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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미 그린 달빛> 속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홍라온(김유정 분), 김윤성(진영 분).
 <구르미 그린 달빛> 속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홍라온(김유정 분), 김윤성(진영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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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처럼 시작했던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이제는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으로 바뀌었다. 조선을 상대로 체제 전복을 시도한 홍경래. 그의 딸 홍라온(김유정 분). 허수아비이기는 했지만 홍경래를 상대로 체제를 방어했던 조선의 왕, 순조. 그의 아들 효명세자(박보검 분). 왕실은 아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 이 가문의 손자 김윤성(진영 분).

서로 쉽게 섞일 수 없는 이 셋. 이 셋이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다. 홍라온의 입장에서는 효명세자나 김윤성 모두 원수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전개되는 삼각관계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 불행한 이야기의 출발점은 홍라온의 아버지, 홍경래에 있다. 그가 벌인 혁명전쟁 때문에 세 사람의 뒤얽힌 사랑이라는 상상의 산물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혁명이 실패했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홍경래의 거사는 지금으로부터 204년 전인 1812년에 있었다. 각종 서적에 쓰인 것처럼 이 사건이 1811년에 발생한 게 아니라, <순조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론 순조 11년 12월 18일, 양력으론 1812년 1월 31일에 발생했다는 점은 앞선 세 번째 기사에서 설명했다(관련 기사 : 김병연-홍라온, 실제로 만났다면 '원수지간').

거사 초기, 홍경래의 앞길은 괜찮아 보였다

애초에 평안도에서 거사를 벌일 당시만 해도 홍경래의 앞길은 탄탄해 보였다. 평안도에 대한 오랜 차별 때문에 지역민들의 불만이 누적된 데다가 1809년부터 흉년 피해가 심해서 지역경제가 파탄된 상태에서 거사를 벌였기 때문에, 대중의 호응도 좋았고 관군의 저항도 심하지 않았다.

거사 시작과 동시에 반군은 지금의 평안북도인 청천강 이북을 손쉽게 장악했다. 청천강 이북을 다 점령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점령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각지의 사또들이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경래가 이끄는 본진의 작전참모는 풍수가 출신인 우군칙이었다. 그는 청천강 이북의 영변까지 점령함으로써 강 이북을 확실히 점령한 다음에 청천강을 넘어 황해도→경기도→한성(서울)으로 남진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청천강 이남에 있는 안주군에서 가담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변을 놔두고 청천강을 넘어 안주부터 점령하자고 주장했다. 영변이 먼저냐, 안주가 먼저냐를 놓고 갈등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본진 내부에 갈등이 생긴 상황에서 홍경래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군칙의 의견대로 가려고 했던 홍경래는 안주군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다가 다시 우군칙의 의견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순간에 총사령관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갈팡질팡 홍경래, 내부 균열이 시작됐다

 <구르미 그린 달빛> 속 홍경래(정해균 분).
 <구르미 그린 달빛> 속 홍경래(정해균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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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임금 때인 1771년 출생한 홍경래는 과거시험 소과의 2차 시험(복시)을 앞둔 때인 1800년께 서른 살 정도의 나이로 응시를 포기했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앞둔 상태에서 수험생활을 접은 것이다. 그런 뒤에 그는 방랑의 길에 접어들었다. 정조 임금이 죽고 순조가 왕이 된 해가 1800년이다. 그 무렵에 홍경래의 출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홍경래는 각지를 유랑하며 풍수도 봐주고 운명도 봐주는 방법으로 돈도 벌고 사람들도 사귀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농민도 모으고, 상인도 모으고, 선비도 모으고, 지주도 모았다. 이런 이들이 1812년의 거사에 동참했다.

이 같은 홍경래의 이력 때문에, 이 부대의 주력군은 농민들이지만 지도부에는 농민·상인·선비·지주 등의 다양한 계층이 포진했다. 이런 구성은 다양한 관점과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으나, 결정적 순간에 통일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지장이 될 수 있었다.

