가세한 극렬 시위는 처음이었다.

이 시위는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이후 서울시가 대규모 신시가지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3년에 걸친 서울시 도시 개발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했다.

오로지 집안일만 했던 김태을 어머니도 그 철거민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김태을이 기억나는 건 어머니가 구청에 가서 데모를 하는 장면이었다. 철거민 투쟁은 김태을이 처음 만난 '대한민국'의 민낯이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 다니던 동네는 서서히 폐허가 돼 갔다. 그러다가 6학년 때 집이 마지막으로 헐려 김태을 부모님은 공장을 접고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시골로 밀려났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시골로 밀려나

김태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동에 있는 신목중학교를 다녔다. 새로 지은 목동아파트에서 잘사는 아이들, 김태을처럼 빈민으로 쫓겨난 집 아이들 반반이 섞여 있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면 햄과 김치로 나뉘어졌다. 교사들도 아이들을 차별했다.

김태을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중학교 때도 반장, 부반장을 했다. 하지만 교사는 반장이 하는 일을 전혀 시키지 않는 등 가난하게 사는 김태을을 차별했다. 성적이 좋은 학생만 보내 주는 수련회도 가지 못했다. 부모가 육성회 임원의 아이를 대신 보냈다.

아버지 공장은 잘 되지 않았다. 비만 오면 수해를 입었고, 사기도 당했다. 아버지는 술도 많이 먹었다. 하루 종일 술 먹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날이 계속됐다. 아버지는 김태을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간다고 했을 때도 술을 먹고 주정했다. "맏딸이 실업계를 나와서 돈을 벌어야지 뭐하러 대학을 가냐?"는 거였다. 김태을은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김태을은 1989년에 고척고등학교를 들어갔다. 전교조 열풍이 휘몰아친 뒤였다. 학교는 경직됐고 선생들도 긴장해 있었다. 만우절에 반을 바꾸는 장난을 쳤는데 주동자를 색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낙서 하나 잘못 쓰면 반성문을 써야 했다. 김태을은 반장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려 나가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닦달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 1, 2학년 때 좋은 담임선생을 만나 김태을은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1992년에 김태을은 동국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학비를 한 푼도 대 주지 않았다. 김태을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했다. 동생들도 보살피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데모가 일상이었다. 선배를 따라 자연스럽게 데모를 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보게 됐다.

어린 시절이 겹치면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데모에 더욱 열심히 참가했다. 노투신(노동현장 투신)과 농투신(농촌 투신)을 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닳도록 들으며 살았다. 김태을은 올바로 살려면 노동운동 현장으로 가야 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김태을이 대학을 들어온 지 이듬해 어머니가 갑상선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휴학하고 엄마를 잘 보살펴야 했는데 철이 없었다. 엄마가 수술하고 나와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했다. 합병증으로 다시 입원 수술하다가 돌아가셨다."

김태을은 그때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6년 동안 대학을 다녔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다. 김태을은 졸업을 하지 않고 대학을 떠난다.

"졸업하면 왠지 나중에 다시 미련을 둘 것 같았다. 노동운동 하면서 살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잘 안 되면 대학 졸업장으로 다른 길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기들, 대학 선배들이 참 고마웠다. 학비도 도와줬고 제적당할 때는 같이 교수한테 찾아가 주고 그랬다."

1997년 성수동, 납땜을 처음 배웠다

2008년 1월 한국캅셀 다닐 때. 사내 중식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태을
▲ 김태을 2008년 1월 한국캅셀 다닐 때. 사내 중식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태을
ⓒ 김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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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성수동으로 간 김태을은 1998년 초에 지인의 소개로 작은 전자회사를 들어갔다. 공장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납땜을 처음 배웠다. 납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커다란 용기에 집게로 기판을 들어 담가 초벌 땜을 한 뒤 김태을이 있는 라인으로 오면 선을 납땜으로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끓고 있는 납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납 연기가 유해 물질인지 몰랐다.

김태을은 한 달 일하고 첫 월급을 40만 원 남짓 받았다. 게다가 아이엠에프가 터져 일이 없는 날이 많았다. 임금은 반토막이 깎여 20, 30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김태을은 도저히 생활이 안 되서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성수동에 있는 오리엔트 시계 밴드를 만드는 회사를 들어갔다. 한 달에 이틀만 쉰 적도 있을 정도로 "질리도록" 일을 많이 했다.  피스를  만들어 일일이 끼우고 못을 박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김태을은 그곳에서 1년 남짓 일하고 퇴직했다. 노조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았다.

"신참 미스가 들어가서 노조 활동 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노동일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있는 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김태을은 당시 금속노조 동부지회에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었다. 조합원 언니들이 있는 회사를 들어갔다. 시계 자판을 만드는 회사였다. 자판에 핀셋으로 숫자를 심고 본드 주사기로 붙이는 일을 했다. 이곳에서도 유해 물질을 다뤘다. 본드가 묻어 있는 주사기를 하얀 물에 담그기만 하면 주사기가 말끔해졌다.

거기에 손을 담그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은 듣지 못했다. 당연히 그 물에 손도 담그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노조에서 공부하다 보니 그 물이 뭔지 궁금했다.

