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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영병이 속출하다

나는 실무부대 배치 후 줄곧 중대, 소대 등 소규모 단위부대에서만 근무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1971년 가을, 연대 교체라는 대규모 부대이동 이후로는 대대단위 부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새 대대장도 바뀌었다. 안대수 중령이 떠나고 김춘배 중령이 부임해 왔다.

그분은 안 중령과는 달리 매우 자상하고 젠틀한 분이었다. 부대 이동 후, 나는 다시 원래부대인 3중대 화기소대장으로 보직 변경이 됐다. 그동안 30~18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700여 명의 대규모 부대에서 복무하게 되자 근무 여건이 매우 열악해졌다.

이전 부대는 경계 중심의 부대였는데, 부대 교체 이후에는 우리 부대(곧 전체 73연대)는 사단 예비 연대인 교육 중심부대로 바뀌자 심신이 무척 고달팠다. 매일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은 자대 교육으로 대대연병장에서 중대별로 PRI(사격술예비훈련), 독도법, 각개전투, 사단중심교육 사항인 태권도 등의 교육이 시계추처럼 반복됐다.

이런 교육을 하는 장교들도 힘들었지만, 날마다 훈련소나 기성부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배운 바 있는 병들도 매우 지겨웠던 모양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부대 이동 후 탈영병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대대장은 보다 못해 연병장에 전 대대장병을 모아놓고 탈영방지 교육을 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도 또 두 명이나 부대를 탈영해, 전 부대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뜻밖의 낭보를 받다

발랑리 1CAP 소대장시절 땅굴막사 앞에서 기자
 발랑리 1CAP 소대장시절 땅굴막사 앞에서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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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적당히 바쁘거나 자기가 하는 일이 뭔가 보람 있는 일이어야 근무에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별로 흥미도 없는, 지겨운 똑같은 교육이 날마다 계속되니까 교육자나 피교육자 모두 몸부림이 나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러시아 정치범수용소 죄수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수용소 측에서 죄수들을 가장 잔인하고 악랄하게 벌주는 방법은 날마다 무의미한 일을 연속적으로 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1주일간은 벽돌을 쌓게 한 다음, 다음 1주일은 그 쌓은 벽돌을 하나하나 허물어 벽돌 낱장을 모두 원위치에 돌려놓게 한 다음, 다음 주에는 또 그런 일을 똑같이 반복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1년 12개월 반복하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그런 정치범수용소의 죄수들을 다루는 이야기였다. 

그런 따분한 부대생활 가운데 뜻밖에도 에티오피아 하이레 세라세 황제가 1968년에 이어 2차 방한할 예정이었다. 그때 그 황제가 우리 26사단을 방문한다고 해 우리 연대가 영접 부대로 차출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 대대 병력은 날마다 사단연병장으로 행군해 열병 및 분열 연습을 했다. 그 연습으로 한동안 자대 교육을 하지 않게 되자 살만 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황제의 부대 방문은 전격 취소됐고, 대신 26사단 출신인 현아무개 장성 전역식만 거행했다.

다시 그 행사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온 뒤 자대에서 교관으로 따분하게 지내던 가운데, 그해 11월 하순에 나에게 낭보가 날아왔다. 우리 대대 1CAP 소대가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현암초등학교 앞에 주둔 중인 사단 수색중대에 배속 파견케 된바, 대대장이 나를 다시 1CAP장으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중대장의 전한 바, 대대장은 내가 1CAP 소대장 전력도 있는 데다가, 평소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대대 내 여러 소대장 가운데 발탁했다는 것이다.

