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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1호인 강호정(江湖亭)은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가 임진왜란 후인 1599년(선조 32)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紫湖) 언덕에 지은 정자이다. 그래서 강호정 마루 안에는 자호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정세아는 이곳에서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1974년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1호인 강호정(江湖亭)은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가 임진왜란 후인 1599년(선조 32)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紫湖) 언덕에 지은 정자이다. 그래서 강호정 마루 안에는 자호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정세아는 이곳에서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1974년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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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포은로 1605, 예전에는 자양댐이라 불리다가 근래 들어 영천댐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거대 인공 호수를 끼고 있는 집단 한옥 옛날 집들의 현재 주소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전통 고가촌에는 강호정, 하천재와 추원당,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 등의 집과 정자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 시대의 문화유산들이다.

추원당 뒤편에는 비각도 한 채 있다. 비각은 정세아(鄭世雅, 1535∼1612) 신도비를 지키고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소(神)로 가는 길(道)을 안내해주는 비석이다. 따라서 정세아 신도비가 한옥 고가들과 함께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정세아 묘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천 의병장 정세아, 공로 다른 장수들에게 돌리고 귀향

정세아는 누구인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정세아는 어려서부터 진중한 성격에 덕망이 있었다. 1558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592년 (영천 지역에서) 처음으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하였으며, 향인(鄕人, 지역민)들이 추대하여 의병장이 되었다'라고 소개한다. 정세아의 나이가 당시 58세나 되는 고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전형적인 문인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창의한 형태(임진성 논문 <임진왜란 당시 영천 지역의 유림과 학맥>)'였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이어 '왜적들이 영천성을 점거하였는데, 정세아는 장사들로 하여금 밤에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게 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무너져 달아났다'면서 '정세아가 달아나는 적을 쫓아가 목을 베니 이로 인하여 영천이 온전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정세아는 '난리가 평정된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정세아는 "신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른 것이지 공훈과 명예는 뜻함이 아닙니다" 하며 모든 공을 제장(諸將, 여러 장수)들에게 미루었다'는 것이다.

정세아는 '이듬해(1593년)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영천시 자양면)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그의 현명함을 듣고 황산도 찰방으로 임명하고, 병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1732년(영조 8) 병조판서로 추증을 더하고, 1788년(정조 12) 강의(剛義)라는 시호(諡號,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사람에게 죽은 후 임금이 내리는 이름)를 추증하였다.'

그런데 정세아 의병장의 묘소 앞 비석에는 시호인 강의 두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병조판서와 황산도찰방은 새겨져 있지만 강의는 없다. 빗돌이 세워진 때가 1788년 이전인가 보다.

'시총(詩塚)'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 무덤은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장남 정의번의 묘소이다. 경주성 탈환 전투 때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세 번이나 적진에 뛰어들었던 정의번은 끝내 전사했고, 끝내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 정세아는 벗과 지인들이 보내온 만사(輓詞)와 제문을 아들이 입던 옷과 함께 관 속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정의번의 묘를 시총이라 불렀고, 현재 묘소 왼쪽 옆에 세워져 있는 빗돌에도 '시총'이라는 묘비명이 표시되어 있다.
 '시총(詩塚)'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 무덤은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장남 정의번의 묘소이다. 경주성 탈환 전투 때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세 번이나 적진에 뛰어들었던 정의번은 끝내 전사했고, 끝내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 정세아는 벗과 지인들이 보내온 만사(輓詞)와 제문을 아들이 입던 옷과 함께 관 속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정의번의 묘를 시총이라 불렀고, 현재 묘소 왼쪽 옆에 세워져 있는 빗돌에도 '시총'이라는 묘비명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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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에 잠겨 채 주변을 살피는데, 장남 정의번(鄭宜藩, 1560∼1592)의 묘소 앞 빗돌에 새겨져 있는 보기 드문 두 글자가 눈을 번쩍 자극한다. 시총(詩塚)! 시의 무덤이라니? '이름 없는'이 아니라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을 기려 만들어진 금산 칠백의총, 남원 만인의총, 봉화 육백의총 등 의총(義塚)은 들어보았어도 시총은 그저 생소할 뿐이다. 