홍경래의 경우에는 그것이 실제로 지장이 됐다. 그가 우군칙과 안주군 사람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자 안주군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자기네 의견을 따라주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홍경래가 믿음직스럽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 끌다가 실패하느니 차라리 홍경래를 죽이고 포상금이나 타자는 쪽으로 그들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홍경래를 향한 암살의 칼을 뽑아들었다.  

암살은 미수로 끝나고 홍경래는 부상을 당했다. 대원수가 부상을 당했으니 반군은 군사행동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원수 홍경래가 이끄는 본진과 부원수 김사용이 이끄는 2진 모두 군사행동을 '올 스톱'하게 됐다.

이렇게 혁명군이 멈칫 하는 틈을 관군은 놓치지 않았다. 관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각지에 숨어 있던 홍경래의 지하조직을 적발했다. 그런 다음에 본진과 2진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홍경래 부대는 공격 모드에서 방어 모드로 전환한 뒤, 청천강 이북의 정주성에 한 데 모여 3개월 이상 저항하다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거사 실패 원인, 청나라에 있기도 했다

 홍라온(김유정 분).
 홍라온(김유정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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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거사는 지역민의 호응과 지역경제의 파탄이라는 좋은 조건에서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대원수의 리더십 부족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외에도 결정적 요인들은 더 있다. 그중 하나는 1812년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다.

한나라가 동아시아 최강으로 등극한 기원전 2세기 이후로, 한민족의 정세는 어떤 형태로든 중국 대륙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반도나 만주의 왕조교체 혹은 정치변동은 중국대륙이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일어났다. 중국 대륙이 안정적일 때는 한반도나 만주의 급변 사태가 잘 발생하지 않었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꺾고 동아시아 최강으로 등극할 때까지는 이 법칙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홍경래가 혁명을 일으킨 1812년은 동아시아가 비교적 평화로울 때였다. 조선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체제에 대한 불만도 커져가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국제관계는 안정성을 보이고 있었다. 청나라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국제적으로 별다른 혼란이 없었다. 

동아시아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홍경래가 거사를 일으킨 지 28년 뒤인 1840년이다. 17·18세기에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업그레이드시킨 서유럽이 이를 기반으로 중국 시장을 개방하고 경제 패권을 빼앗을 목적으로 아편전쟁을 벌여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1840년부터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1812년 당시에는 아직은 평화로웠다. 청나라의 국제적 지도력도 안정적이었다. 그 덕분에 청나라와 동맹을 맺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도 안정적이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불안정했지만, 든든한 동맹국 덕분에 대외적으로는 안정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1812년이라는 시점은 혁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여건이 덜 성숙한 때였다. 물론 국내적 여건은 성숙해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정세가 한반도 내부보다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보다 더 많이 좌우됐기 때문에, 국내적 여건보다는 국제적 여건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점은 혁명이 성사되기 어려운 때였다.

이런 시점에서 홍경래의 거사가 터졌다. 만약 국제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훨씬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이 홍경래를 지지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립세력이나 부동층이 홍경래 쪽으로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홍경래 부대 내부의 결집력도 훨씬 더 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패권국인 청나라의 지위가 안정적이고 그런 청나라가 조선 정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했기 때문에, 홍경래는 보다 더 많은 역량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경래 부대 내부에서 의견분열이 쉽게 일어나고 포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홍경래의 리더십이 약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반대편인 조선 정부의 입지가 아직은 든든하게 보였기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

만약 홍경래가 국제·국내적 여건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역사무대에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이씨의 왕조가 해체되고 홍씨의 나라가 세워졌다면 어땠을까?

그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는 차치하고, 당장에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의 스토리 구성부터가 달라졌을 것이다. 홍경래의 신왕조에서 공주가 된 홍라온, 폐주의 아들로서 도망자 신세가 된 폐세자 효명, 반혁명처벌법에 의해 역시 도망자가 된 김윤성. 이렇게 입장이 뒤바뀐 세 인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쪽으로 드라마 작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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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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