발랑리 땅굴 막사 앞에서 소대원들과 함게(1970. 12. 뒷열 왼쪽에서 두 번째가 기자)
 발랑리 땅굴 막사 앞에서 소대원들과 함게(1970. 12. 뒷열 왼쪽에서 두 번째가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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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과 같은 막사

나는 30여 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근무지로 가보니 경기도 파주군(현재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금병산 산중턱 땅굴막사 부대였다. 그곳은 휴전선 철책을 뚫은 적 공비 및 무장 간첩들의 예상 침투로였다. 아마도 이전에 체포된 간첩들이 이동로였다고 실토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지막지하게도 산기슭에 땅굴을 판 막사로, 대낮에도 램프 등을 켜야 했던 흡사 탄광 갱도의 막장과 같았다. 우리 소대가 그곳에 이르자 그동안 주둔했던 3CAP 소대원들은 짐을 꾸려 하산했다.  

땅굴 막사는 3개 동으로 가장 큰 곳은 소대 막사였고, 바로 옆 땅굴은 주부식 창고로 썼고, 조금 떨어진 자그마한 땅굴막사는 소대장 BOQ(숙소)였다. 취사장은 하늘만 조금 가렸을 뿐 산비탈 노지 그대로였다. 나는 언저리를 둘러볼수록 여건이 참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막사 정리 및 청소를 했다.

이곳에서 취사는 소대원들이 날마다 산에서 나무를 해 화목으로 주·부식을 지어야 했다. 그런 탓인지 취사용 기름 대신에 이따금 램프용으로 석유를 한 통씩 보내줬다. 소대 내무반은 맨 바닥에 짚을 깔고 지냈던 모양으로 먼지 공해가 매우 심했다. 다행히 내무반 안에는 드럼통으로 만든 화목 난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무반장과 분대장에게 맨 바닥에 짚을 거둬내고 대신 멍석을 짜서 깔게 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곳에서는 3개 초소를 운영했다. 세 곳 다 적 예상 침투로였다. 1개 초소당 4명씩으로 각 초소에서는 2인 2교대를 하게 했다.

1CAP 소대원들과 석 달 만에 다시 만나자 그새 얼굴들이 다소 바꿨다. 고참들은 전역을 했고, 새로운 얼굴들이 예닐곱 명 보였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은 매우 낯이 익었다. 곧 전임 대대장 운전병으로 영천 출신의 문 상병과 대대장 당번병인 화천 출신 김 병장이었다. 다른 네 명도 다소 안면이 있었는데, 그들은 연대 인사과에서 밀려난 선임들이었고, 두어 명은 신병이었다.

발랑리부대 근무시절 막사 앞에서 소대원과 함께(1970. 12. 뒷열 오른쪽 네번째 기자).
 발랑리부대 근무시절 막사 앞에서 소대원과 함께(1970. 12. 뒷열 오른쪽 네번째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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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 당번병에서 밀려난 병사

그런데 대대장 운전병은 이내 체념을 하고 소대생활에 순종하는데, 대대장 당번병이었던 김 병장은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그동안 무서운 대대장 밑에서 호가호위하며 지내다가 산중 땅굴 막사에서 잠복근무를 하자니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그는 밤샘 잠복근무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은 듯, 내게 아프다고 말한 뒤 내무반 한쪽 구석에서 누워 지냈다.

아침 점호 때도 그는 마지못해 나온 뒤 또 아픈 척했다. 나는 엄살 부리지 말라고, 여기가 너희 집인 줄 아느냐고, 혼내 주려다가 꾹 참았다. 아예 다음 날부터는 내가 먼저 열외를 시켜줬다. 일주일 후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빌었다.  

"소대장님! 그동안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사실은 제가 꾀병을 부렸는데도 소대장님은 저를 꾸짖지 않기에…. 저 이제 근무 조에 넣어주십시오. 내무반에서 계속 지내니까 소대원들에게 미안해서 더 이상 누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알았다. 내일부터 근무 조에 편성하겠다."