"주사기를 씻으려고 거기 손을 담그면 손이 하얗게 됐다. 차장한테 이거 이렇게 해도 괜찮아요? 물어봐도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날 한양대에서 유해 물질 환경 조사가 나와 관계자한테 물었다. 톨루엔, 벤젠이었다. 만지면 불임이 될 수도 있고, 암에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화가 나 차장한테 따졌다. 그 물에 손을 담그는 거 봤으면서 왜 아무 말 안 했냐고. 아무 말도 못  하더라."

김태을은 조합원 언니들하고 노조를 만들려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한 친구가 불안했는지 아니면 회사를 믿었는지, 노조 결성 전날 회사에 밀고를 하고 말았다.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세 명이 다 해고되면서 노조 결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해고 싸움 끝에 회사와 신사협정을 맺어 다시 회사로 복귀는 했지만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발설을 했던 친구는 김태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친했던 언니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너희 때문에 이 회사 망하면 어떻게 하냐'고 괴롭혔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부품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가다

세상은 점점 비정규직 세상으로 변해 갔다. 김태을은 휴대폰 주파수를 맞춰 주는 부품 회사를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김태을은 처음으로 비정규직의 차별을 경험한다. 동료들과 같이 회식한 뒤 정규직들이 "자, 우리 식구들 2차 가자"고 하면서 따로 놀았다. 노조를 만든다는 건 요원했다. 1년 정도 일한 뒤 다시 회사를 정리했다.

지인이 소개해 화학섬유연맹 선전부장으로 들어가 중앙사무처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풀무원 기계 납품하는 회사에서 캐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다. 같이 노동조합에서 지내다 보니까 착해서 좋더라. 조합에서 하는 교육을 받고 집에 가는데 운동화 끈이 풀렸다. 그걸 묶고 있는데, 남자가 '신발 끈은 그렇게 묶는 게 아니'라며, 그걸 묶어주는데 '심쿵'했다. 내가 미쳤지. 하하하. 지금은 신발 끈 있는 신발은 웬만해서 안 신는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좋다고 그랬다. 교제할 때도 데이트도 별로 못 했다. 갈 곳이 없어 놀이터에 앉아 이야기를 잘 나눴는데 어느 날은 신문지로 방석을 만들어 오더라. 레스토랑은 안 갈 망정, 무슨 신문지 방석 같은 걸로…. 하하하. 그때 서로 눈에 뭐가 씌었다. 7개월 만에 결혼했다."

김태을은 결혼할 무렵, 몇 년 동안 연락 안 하던 집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얘가 북한으로 넘어갔나 하더라. 집에서 나올 때 '노동운동 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집에서 나왔는데, 그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하면 북한 넘어가는 줄 알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너한테 해 줄 건 없다"고 했다. 김태을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김태을은 남편과 알콩달콩 10여 년을 살고 있다. 남편은 몇 년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컴퓨터 수리하는 일을 배웠다. 지금은 동네 작은 컴퓨터 회사 정직원으로 들어가서 유지 보수 업체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다.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김태을은 연맹에서 상근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현장 경험이 없어서 업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지방에 내려가서 몇 박 며칠 머물면서 투쟁사업장 노조를 지원할 수도 없었다. 2년여를 상근한 뒤 경험을 쌓아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현장을 가겠다고 나왔다.

다시 성수동에서 직장을 구했다. 한 조합원이 한국캅셀을 소개했다. 빈 캅셀을 만들어 제약회사에 납품하는 회사였다. 최저 임금이었다. 야근 있는 달은 90만 원이 조금 넘었다. 김태을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다녔다.

완성된 캅셀을 검수하는 일을 했다. 레일 밑에서 불빛이 비치는 개인 컨베이어의 레일이 돌아가면 그 위에 있는 불량품 캅셀을 골라 내야 했다. 오래된 고참 언니들은 거의 달인 수준이었지만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거의 컨베이어가 정지된 상태에서도 못 찾았다.

한국캅셀은 1980년에 설립해 연매출 평균 50억을 내는 흑자 회사였다. 2007년에 100인 이하 사업장부터 주5일제가 실시되면서 월급이 최저임금보다 낮았다. 노동자들이 결국 노조를 결성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회사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김태을은 지회장을 맡게 된다. 그런데 한국캅셀 대표이사직에 있던 조인상 회장은 2008년 7월 기업사냥꾼 이강찬에게 주식양수도 형태로 회사를 넘겨 버렸다.

이강찬은 경영에 관심도 없고 투자도 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10월부터 전기세, 수도세 등 공과금 미납, 직원들의 4대보험료 체납, 임금 체불 등이 벌어지더니 2009년 4월 7일, 전기세 미납으로 단전되어 공장 가동이 중지된다. 노조는 2009년 3월 10일 임금체불 지급을 요구하면서 사무실 항의투쟁을 한다. 이강찬 사장은 2009년 4월 28일 일방적으로 폐업 통보를 했고, 2009년 5월 1일부터 잠적해 버린다.

