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심장 이상으로 끝내 숨져 가수 신해철이 심장 이상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지난 2014년 10월 27일 오후 8시 19분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신해철은 지난 22일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뒤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 보컬로 데뷔한 신해철은 솔로 가수와 밴드 넥스트로 활동하며 '그대에게',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인형의 기사' 등의 히트곡을 냈다.

2014년 10월 27일, 신해철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 연합뉴스


신해철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시대가 해괴해지니 그의 존재는 유독 크게 느껴진다. 언제나 약자 편에서 바른말을 했던 '입'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소셜테이너'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가장 적극적인 '사회 참여' 연예인이었던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느 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신해철이 그간 해왔던 '사회 참여 발언'을 되돌아보며 추측해보도록 하자.

2002년, 신해철은 '광장'에 나섰다

신해철은 이전부터 자신의 가사를 통해, 또 라디오 <FM음악도시>와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진 않았다. 그의 발언이 어디까지나 뮤지션과 '라디오 디제이'라는 직업적 틀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12월, 그는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TV 찬조연설에 출연하고, 유세장에 함께 다니며 '노무현 지지'를 호소한다. 현재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김제동이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회를 보면서부터 '소셜테이너'로서 부각됐다면, 신해철은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 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 2002년 겨울에 아빠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었어'라고 물으면 '어 아빠는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뭐 정치하고는 무관하고 그때는 음악실에서 열심히 곡을 쓰고 있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도저히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저는 사람 사는 세상,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이번 12월 19일에 노무현 후보에게 담아서 띄워보고 싶습니다.
- 노무현 후보 TV 찬조 연설 중

 2002년 노무현 후보 찬조 연설의 한 장면

2002년 노무현 후보 찬조 연설의 한 장면 ⓒ SBS


신해철의 입을 열게 만든 직접적 계기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그해 11월 29일 열린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오프닝쇼에서 싸이와 함께 '킬러'라는 곡을 부르며 모형장갑차를 부수는 반미 퍼포먼스를 보였다. 두 명은 앞서 9월에 열렸던 '심미선 ·신효순양 추모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신해철은 11월 30일 광화문 촛불시위에 나서서 미국을 향해 "그따위로 하려면 나가라" "양키 고 홈"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노무현 찬조 연설에도 이 사건이 언급됐다.

노무현 정부에 반기를 든 신해철

노무현 정부는 초기부터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신해철은 참여연대의 '파병반대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참여해 "이번 참전 이유로 '국익'을 내세우는데 이는 더 큰 국익을 보지 못한 좁은 생각"이라며 "파병한다면 향후 우리 후손에게 도덕적 부담감만 물려주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의 정치 성향은 사실 예전부터 민주노동당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왜 노무현을 지지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치에 뜻이 없었기에 이런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참여연대의 '파병반대 청와대 1인시위' 5일째 시위자로 참여한 가수 신해철씨. 신씨는 이날 '상복'의 의미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채 검은 신발을 신고 시위를 벌였다. 가수 신해철씨가 지난 2003년 3월 21일 청와대앞에서 이라크파병 반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씨는 이날 '상복'의 의미로 검은색 양복, 넥타이, 신발을 착용한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가수 신해철씨가 지난 2003년 3월 21일 청와대앞에서 이라크파병 반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씨는 이날 '상복'의 의미로 검은색 양복, 넥타이, 신발을 착용한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김지은


'자 이제 민노당에 마음의 빚을 갚자, 당원 가입을 하자' 그랬더니 와이프가 "오빠의 일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요만큼이라도 터치하고, 그러는 것 봤냐, 하지만 이건 안 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어" 그랬죠. 

"이제 와서 당원으로 입당을 하면, 누가 봐도 (아내 입장에서)오빠는 정치를 할 것으로 보인다는 거죠. 당적을 옮겼을 뿐이지.
- <신해철의 쾌변독설> 95p~96p

이후 신해철의 행보는 거침 없었다. 그해 9월에는 문신 예술가였던 김건원씨가 병역기피자에게 문신을 해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자 공개 탄원서를 제출했고, 12월에는 김건원씨 '후원 콘서트'의 사회 역할을 자처하면서 '문신 시술 법제화'를 주장했다. 2005년 이후에는 MBC <100분 토론>에 6번이나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사회 참여 연예인'으로 거듭난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논쟁 빠짐없이 참여

노무현 정부 시절은 한창 '개인의 자유' 논쟁이 가열되던 시절이었다. 사회를 지배하던 권위주의가 사라져간다고 믿었고, 각계에서 헌법에서 규정하는 '자유권'을 되찾으려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졌다. 신해철은 언제나 '현상 유지'보다는 '개혁'을, '통제'보다는 '자유'를, '집단' 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이슈에서 체제에 반기를 드는 쪽을 택했고,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논란이나 정책 변화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이전부터 있었다. 스크린쿼터 폐지 논란이나 MP3 불법다운로드 문제 같은 경우다. 그러나 전방위적인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갈 만큼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전방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신해철이 유일했다. 

신해철은 2005년 3월 '대마초 논란'편으로 <100분 토론>에 첫 등장한다. 그는 "대마초에 대한 지나친 공포, 잘못된 오해들이 만연하고, 대마초 흡연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 비범죄화해서 조금 더 섬세한 통제할 수 있는 룰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대중은 그의 대마초 흡연 이력을 들먹이며 속칭 '뽕쟁이'등의 비난을 퍼붓는다. 그는 훗날 이 토론에 대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표현했다.

