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2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에 도착한 뒤 본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 국회 본회의장으로 향하는 박근혜 대통령 지난 2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에 도착한 뒤 본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개헌에 소극적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개헌 논의를 전격 제기했다. 1987년 제9차 개헌의 핵심인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이 되었"다면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도약시킬 2017년 체제"를 만들기 위해 "2017년 체제 헌법"을 만들자고 그는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식의 대통령 연임제(중임제)를 하자는 것인지 일본식의 의원내각제를 하자는 것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다음날부터 다시 차기 대선이 시작되는 정치체제로 인해 극단적인 정쟁과 대결구도가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발언은 대통령에게 연임의 기회를 보장해주자는 말일 수도 있고 대통령제 자체에 대한 부정적 속뜻을 표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확단할 수 없지만, 의원내각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으로서는 4년 연임제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향후 정국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통치자의 임기가 중요해진 이유

통치자의 임기를 몇 년으로 할 것이냐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부각된 문제다. 고대 로마에서는 임기 1년의 공동 집정관 두 명이 국정을 운영하다가, 비상시가 되면 임기 6개월 이내의 독재관 1인이 대권을 장악한 사례가 있다. 공화정 시대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불과 100~200년 전만 해도 인류는 통치자의 임기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이를 제한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이 우리보다 덜 민주적인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군주가 천명을 명분으로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에, 나라의 주인도 아닌 백성들이 군주의 임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에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귀족집단이 군주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견제했기 때문에 굳이 군주의 임기를 제한하지 않더라도 독재를 막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해도 군주가 말을 안 들으면 독살이나 쿠데타로 정권을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이에 비해 최근 100~200년 이후로는 형식적이나마 국가가 국민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래서 주인인 국민이 선출직 고용인 혹은 CEO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임기를 문제 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고전적 의미의 귀족도 없다. 한국의 재벌처럼 실질적 의미의 귀족은 남아 있지만, 법적인 귀족계급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이들이 통치자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거나 견제할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민이 일상적으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러다 보니 통치자의 임기나 연임 문제를 법적으로 못 박을 필요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군주 종신제에 익숙했던 인류가 임기제에 갑자기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이로 인한 온갖 우여곡절이 최근 100~200년간 각국 개헌의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① 미국: '왕이 돼달라'는 뜻 거부하고 만든 3선 금지 불문율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관련사진보기


근대 세계에서 대통령제의 선례를 만든 미국에서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종신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여론을 외면하고 두 번째 임기 만료 6개월 전인 1796년 9월 이른바 '고별연설'을 통해 3선 불출마를 기정사실화한 이래로 '4년 중임제, 3선 금지'가 불문율로 자리를 잡았다.

건국의 아버지인 워싱턴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물론이고 조선 건국시조 이성계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런 것을 뿌리치고 대통령이 되더니 종신 대통령이 될 기회마저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행보를 보였으니, 그의 사례가 불문율의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불문율이 깨진 것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3선에 이어 4선까지 당선되는 것을 용인했다. 그는 1932년·1936년·1940년·1944년에 4연속으로 당선됐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잠시 예외가 인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에 '4년 중임제, 3선 금지'가 헌법에 명문화됨으로써 루스벨트의 4선은 현행 헌법체제에서는 유일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② 프랑스: 민의 무시하고 황제 부활... 조시 워싱턴과 정반대의 길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상징되는 피의 투쟁을 거쳐 민주주의를 획득한 프랑스에서도 대통령의 임기는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프랑스인들의 걱정은 혁명의 엉뚱한 수혜자인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구세력과 주변국들의 훼방으로부터 프랑스혁명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준 대가로 1799년 제1통령에 오른 나폴레옹은, 개헌도 아닌 상원 결의를 통해 임기를 10년으로 늘리더니 얼마 안 있어 임기를 종신제로 바꿔 놓았다. 그러더니 1804년에는 아예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되어버렸다. 그런 뒤에,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848년 2월혁명의 결과로 출범한 제2공화정에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고자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제한했다. 단, 연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독재를 막고자 하는 국민적 여망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있었다. 그 역시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바로 그였다.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관련사진보기


유럽 역사에 나오는 1세니 2세니 3세니 하는 표현은 정식 칭호가 아니라 편의상의 칭호다. 나폴레옹 3세라는 표현은 프랑스 제국에서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쓴 세 번째 황제라는 의미다. 첫 번째 나폴레옹은 우리가 아는 그 나폴레옹(편의상 나폴레옹 1세)이고, 두 번째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1세의 아들로서 보름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아들 나폴레옹(편의상 나폴레옹 2세)이다.