김태을과 조합원들은 1년 넘게 현장 농성을 하면서 회사 자산 50억 원 횡령 및 직원들의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횡령으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각하됐다. 노동자들은 주주가 아니기 때문에 고소할 자격도 없다고 했다.

노동부에 위장폐업 및 단협 위반 등으로 고소했는데 최저임금법 위반과 체불임금에 대해서만 기소 조치를 당했다. 결국 기업사냥꾼은 대출받는 과정에서 은행에서 리베이트 로비가 드러나 감옥에 갔다. 노조가 없었다면 그런 사실조차 드러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캅셀은 2010년 1월 4일 부동산 업체인 (주)로임에 낙찰된다. 2010년 4월 16일 오전 7시 55분 무렵 부동산업체인 (주)로임은 용역깡패 200여 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내쫓고 한국캅셀을 강탈했다. 부동산 개발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역 활동과 중소영세 사업장에서 어떻게 노동운동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기업 단위의 큰 노조 조직 사업과 활동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속노조 서울지부에서 상근자로 일해

기업사냥꾼 이강찬을 엄중처벌하라고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는 한국캅셀 노동자들.
▲ 한국캅셀 투쟁 기업사냥꾼 이강찬을 엄중처벌하라고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는 한국캅셀 노동자들.
ⓒ 김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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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을은 그 뒤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장으로 4년, 서울지부 사무국장으로 2년 동안 상근자로 일한다. 임기 동안 동부지역에는 몇 가지 인상 깊은 투쟁이 있었다. 현대웰슨투쟁, K2코리아투쟁, 레이테크투쟁이다.

"현대웰슨은 기아직영서비스센터에서 오디오 등을 고치는 멀티미디어 반인데 전국 각 지역마다 조합원이 한두 명밖에 없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모이자고 하면 단번에 모였다. 단협 막바지 날 진천, 부산 등 권역별 현장대의원 네 명이 찾아와 현대웰슨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은 현대모비스 공장을 찾아가자고 했다. 그날로 충북 진천을 가서 밤샘 협상을 하고 돌아왔다. 현대웰슨투쟁도 잘 끝났다."

K2코리아가 노동자를 정리한 사례는 너무 황당했다. 2012년 3월 8일 K2코리아는 신발사업부 생산직 노동자 93명 전원을 해고했다. 회사 측의 해고 이유는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그해 6월부터 신발생산부를 인도네시아로 이전하겠다는 것이었다.

K2코리아의 황당한 고용보장 방안은 이랬다. 일하려면 "개성,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가라".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기본급은 77만 원~80만 원 선이었다. 노동자들은 3월 15일, 노조를 결성하고 대응에 나섰다. 지영식 지회장과 조합원들은 똘똘 뭉쳤고, 지역에서 주민들이 연대해 줬다.

"2012년 여름이 가장 힘들었다. 지영식 지회장과 둘이서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러 갈 때, 50미터 간격으로 서 있던 경찰과 사복형사들이 튀어나와 잡더라. 1인시위 하러 간다고 하면 놔주고, 또 가다 잡히고. 어이가 없더라. 그 땡볕에 일주일 동안 서 있으면서 지영식 지회장과 조합원들이 끝까지 버텨줬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결국 사측은 손을 들었다. 조합원들은 지난 2012년 8월 22일 업무에 복귀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케이투코리아는 투쟁을 잘했다. 정리해고 됐는데 나중에 원천무효가 됐다. 흔한 일이 아니다. 지회장, 노조원들이 헌신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레이테크투쟁은 김태을이 지회장 임기 말년에 시작됐다. 레이테크코리아는 호봉과 근속수당, 밥값 모두를 최저임금에 포함시켜 지급하는 불법적 행태 등을 일삼아 왔고 노동자들의 합법적 파업에 신당동 공장을 안성으로 이전하거나, 직장폐쇄를 하는 등 비이성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레이테크코리아 노동조합은 2014년 6월 11일 전면파업에 들어가 136일 만에, 노사 간 쟁점이었던 공장 서울 이전을 합의하고 임금단체협약도 체결했다. 당시 보기 드문 투쟁 사례였다.

김태을은 그 뒤 서울지부 사무국장을 끝으로 이곳 동부비정규센터 소장을 맡았다.

"동부비정규센터엔 절박한 사람들만 찾아온다. 비정규직센터는 일단 하소연, 한풀이 같은 얘기를 들어준다. 거기서 노동자들이 마음을 좀 푼다. 노동조합 만드는 거 동료들과 어울리는 거 자기들이 스스로 투쟁해서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쉽지 않다. 상담해 주고 같이 싸워 주는 것. 그게 비정규직센터의 일이다."

김태을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옆을 돌아보지 않고 한길을 걸어왔다. 차별없는 세상. 김태을의 소망이다. 

"지금도 직장 다닌 지 7년 됐는데 임금 명세표도 못 받는 분들 많다. 노동자들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건 비슷한데 정권이 나빠서, 제도가 나빠서 못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자본주의가 싫다. 지지리 못사는 곳에서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정답은 없다. 다만 김태을이 살아온 삶에서 조금은 엿볼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태그:#안건모,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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