게다가 정의번은 아버지보다 20년이나 전에 죽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이 잘 갈파해주는 것처럼, 자신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는 일은 부모에게 엄청난 고통이다. 그런데도 정의번의 묘비에는 좋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총'을, 그것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시총'이라는 명예가 부여되어 있다.

아버지보다 20년 일찍 죽은 아들, 사람들은 왜 칭찬했나

영천 의병대장 정세아와 그의 아들 정의번 등 오천 정씨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아름다운 솔밭이 조성되어 있다. 여름철에 가면 드물지 않게 텐트까지 치고 숙박을 하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을 지경이다. 솔밭이 끝나면 광활한 묘역이 펼쳐지는데, 가장 멀리 끝까지 가야 정세아 의병장의 묘소에 닿을 수 있다.
 영천 의병대장 정세아와 그의 아들 정의번 등 오천 정씨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아름다운 솔밭이 조성되어 있다. 여름철에 가면 드물지 않게 텐트까지 치고 숙박을 하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을 지경이다. 솔밭이 끝나면 광활한 묘역이 펼쳐지는데, 가장 멀리 끝까지 가야 정세아 의병장의 묘소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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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정세아는 1612년에 별세했다. 장남 의번은 그보다 20년이나 전인 1592년에 타계했다. 아버지보다 그렇게나 먼저 이승을 버린 정의번에게 세상은 왜 이토록 호의적인 것일까? 의번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바로 그 해에 죽었다는 사실이 뭔가 암시를 해준다. 그래서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비녕자 이야기부터 읽어본다.

진덕여왕 원년(647),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다. 김유신이 1만 군사를 이끌고 대적하지만 백제군이 워낙 정예군이었던 까닭에 고전을 면하지 못한다. 김유신은 비녕자가 스스로 몸을 던져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각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부른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歲寒然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知松栢之後彫). 지금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워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

비녕자가 두 번 절하고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저에게 부탁하시니 장군이야말로 비녕자를 알아주는 벗知己입니다.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

비녕자가 자신의 종 합절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知己를 위해 죽으려 한다. 아들 거진이 비록 어리나 뜻이 장해 반드시 나를 따라 죽으려 들 것이다. 부자가 함께 죽으면 집안 사람들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갈 것인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해서 돌아가 거진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말이 끝나자 비녕자는 말을 달려 백제군 안으로 돌진한다. 당연히, 비녕자는 백제군 여럿을 죽이지만 결국 장렬하게 전사한다. 거진이 이 광경을 보고 뛰어나가려 하자 합절이 말린다.

"대인께서 저에게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부인마님을 위로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머님의 자애를 저버린다면 효자라 할 수 없습니다."

합절은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는다. 거진이 부르짖는다.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그것은 어찌 효자라 하겠느냐!"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묘소. 강호정 등 정세아 가문 고택들의 정면 앞, 솔숲을 지나 공원묘지처럼 꾸며진 잔디밭을 끝까지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묘소. 강호정 등 정세아 가문 고택들의 정면 앞, 솔숲을 지나 공원묘지처럼 꾸며진 잔디밭을 끝까지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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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합절이 말고삐를 놓지 않자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후 적진으로 돌진,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윽고 합절이 울면서 말한다.

"상전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합절도 마침내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 군사들이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아무리 정예군이라 한들 사기에서 한 수 아래로 꺾인 백제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신라군은 나아간 곳마다 백제군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키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벤다.

전투가 끝난 후 김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자기의 옷으로 덮어주며 슬프게 운다. 대왕도 눈물을 흘리며 예를 갖추어 산에 합장하고, 그 처자와 9족에게 특별한 상을 내린다.