프랑스 2월혁명은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선거권 확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혁명의 결과로 대통령이 됐으니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권리 확대를 위해 열의를 다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임기제 조항을 무시하고, 임기 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 삼촌의 전철을 밟았다. 종신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라 불린 것이다.

나폴레옹 3세가 혁명을 망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2월혁명의 주체세력이 쉽게 분열되어 혁명을 수호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서 황제 제도를 부활시킨 그는 프랑스의 팽창과 민주주의 억압을 추진하다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폐위를 당하고 말았다.

두 명의 나폴레옹한테 뒤통수를 맞은 프랑스인들은 그 후로는 기본적으로 의원내각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독한 정치적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샤를 드골이란 영웅의 등장을 계기로 성립한 1958년 제5공화정에서는,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정치적 혼란을 막되, 의원내각제적 요소로 대통령을 견제하는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했다. 이 제도 하에서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에게 비교적 긴 임기를 보장했다. 처음에는 7년 연임을 보장했다가 2002년 자크 시라크의 재선 때부터는 5년 연임제로 바뀌었다.

③ 한국: 선출직 황제제 등장도... 독재자들이 더럽힌 역사

이승만 동상. 충북 청주시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이승만 동상. 충북 청주시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대통령 임기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 이씨의 후예로서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 경쟁심을 갖고 자란 탓에 자신을 제왕과 동일시했던 이승만. '내 할 일은 다 해놓고 내려가겠다'는 신념을 품고 대통령직을 지켰던 박정희. 이 두 인물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제55조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하되 1차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954년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에서 변칙이 있었다. 대통령에 두 번 당선된 이승만이 3선을 목적으로 헌법 부칙에 단서를 둔 것이다. 1954년 헌법 하의 대통령에 한해서만 제55조의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자기에 한해서만 3선이 가능하도록 했던 것이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의원내각제로 바뀌었던 통치체제는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를 계기로 대통령제로 되돌아갔다. 1963년 제5차 개헌에서는 '임기 4년에 1차 중임 가능'으로 회귀했다. 일반적인 대통령제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박정희 흉상.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서 찍은 사진.
 박정희 흉상.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박정희도 결국 이승만의 길을 걸었다. 다만, 형식은 좀 달랐다. 1969년의 제6차 개헌(3선 개헌)에서 박정희는 임기를 4년으로 하되 3차 연속 중임이 가능하도록 바꾸었다. 이승만은 헌법 부칙을 통해 자기에 한해서만 연임 제한을 없앴지만, 박정희는 부칙이 아닌 헌법 본문을 통해 없앴다. 이승만처럼 본인만 3선을 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3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박정희의 '배려'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1972년 제7차 개헌(유신개헌)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는 동시에 연임이나 중임의 제한을 없앴다. 자기뿐 아니라 타인들도 6년씩 무한정 당선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실상, 선출직 황제 제도의 등장이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아니라 프랑스의 두 나폴레옹을 본뜬 것이다.

박정희 체제의 수혜자이면서도 10·26 사태 뒤에 유신체제 청산을 천명한 전두환은 1980년 제8차 개헌(단임제 개헌)을 통해 7년 단임제를 정착시켰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는 '짧은 기간만 대통령직에 있겠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했지만, 그의 7년을 경험한 국민들은 '겪어보니 7년도 너무 길다'는 생각에 1987년 6월항쟁 직후의 제9차 개헌(직선제 개헌)에서 5년 단임제로 줄여놓았다.

이렇게 해서 5년 단임제로 축소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를, 박근혜 대통령이 시대 상황에 맞게 개정하겠다면서 개헌 논의에 불을 붙였다. 통치자 임기제의 역사가 100~200년밖에 안 됐고 한국에서는 그 역사가 훨씬 더 짧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나 연임 제한을 둘러싼 시행착오나 문제 해결은 2017년 헌법체제가 출범한 뒤에도 계속해서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태그:#개헌, #중임제, #대통령 임기,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