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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달린 생리대를 하나 놓고 사용법을 몰라 쩔쩔매는 모녀의 모습에서 픽 웃음이 나왔다. 생리대 아래 접착면을 어디에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엄마가 자신 없이 말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접착면을 몸에다 붙이는 거겠지?" - 본문 94쪽

이 모녀가 생리대를 두고 한참 씨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야 첫 월경이라서 모를 수 있다 쳐도 엄마는 왜 모를까? 엄마는 여태 천 기저귀를 써서 생리대를 본 일이 없었단다. 게다가 날개 달린 생리대는 신제품이었다. 더 웃긴 것은 당시 5학년이었던 글쓴이가 팬티에 묻은 생리혈을 보고 곧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모퉁이 책 읽기>
 <모퉁이 책 읽기>
ⓒ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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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책 <모퉁이 책 읽기> 저자 안미선이다. <내 날개 옷은 어디갔지?>의 저자이기도 한 안미선이 40권의 책을 읽고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냈다.

<모퉁이 책 읽기>를 읽으며 내 첫 월경은 어떠했나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기억이 없다. 생리혈을 보고는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했다. 왜 그런 반응을 했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또래보다 늦게 생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생리라 아파!', '양호실이 가야 하나?', '죽겠네!'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그러니 월경을 시작했을 때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시작해서 다행이다. 이런 느낌.

책의 저자인 안미선은 <마이 리틀 레드 북> 책을 읽고 자신의 월경 경험이 들어간 글을 썼다. <마이 리틀 레드 북>은 첫 월경에 대한 여성 10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선한 시도였다. 사적인 경험을 여럿이 글로 써서 책으로 묶으면 뒷사람에게 지혜가 된다. 이런 시도들이 많아지면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돌보는 게 훨씬 수월해지리라 생각한다.

글쓴이는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책을 읽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방법'에 대한 글을 썼다. 이 글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오르가슴 주식회사>를 본 이야기로 시작한다.

감독이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나간 방에서 자위하는 여성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자기 몸을 통해 즐겁고 행복해진 얼굴이었다. 여태까지 여자의 오르가슴은 관음의 대상이었다. 남성의 성적 지배를 관찰하려고 상업적 이미지였을 뿐, 여성 스스로 자기 몸을 긍정하고 오롯이 누리는 기쁨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본문 84

글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그런 실험을 하고 또 그런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을 하였다는 게. 사실 우리 사회는 오르가슴이란 단어를 여성이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터부시한다. 그러니 그걸 느끼는 건 더 어렵지 않을까? 톡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편히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젊은 세대는 돈과 시간이 없어 연애를 포기한다고 한다.

그뿐인가 결혼이나 동거를 하고 싶어도 집값이 너무 비싸 결혼하는 나이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혹여 결혼이나 동거를 한다면 마음 편한 섹스가 가능한가? 장시간 근무시간이나 불안한 경제여건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 편히 섹스하지 못한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건 둘째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여성은 낙태를 선택할 자유도 없다. 그러니 내 몸의 소리에 아무 방해 없이 어떻게 집중을 할 수 있을까? 요원한 이야기다. 그렇다 해도 여성이 자신의 몸에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선 낙태의 자유든 오르가슴이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성들의 다양한 삶이 나온다. 저자가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어르신은 온몸으로 겪어낸 전쟁 이야기를 써 왔다.
너댓 살 때 전쟁통에 엄마를 잃고 울부짖던 이야기를 할 때, 이제 나 어떡하냐고 외치며 피난 행렬 속을 기를 쓰고 헤매고 다녔다고 할 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끌려가 죽은 아버지의 빈자리 탓에 가족이 굶주려 죽게 됐을 때, 모두 발길을 끊었는데 친척이 건네준 쌀 한 말 덕에 살아남았다고 고백할 때, 어르신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떨리는 입술로 차마 글을 마저 읽지 못한다. - 본문 216쪽

32년생인 우리 엄마도 전쟁을 겪었다. 서울에선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언니의 시댁 충청도까지 걸어가서 곡식을 얻어 온 이야기. 먹을 게 없어서 첫 아이를 사산한 이야기. 죽어서 태어난 아기를 남산에 묻어준 아버지 이야기 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힘겨웠던 일들이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눈물이 흘렀다. 여성의 삶으로 기록한 글은 우리가 현대사를 풍부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앞으로도 여성의 삶을 기록하는 더 많은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성의 삶을 기록하고 또 여성의 눈으로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여성의 손으로 써 내려 간 책이 지금 내 손에 있다.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종일 서성거리며 책을 읽었다. 일상 말고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저 문을 열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에 나를 이곳에서 떠나게 해줄 뭔가가 필요했다. 엄마 노릇에 탈진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던 날 아침에도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울타리 넘듯 써내려간 글들이 보고 싶었다. - 본문 64쪽

나도 육아와 살림에서 벗어나 담장을 넘어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 온종일 살기 위해서 글쓴이는 책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이 책을 내놓았다. 저자의 책 읽기, 글쓰기 모두 응원해 주고 싶다.


모퉁이 책 읽기 - 여자들의 책 읽기 책 속의 여자 읽기

안미선 지음, 이매진(2016)


태그:#모퉁이책읽기, #안미선,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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