엄진성은 논문 <임진왜란 당시 영천 지역의 유림과 학맥>에서 '정몽주의 순절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죽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영천 복성(複城, 성을 되찾음) 전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죽음을 각오한 결사의 항쟁으로 나타났다'면서 '그 가운데 가장 기억될 만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세아의 첫째 아들 정의번의 전사였다'라고 말한다. 정의번의 최후는 어떤 면모였을까?

정몽주의 순절 잇는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

1592년 8월 21일, 경주성 수복 전투가 한창 벌어졌다. 한 달여 전에 영천성을 되찾아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아군은 치밀한 작전 수립과 전투 준비도 없이 이른 새벽 경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했고, 정오가 될 무렵부터는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이내 성을 함락할 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적들의 노련한 전략이었다.

적은 이미 어젯밤에 소금강산, 향교, 모량 등지에 군사를 매복해둔 채 아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왜군들이 경주성을 향해 돌진해 오자 금세 아군은 도리어 적들에게 포위된 꼴에 빠졌다. 성 안에 있던 적군들도 북문을 열고 나와 아군을 공격했다. 앞뒤로 적군과 싸워야 하는 아군은 큰 곤경에 빠졌다.

영천선 수복 때 큰 공을 세워 경상좌방어사로 임명되었던 권응수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고, 경주판관 박의장이 적의 공격에 당하여 어깨에 부상을 입을 지경이었으니, 당시 아군의 불리한 전황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때는 이미 전투를 총지휘하던 경상좌병사 박진도 안강 쪽으로 철수한 뒤였다.

관군과 상당수 의병 부대들이 후퇴한 중에 서문 일원에서만 전투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이곳의 아군은 대개 영천 지역 의병들과 울산 영일동 출신 의병들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끝까지 혈전의 현장을 지키고 있던 대장이 정세아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정의번에게 달려와 '의병장이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의번은 황급히 말을 들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을 에워싼 적들의 칼날이 날카로웠지만 그는 아버지를 구출해내려는 일념 하나로 안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워낙 혼전 중이라 아버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의번은 일단 물러났다.

오회공 종택(五懷公宗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2호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아들 정수빈이 1620년(광해군 12) 경에 설립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건물이다.
 오회공 종택(五懷公宗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2호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아들 정수빈이 1620년(광해군 12) 경에 설립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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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 진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의번은 또 다시 적진으로 돌진했다. 이번에도 의번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 또 다시 의번은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며 말고삐를 잡았다. 줄곧 뒤따르고 있던 종 억수가 이번에도 그의 옆에 섰다. 의번이 억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패했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듯하다. 하지만 내가 어찌 멈출 수 있겠느냐. 비록 아버지를 구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원수는 갚아야 한다. 나는 도적들의 손에 죽겠지만 너라도 살아서 집안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돌아가거라."

억수가 말했다.

"소인이 일찍 듣기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의 그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찌 소인이 지금 주인을 버리고 홀로 살아서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리 의번이 말려도 억수는 듣지 않았다. 결국 의번이 달려나가자 종 억수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화살이 떨어지고 기력이 다해 적의 칼날에 여러 번 다친 끝에 마침내 사로잡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항복을 권하는 적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준엄히 그들을 꾸짖었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 찾아 세 번 적진에 뛰어든 아들, 마침내 전사

