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1일 미영이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장례식장. 천주교 미사가 진행 중이다.
 21일 미영이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장례식장. 천주교 미사가 진행 중이다.
ⓒ 송하성

관련사진보기


꽃다운 나이 22살, 미영이(가명)는 마지막 두 해를 한국에서 진짜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 두 해를 미영이는 행복했다고 말할까?

2016년 10월 21일 저녁 경기도의 어느 장례식장에 미영이의 빈소가 차려졌다. 곧 이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필리핀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인 엄마가 조문객을 맞았다. 마지막 두 해 동안 미영이를 도운 성당 신부님과 수녀님들도 자리했다. 크게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조용히 흐느껴 울 뿐이다.

미영이 가족의 해체

미영이는 1995년에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 엄마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빠가 술만 마시면 가족에게 폭언과 폭행을 해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녀야 했던 엄마는 1999년에 4살인 미영이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한국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미영이는 필리핀에서 생활하며 한국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미영이가 기억하는 한국은 없다. 그렇게 필리핀에서 자라 20살이 된 미영이가 2014년 8월, 막내 동생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필리핀에서 한국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거의 없어요. 그저 엄마가 한국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해 준 것이 다예요. 하지만 늘 한국에 가는 꿈을 꿨어요. 왜냐하면 저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이에요."

2015년 2월 17일 기자와 인터뷰를 할 당시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으로 태어난 미영이는 한국말도 하지 못했고 한국 문화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는 한국인이에요. 한국에서 살며 한국을 경험하고 싶어요."

스무살 미영이의 불행

2015년 2월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미영이, 왼쪽은 통역을 도운 샌디 신부.
 2015년 2월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미영이, 왼쪽은 통역을 도운 샌디 신부.
ⓒ 송하성

관련사진보기


한국에 돌아온 미영이는 곧 냉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변변한 집도 없이 회사 기숙사를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엄마를 따라 미영이도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월세 30만원, 4평 남짓한 방에서 엄마와 미영이, 동생이 함께 생활했다. 낡고 오래된 냉장고도 한 달에 1만 원을 주고 빌려 쓰는 것일 만큼 미영이네는 사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미영이도 엄마가 다니는 공장에서 함께 일을 했다. 여동생도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일을 했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엄마는 한 달에 110만 원, 미영이는 80만 원, 여동생은 30만 원이었다.

엄마는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외모가 다르고 한국말이 완전하지 못해서 급여가 낮다. 미영이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경험이 없어서 급여가 낮다. 여동생은 나이도 어린데 학력도 중졸밖에 안돼서 급여가 낮다.

그래도 이렇게 세 식구가 벌면 형편이 나아지리라 생각했던 가족은 2014년 10월 나쁜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허벅지가 계속 아픈 거예요. 며칠 참다 병원에 갔는데 골육종(뼈암)이래요"

스무살 나이에 꿈에 그리던 한국에서 미영이가 자신에 대해 처음 들은 이야기는 암이다. 미영이는 공장을 그만 두고 기숙사에서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항암치료를 하는데 엄마와 여동생이 도와줄 수 없으니 혼자 병원에 갔다 왔다. 마지막 2년은 이재웅 신부가 미영이의 통원치료를 도왔다.

미영이의 네 번의 눈물

생전 인터뷰 당시 미영이는 모두 4번 울었다. 엄마와 아빠, 가족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처절한 슬픔이 내비쳤다. 너무나 깊고 슬프게 울어서 인터뷰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도 그의 사정을 알아야겠기에 끈질기게 물었다. 나중엔 곤혹스러워졌다. 이런 질문이 미영이에게 무슨 소용일까. 기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던 질문을 2년이 지나서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 곧 명절인데 가족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미영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댁이 어딘지 아는데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찾아가면 아빠를 만날 테고 그럼 자신들이 어디 사는지 들통나 괴롭힘을 당할게 뻔하단다. 미영이를 한참 진정시킨 뒤 이번에는 아빠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미영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6년 전 제가 필리핀에 있을 때 아빠가 필리핀에 온 적이 있어요. 외할머니집에서 한 달을 같이 생활했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어요.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한마디도 못했어요."

다시 미영이를 진정시키는데 한참이 걸렸다. 이번에는 엄마에 대해 물었다. 미영이가 또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아빠가 찾아오면 돈 달라고 요구하고 안 주면 엄마를 때려요. 엄마가 너무 고생을 해서 제가 돕고 싶어요. 하지만 암에 걸렸어요."

미영이의 눈물이 다시 기자의 말문을 막았다. 화제를 돌려 미영이의 꿈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미영이가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저의 꿈은 가족이 다 함께 사는 거예요. 원래 필리핀에 있는 남동생도 한국에 오려고 했는데 제가 암에 걸리는 바람에 못 오게 됐어요. 아빠도 같이 살고 싶어요. 술 안 마시는 좋은 아빠와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요."

미영이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달래는 것도 못하고 기자는 그저 기다려야 했다.