그는 그날 이후 다른 어느 소대원 못지 않게 근무도 성실히 서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대대장 당번병 시절 자기가 대대장인 양 부대 내에서 안하무인격으로 지냈다. 대대장이 전출을 가자 그는 대대장 당번병에서 밀려났다. 그러자 쥐꼬리만 한 권력에서 밀려난 박탈감에 한동안 누구에겐가 반항하고 싶었다. 그래서 몸살을 핑계로 태업했는데도 내가 받아주지 않자(자기 말로는 나에게 덤비고 싶었는데) 마침내 자기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뿐 아니라, 연대 인사과에서 밀려나온 소대원들도 대동소이했다. 그들 가운데는 부모가 야권 성향인 이들도 있었는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벽지 CAP소대로 밀려났다는 말도 돌았다. 그들도 한동안 나에게 무척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곧 오해가 풀린 듯, 서로 마음을 터놓고 헤어질 때까지 편히 지냈다.

멍석을 업어오다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우리 소대의 근무 여건은 최악이지만, 대한민국 군대에서 가장 민주적이며 편하고 깨끗한 내무생활이 되도록 개선해주겠다고. 그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서 소대 기재계에게 허용되는 대로 1주일에 한두 번씩 쌀로만 밥을 짓게 하거나 누룩을 구해다가 소대원들이 자체적으로 술을 담가먹게도 했다.

내가 멍석을 짜라고 지시한 지 일주일쯤 지난 뒤 소대원 막사인 내무반으로 가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동안 소대원들이 멍석을 짠다고 법석을 떨지 않았는데도 그새 멍석이 깔려 있기에 내무반장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소대장님은 그냥 모른 체 하세요."

그러면서 내무반장은 멍석을 내무반 바닥에 깔게 된 이야기를 했다. 내 지시를 받은 다음 날 아침 소대원 셋이 마을로 짚을 얻으러 갔지만 미처 열 단도 구하지 못했단다. 이미 추수가 끝난 지 오래된 데다가, 남은 짚은 소먹이용이라고 짚을 더 주지 않더라고 했다. 마침 돌아오려는데 어느 한 집 뒤꼍에 멍석이 네 개나 가로로 묶여 있기에, 그날 밤 그 가운데 하나를 업어왔다고 했다.  

[관련 기사] 물건 훔친 부대, 양심적이라고 칭찬받다

사실 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머슴들이 농한기에 멍석 짜는 것을 구경한 바, 여간 공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무반장의 말을 한귀로 흘려들은 채 더 이상 모른 척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발랑리 막사로 위문온 군목과 함께(1970. 12. 왼쪽에서 두 번째 기자, 세 번째 군목)
 크리스마스 전날 발랑리 막사로 위문온 군목과 함께(1970. 12. 왼쪽에서 두 번째 기자, 세 번째 군목)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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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부대에서 새해를 맞다

곧 연말이 다가오자 크리스마스 전날 연대 군목이 위문대를 가지고 위문을 왔다. 말인즉 연대에서 가장 먼 부대인 데다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하기에 왔다고 했다. 군목이 간 다음 위문대를 뜯자 누군가 손을 탄 듯 보여 기분이 몹시 씁쓸했다. 아마도 상급부대원 탓인 모양이었다.

1971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부녀회에서 위문을 왔다. 이를 주관하는 수색중대장의 말인즉, 위문봉사단 가운데 가장 젊은 광적면사무소 여성 직원을 우리 소대로 보내니 박 중위(1970년 6월에 중위로 진급했음)가 잘 사귀어 보라는 친절한 당부까지 했다.

광적면 부녀회 회원들은 떡국용 떡과 쇠고기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산중턱 부대에까지 올라와 취사장에서 떡국을 끓여주고 면사무소 여성 직원은 기타를 메고 와 내무반에서 소대원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수색중대장의 선심과는 달리, 나는 그 면직원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족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 소대원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민간인 출입이 없었던 내무반에 치마를 두른 여인들의 출현은 삭막한 내무반 분위를 금세 화기 넘치게 만들었다. 소대원들은 면 여성 직원에게 사인 공세를 펼치는 등, 주객전도로 그 직원은 존귀하게 대접받았다.

그렇게 산중부대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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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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