하천재(夏泉齋) 뒤로 보이는 추원당(追遠堂) 건물이다. 추원당 왼쪽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정세아 신도비가 있다. 즉 하천재 일원의 묘재(墓齋)는 오천 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講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들이다.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인조 15)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현재 전하는 건물은 창건 당시의 것은 아니며,후대에 중건된 것들이다.
 하천재(夏泉齋) 뒤로 보이는 추원당(追遠堂) 건물이다. 추원당 왼쪽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정세아 신도비가 있다. 즉 하천재 일원의 묘재(墓齋)는 오천 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講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들이다.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인조 15)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현재 전하는 건물은 창건 당시의 것은 아니며,후대에 중건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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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의번과 종 억수가 종내 만나지 못했지만, 정세아 의병장은 만신창이 몸이 되었어도 다행히 싸움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장 앞에는 장남 의번의 전사 소식이 쫓아왔다. 전투가 끝난 뒤 의병장은 의번의 행방불명 사실을 알고 스스로 싸움터를 누비고, 군사들을 풀어 의번의 시신을 찾게 했지만, 아들이 자신을 만나지 못했듯 그 또한 자식을 만날 수 없었다.

정세아는 시신 없는 아들의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보내온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글)과 제문(祭文, 제사를 지내는 글)을 아들의 옷과 함께 관 안에 넣어 장례를 치렀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은 아들 의번의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불렀다.

정세아와 정의번의 다음 세대 영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시조 수록 문헌인 <병와집>의 저자 이형상(李衡祥, 1653~1733)도 뒷날 시를 지어 정의번을 칭송했다.

人生世爲丈夫難
세상 살아가며 장부 되기 어렵고
丈夫而爲有識難
장부 되더라도 유식하기 어렵다
有識而爲孝也難
유식하더라도 효도하기 어렵고
孝而至於死尤難
효도하더라도 죽음에까지 이르기는 어렵다
死全忠者難之難
죽음으로써 온전히 충성하는 것은 어려움 중의 어려움이지만
全而無媿難又難
온전하면서도 부끄럽지 않도록 함은 어렵고 또 어렵도다
정의번을 기려 정조가 1784년(정조 8)에 세운 충효정려각으로, 환구서원 강당 뒤 사당 왼쪽에 있다.
 정의번을 기려 정조가 1784년(정조 8)에 세운 충효정려각으로, 환구서원 강당 뒤 사당 왼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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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아 의병장과 그의 아들 정의번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또한 가장 교훈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학자는 이형석이다.

이형석은 <임진 전란사>에서 '경주성 전투에서 정의번이 세 번씩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아버지의 위급을 구한 다음 자신은 적과 용전분투 끝에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니 이는 충효를 한몸에 양전(兩全, 둘 다 이룸)한 우리 민족사의 자랑거리라 하겠으나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면서 '일본에서는 (천황의 명을 받아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역적 토벌에 나섰다가 결국은 패전 후 자결하게 되는) 남목정성(楠木正成, 1294~1336)이 아들 정행(正行)과 앵정역(櫻井驛)에서 생이별을 한 것이 커다란 미담가화(美談佳話)가 되어 시가(詩歌)로 널리 애송되고 연극과 연예에도 크게 떠돌고 있는 터인데 이와 같은 우리의 자랑이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야 어디에서 충신효자의 덕행을 추존(追尊, 따르고 모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68(환구길 142)에 정세아의 위패를 모신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경상북도 민속자료 87)가 있다. 사당 왼쪽 옆에는 정의번을 기려 1784년(정조 8)에 세워진 충효정려각도 있다. 근래에는 환구서원도 복원해 두었다. 그래도 나는 '정세아 유적을 대표할 수 있는 곳은 그의 묘소와 아들 정의번의 시총이 있고, 그가 직접 지은 강호정이 있는 영천시 포은로 1605 일대'라고 생각한다.

'강호정' 안내 이정표, '정세아 유적'으로 바꾸자

따라서 나는 도로변 이정표가 '강호정'보다는 '정세아 유적'이나 '정세아 유적과 시총' 또는 '정세아 묘소와 시총'을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충북 옥천의 '조헌 묘소 (종합 안내)'가 잘 대변해준다. '조헌 묘소' 일원은 충북 기념물 14호(묘소), 유형문화재 183호(신도비), 문화재자료 75호(영모재), 그리고 사당인 표충사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조헌'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세우고 있다.