그해 11월 '간통죄 폐지 논란' 편에서는 진선미 변호사(현 더민주 의원)와 함께 '간통죄 폐지 찬성'의견 측으로 100분 토론에 출연했다. 그는 간통은 국가 공권력이 간섭할 문제가 아닌, '사적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토론 내용과 관계없이 흰색 후드티셔츠에 검은색 가죽장갑을 꼈다는 이유로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간통죄는 약 10년이 지나서, 신해철 사후에야 폐지됐다.

3일 MBC <100분토론>에 출연한 가수 신해철씨의 의상이 네티즌들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MBC 화면캡처) 3일 MBC <100분토론>에 출연한 가수 신해철씨의 의상이 네티즌들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MBC 화면캡처)

논란을 일으켰던 의상. 흰색 후드에 검은색 장갑을 꼈다.


2006년 7월 '체벌, 폭력인가 애정인가'편에서는 육체적 체벌은 호전성이나 반사회적 행동을 가져오게 되며,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와 장자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며 체벌 금지를 주장했다. 그는 2004년에 당시 MBC <고스트 네이션>을 통해 학교에서 이뤄지는 체벌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 뒤, '체벌금지법제화추진모임'이라는 커뮤니티를 직접 개설한 적도 있다.

'달라진 신해철', 기대했었는데...

이 밖에도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자신의 SNS, 인터뷰집 등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화두를 던졌다. 드림콘서트 '소녀시대 침묵' 사건, 가요 프로그램 순위제 부활, 씨앤블루 표절 논란 등 비교적 민감하다고 여겨지는 가요계 이슈에서도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영어공교육 강화 정책에 대해 '차라리 미국의 51번째주가 되는가'라며 조롱하는가 하면, 그의 인터뷰집 <쾌변독설>에서는 "오죽하면 개독교라고 욕을 먹겠는가"라며 한국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관련 기사: 신해철, 그는 왜 기독교를 질타했나)

그러나 그가 언제나 '바른말', '올바른 행동', '합리적 판단'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전형적인 '록커' 기질이 있었다. 청취자를 향해 "나 방송 안 해"라는 식의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고, 소위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경솔하고 과격한 주장을 펼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런 성향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바로 2009년에 일어났던 '입시학원 광고 모델'과 '북한 미사일 축하' 논란이었다.

평소 한국의 교육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신해철이 어느 날 입시 학원 광고 모델로 등장하면서, 거의 '융단 폭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신해철은 "각하(이명박 전 대통령)께서 주신 용돈 잘 쓰겠다", "난 공교육을 비판했지, 사교육 반대론자가 아니다"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팬들을 포함한 대중에게 큰 실망감만을 안겨준다.

'학원 모델' 논란에 이어 2009년 4월에 일어난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후략)"라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겼고, 이는 큰 파장을 불러온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비꼰 것이다"라고 밝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일종의 '실패한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대중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신해철은 tvn <오페라스타>에서의 태도 논란, KBS <Top 밴드>에서의 판정불복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언제나 강한 발언, 경솔하고 삐딱한 태도로 일관했던 신해철이 2014년 솔로앨범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를 내면서는 사뭇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연한 SNL과 '속사정쌀롱'에서는 '독설' 대신 성찰이나 위로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속사정 쌀롱>에 출연한 윤종신과 고 신해철.

<속사정 쌀롱>에 출연한 신해철 ⓒ JTBC


tvn <SNL 코리아>에서는 "나이를 먹으니 굳이 사람들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으며, 당시 진행자였던 유희열씨가 막말을 후회하느냐고 묻자 "가르치려 들면 안 되는데, 기술적으로 서툴렀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학원 광고에 대해서는 "자식들이 학원 갈 나이가 된 후 고민해보고 결정했어야 하는데 아쉽다"며 처음으로 후회한다고 밝혔다. jTBC <속사정쌀롱>에서는 예전의 '마왕' 대신 후배 연예인들의 놀림을 받아주고, 느긋하게 방송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패널 중에 유일하게 사연에 나오는 '32살 백수'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다그치지만 말자'고 말했던 것도 그였다. 

2012년에 담낭염 수술을 한 이후에 건강이 나빠져 한동안 활동을 못 했고, 두 아이가 커나가는 걸 보면서 그는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내심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하게,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래서 더욱 허망하다.

'야비한 시대'일수록 신해철의 말은 기억된다

최근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과 '여성혐오' 논쟁에 의해서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가속화되면서, 신해철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지적했던 발언들도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에 방송된 MBC <명랑히어로>에서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들의 성적이 뒤처져서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그게 왜 문제가 되나, 여전히 사회 나가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므로 미리 성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라며 다른 남성 패널들의 성차별적 발언을 전부 반박하는 모습은 뒤늦게 화제가 됐다.

이렇듯 사회가 퇴보할수록, 약자에 대한 폭력이 더욱 강해질수록 신해철의 말은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것이다. 세월호 침몰, 백남기 농민 사망, 최순실 게이트 등 연달아 기가 막히는 일들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그가 세상을 향해 쏟아낸 분노에 찬 말들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의 말들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되는 것을 신해철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하늘에서 간절하게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가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면, 지금보다는 세상이 조금이나마, 정말 아주 조금이나마 더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국 사회가 청년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어른, 약자들의 말을 널리 퍼트리는 대변인 하나는 더 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저 우리는 그리워할 따름이다.

 지난 25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열린 '신해철 1주기 추모식 및 봉안식'에서 고인의 아내 윤원희씨가 야외 안치단에 헌화를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5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열린 '신해철 1주기 추모식 및 봉안식'에서 고인의 아내 윤원희씨가 야외 안치단에 헌화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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