미영이의 마지막 두 해

장례식장에서 만난 김승태 대위와 이재웅 신부
 장례식장에서 만난 김승태 대위와 이재웅 신부
ⓒ 송하성

관련사진보기


투병생활을 하던 미영이는 가끔 필리핀 커뮤니티 사람들과 다문화 행사에 나타났다. 긴 가발을 쓰고 20살 여느 여자아이처럼 예쁜 모습을 한 미영이는 올해 6월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가족은 미영이의 남은 시간을 준비하며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재웅 신부와 현역 육군 통역장교인 김승태 대위가 동행했다. 이 신부와 김 대위는 필리핀 따갈로그어를 사용하는 미영이와 미영이 가족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한국어와 영어는 기초적인 대화만 가능한 미영이네는 병원 의사 선생님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필리핀에서 10년을 생활한 김 대위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로 또 직접 만나서 미영이 가족의 통역을 도왔다.

미영이는 지난 여행에서 케이블카도 타고 보트도 탔다. 좋아하는 바다도 봤다. 밤에는 펜션에서 필리핀 라디오를 들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미영이는 무척 즐거워했어요. 미영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이었을 거예요."

자신이 죽을 것을 안 미영이는 그래도 자신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 한국을 사랑했다. 미영이는 병상에 누워서도 틈만 나면 김 대위와 한국어를 공부했다.

"미영이는 토픽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했어요. 6월에는 토픽 문제집을 사달라고 부탁하더라구요. 미영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 한국을 느끼고 한국을 체험하고 싶어 했어요. 6월 가족여행은 그래서 미영이에게 특별한 여행이었어요."

가족 여행을 끝으로 미영이는 거동을 하지 못했고 지난 9월 입원해 다시 나오지 못했다.
미영이가 죽기 전 미영이 엄마와 동생들은 미영이와 포옹하고 귀에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던 미영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억'이라고 마지막 말을 했다.

"가족의 사랑한다는 말에 미영이가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 거예요. '억' 소리는 미영이의 마지막 사랑한다는 말이었어요."

떠나야 하는 한국 아이들

한국어능력시험 4급을 준비하던 한국인 미영이는 그렇게 떠나갔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과 과제를 던졌다.

바로 가족의 해체로 엄마의 나라로 떠나야 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문제다. 기자는 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전국다문화도시협의회 해외연수단을 동행취재했다.

베트남 껀터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으로 결혼이주를 했다가 돌아온 베트남 여성이 데리고 온 한국 국적 아이들이 100명 가량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구 130만 명의 껀터시에 한국 아이들이 100명이 있다면 인구 9800만 명인 베트남 전체에는 도대체 몇 명의 한국 아이들이 있다는 말인가.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는 한국 아이들은 한국인으로서 누려야 할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 교육, 의료, 사회복지 모든 측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인인 이 아이들은 20살이 되면 미영이처럼 한국에 돌아올 것이다. 기자는 생전 미영이에게 이런 현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옳지 않아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면 한국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저와 같은 아이들이 계속 한국에서 살도록 도와줄 순 없나요?"

미영이는 행복했을까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미영이 빈소에 보낸 조기. 남 지사는 미영이 소식을 전해듣고 "참 애석하고 슬픈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2016.10.22).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미영이 빈소에 보낸 조기. 남 지사는 미영이 소식을 전해듣고 "참 애석하고 슬픈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2016.10.22).
ⓒ 송하성

관련사진보기


미영이는 남은 2년을 많은 사람의 보살핌과 배려 속에서 보냈다. 우선 좁은 공장 기숙사에서 나와 좀 더 넓은 외국인노동자 쉼터에서 생활하게 됐고 이후에 전셋집을 얻어 나와 살게 됐다. 천주교 수원교구가 도왔다. 항암치료는 성빈센트병원에서 받았는데 병원비를 대폭 할인받았다.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본인부담금은 서울 '바보회'라는 봉사단체에서 전액 후원했다.

미영이 엄마의 회사 사장님은 미영이가 너무 아프면 미영이 엄마가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은 미영이가 입원한 병원에 와서 함께 목놓아 울기도 했다. 이재웅 신부와 김승태 대위가 가까운 곳에서 가족을 도운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아마도 미영이의 스물 두 해 삶에서 마지막 2년은 꽤 행복했을 것이다. 이 신부에게 미영이를 만나고 떠나보낸 느낌을 물었다.

"우린 다 같이 와서 친구가 됐어요. 슬픈 기억은 하나도 없어요. 미영이가 죽기 하루 전에는 제가 병실을 나오며 손을 흔들었고 미영이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줬어요. 하지만 미영이가 죽던 날에는 저만 손을 흔들었을 뿐이에요."

2015년 2월 17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스무살 꽃다운 미영이는 자신의 슬픔과 불행,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하염없이 눈물로 쏟아냈다. 이제 그 눈물은 말랐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기다문화뉴스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태그:#다문화가정, #필리핀, #암, #공장, #이주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열심히 뛰어다녀도 어려운 바른 언론의 길...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이 정도면 마약, 한국은 잠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