그에 비해 '정세아 유적'은 유형문화재 71호(강호정), 유형문화재 72호(오회공 종택), 유형문화재 73호(하천재 및 비각), 유형문화재 74호(사의당), 유형문화재 75호(삼휴정), 유형문화재 76호(오회당)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유산의 숫자와 등급도 높다. 뿐만 아니라 지금 미지정 상태로 있는 정세아 묘소와 시총도 분명한 문화재이므로, 전체를 아울러 '정세아 유적' 또는 '정세아 묘소와 시총'으로 정의하면 좋을 것이다. 이형석의 갈파를 다시 인용하자면, '우리의 자랑이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야 어디에서 충신효자의 덕행을 추존할 수 있겠는가!'

영천시 환구길 142에 복원되어 있는 환구서원 강당. 정세아의 후손들이 강학을 한 곳이다.
 영천시 환구길 142에 복원되어 있는 환구서원 강당. 정세아의 후손들이 강학을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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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아 유적 답사하기

도로변에 주차장이 있다. 차에서 내린 다음 정세아 의병장의 묘소와 그의 아들 정의번의 시총부터 참배하는 것이 좋다. 주차장 왼쪽이 강호정 등 유형문화재들로 이루어진 고가촌이고, 오른쪽 솔숲을 지나면 정씨 세장지世葬地(대대로 묘소를 쓰는 곳)가 펼쳐지고, 그곳의 가장 끝에 두 분의 묘소가 있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돌아나와 한옥 밀집지로 들어선다. 유형문화재의 번호 순으로 말하면 71호 강호정, 72호 오회공 종택,  73호 하천재 및 신도비, 74호 사의당, 75호 삼휴정, 76호 오회당이지만 배치되어 있는 순서대로 답사하면 강호정, 하천재와 신도비,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 순서가 된다. 아래는 현지 안내판의 내용이다.

강호정(江湖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1호) : 이 건물은 1599년(선조 32)에 의병장 정세아가 임진왜란 이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紫湖) 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래간(兩來間)은 방이고 중앙칸과 전면 툇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기둥은 원주(圓柱) 되어 있는 익공계(翼工系)의 삼량(三樑)집이다. 1974년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하천재(夏泉齋) 부(附) 비각(碑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3호) : 이 묘재(墓齋)는 오천 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講公)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해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인조 15) 창건하였다고 한다. 강의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江湖亭舍)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현재의 건물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 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 신도비각 등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 있다.

오회공 종택(五懷公宗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2호) : 이 가옥은 의병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아들인 수빈이 그의 셋째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1620년(광해군 12) 경에 설립한 것이며, 묘우(廟宇)는 1655년(효종 6)에 세워졌는데 영천댐 건설 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주택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가적지붕이고,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오회당(五懷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6호) : 오회당 정석현(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해 1727년(영조 3)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하였다. 영천댐 건설 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소박하게 짜인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사의당(四宜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4호) : 1726년(영조 2) 정중호(鄭重鎬), 중기(重岐), 중범(重範), 중락(重洛)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삼귀리에 건립했던 집인데 세월이 흘러 쇠락해지자 1802년(순조 2) 자양면 용산리로 옮겨 지었다. 건물 앞 안내판에는 '영천댐 건설로 1977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 복원하였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삼휴정(三休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5호) : 정세아의 손자인 삼휴 정호신(鄭好信, 1605∼1649)이 학문 연구를 위해 1635년(인조 13)에 건립했다. 삼휴정은 앞면에만 난간을 설치하는 등 소박한 구조를 보여준다. 정호신은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형을 부모처럼 섬기고 스승을 예우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삼휴(三休)'라는 시를 지었는데 거기에서 삼휴당이라는 당호(堂號)가 생겨났다. 1977년 3월 영천댐 건설로 말미암아 본래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태그:#정세아, #정의번, #강호정, #임진왜란, #시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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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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