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

영화 <노트북> ⓒ 글뫼


"비록 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영혼을 바쳐 평생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내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영화 <노트북>은 주인공 노아(라이언 고슬링 분)의 이런 회상으로 시작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와 지난 2004년에 개봉했다가 올해 재개봉한 닉 카사베츠 감독의 영화 <노트북>. 두 영화는 불꽃같은 첫사랑을 다루지만 그 불꽃의 성질은 판이하다. <카페 소사이어티>의 사랑은 촛불이다. 마지막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스러진다.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허무한 낭만이다. 반면에 <노트북>의 사랑은 숯불이다. 강렬한 불꽃은 잔잔한 숯불이 되어 끝까지 이어진다. 애절하지만 훈훈한 로맨스다.

촛불같은 사랑과 숯불같은 사랑

우리는 세상을 다 아는 듯이 까부는 10대 청소년들을 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하고 혀를 끌끌 찬다. 이런 말을 뒷받침하듯 뇌과학자들은 10대 청소년들의 행동이 뇌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데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뇌의 CEO역할을 하는 전전두피질이 미성숙한 탓에 청소년들이 특유의 충동적이고 반항적인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진화생물학자인 미셸 레이몽에 의하면 근대 이전의 방대한 동서양 문헌을 뒤져봐도, 오늘 날 청소년들과 같은 특이행동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근대 이전처럼 청소년기가 따로 없이 10대 후반에 곧장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동일한 대우를 받던 시절에는 청소년들의 일탈행동 자체가 없었다는 소리다.

각설하고 <카페 소사이어티>의 여주인공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만난 가난한 연인 바비(제시 아이젠 버그 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접고, 성공한 사업가인 필(스티브 카렐 분)과 결혼한다. 바비의 첫사랑은 그렇게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서 떠나가 버린다.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세속도시에서의 신분상승을 꿈꾸는 네브라스카 출신 촌뜨기 보니. 그녀는 자신의 진화적 본능을 뉴욕 출신의 빈한한 청년 바비가 충족시켜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의 한 장면. 할리우드가 낯설은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곳 저곳 구경시켜 주는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 바비는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통속적이지 않고 쿨한 보니에게 반하고, 보니는 바비의 다정하고 자상한 면모에 끌린다.

<카페 소사이어티>의 여주인공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만난 가난한 연인 바비(제시 아이젠 버그 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접고, 성공한 사업가인 필(스티브 카렐 분)과 결혼한다. ⓒ CGV아트하우스


신분 상승을 꿈꾼 보니와 가난한 목수를 선택한 앨리

<노트북>의 여주인공 앨리(레이첼 맥아담스 분)와 노아의 사랑은 어떨까? 미 동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작은 소도시 시브룩. 그곳에서 목공소 직원으로 일하는 노아. 그는 여고생 앨리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한다. 문제는 그들이 고작 17세의 청소년들이라는 것. 가난뱅이 직공을 재력가인 앨리의 부모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앨리의 부모는 대학진학을 핑계로 앨리를 데리고 시브룩을 떠나 찰스턴으로 가버린다. 앨리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가슴 아프겠지만 10대의 풋사랑은 곧 잊히는 법이야!"

앨리가 찰스턴으로 떠난 뒤에 노아는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를 쓰지만, 앨리의 엄마는 이 편지를 앨리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우여곡절의 7년이 흐른다. 앨리와 노아 커플은 어찌 되었을까. 앨리는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경제적 안정을 택했던 <카페 소사이어티>의 보니와 같은 길을 걸어갔을까? 목화공장 사장의 아들 론과의 결혼식을 앞두고 들떠 있던 앨리. 그녀는 신문기사를 보고 꿈에도 잊지 못하던 노아의 근황을 알게 되고 그 자리에서 혼절한다. 깨어난 앨리는 차를 몰고 시브룩에 있는 노아를 찾아간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실의에 빠져 있던 노아와 그를 찾아온 앨리.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다시 불타오른다. 사라진 딸을 찾아 노아의 집으로 온 앨리의 엄마는 딸에게 통보한다.

"가난한 직공의 아내로 살 것인지, 재력가의 아내로 살 것인지 선택해라!"  

약혼자를 두고 첫사랑 연인과 금지된 장난에 빠진 앨리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앨리는 약혼자 론에게 고백한다.

"노아와 함께 있을 때의 나하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 같아요!"

그러나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사랑하는 바비를 버리고 경제적 안정을 택했던 <카페 소사이어티>의 보니와 달리, 1940년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앨리의 선택은 부유한 약혼자 론이 아니라 가난한 첫사랑 노아였다.

 노트북의 제임스 가너와 제나 로우랜즈

노트북의 제임스 가너와 제나 로우랜즈 ⓒ 글뫼


순정만화 같은 실화, 감동의 무게가 다르다

침팬지를 위시한 영장류 사회에서 알파 메일, 즉 가장 강력한 수컷을 제치고 다른 선택을 하는 암컷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침팬지의 암컷에게는 짝짓기에 있어서는 아예 선택권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암컷만이 수컷의 사회적 지위와 자원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감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화적 본능을 무시하고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한 앨리의 결단은 박수 받을 만하다.

영화 <노트북>은 아직 뇌가 여물기도 전인 17세 풋내기 연인, 노아와 앨리의 첫사랑이 결실을 맺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잔잔하게 그려낸다. 이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가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영화의 진짜 반전은 스크린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10여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노트북>, 강력히 추천한다.

사족: 노아는 앨리가 떠나고 난 뒤에, 자신들의 첫사랑 장소였던 윈저저택을 사들여 완전히 리모델링한다. 그리고 저택 앞의 호수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나버린 앨리를 그리며 하염없이 노를 젓는다. 그가 이 보트 속에 태우고 싶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앨리다. 얄궂은 운명인지, 감독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이 보트의 주인 이름은 노아다.

그러므로 이 보트는 노아의 방주(Noah's Ark)다. 그 옛날 아라랏산의 '의로운 사람' 노아가 홍수심판 속에서 세상을 구했다면, 시브룩의 '순정(純情)의 사내' 노아는 호수에 빠져 영원히 사라질 뻔한 자신들의 사랑을 구한 셈이다. 노아와 앨리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있을 때 갑자기 쏟아진 폭우,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회복을 상징하는 격렬한 정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시민기자의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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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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