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한국시각)에 진행된 일정을 끝으로 2016-2017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3차전이 막을 내렸다. 경기를 치룬 32개의 클럽은 경기 결과의 희비를 접어두고 남은 절반을 노려봐야 할 것이다.

펩 과르디올라 더비를 치룬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맨체스터 시티에게 4-0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FC바젤을 3-0으로 제압한 파리 생제르맹은 메수트 외질이 생애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0 대승을 거둔 아스날이 야속하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 방금 언급한 클럽들 중 바르셀로나와 바젤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딘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 한때 바르셀로나를 바젤과 유사한 '바셀'이라 불렀다는 어쭙잖은 비교가 아니다. 2010년 이후 바르셀로나 유니폼이 가로 줄무늬를 강조한 디자인으로 바뀌며 비교가 어려워졌지만, 그 이전 유니폼을 보면 색상이나 선 배열이 바젤의 유니폼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유니폼에 숨겨진 비밀

 바르셀로나 초기 유니폼.

바르셀로나 초기 유니폼. ⓒ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바젤이 유명 클럽인 바르셀로나를 따라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두 클럽 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다만 사업가이자 만능 스포츠인이었던 한 스위스인이 두 클럽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교두보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인 1898년, 21살 한스 감퍼(Hans Gamper)는 바르셀로나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이 지역에 축구 클럽을 창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육상, 사이클, 테니스, 럭비 등 운동에 뛰어난 재능과 열성을 보였던 감퍼는 축구에 몸 담은지 2년만인 18살에 스위스 엑셀시오르의 주장이 되었다. 이듬해 팀을 떠나 공동 창단자로 FC취리히 창단에 힘썼고, 같은 시기 FC바젤에서 주장직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스포츠는 프로개념이 없었고, 스포츠 활동을 통해 돈을 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설탕 무역일 하던 삼촌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로 넘어가려던 감퍼는 예정에 없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물론 아프리카로 떠나는 일은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완전히 매료된 감퍼는 자신의 이름이었던 한스를 카탈루냐인들에게 친숙한 '조안(Joan)'으로 바꾸었고, 그렇게 한스 감퍼는 바르셀로나 역사에 길이 남을 '조안 감페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9년 10월 조안 감페르가 <로스 데포르테스>에 기고한 축구 클럽 모집 광고는 11월 29일 '힘나시오 솔레'에 모인 사람들의 긍정적인 동의 덕에 역사적인 FC바르셀로나 창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스페인 리그(프리메라리가)는 없었지만, 카탈루냐 컵대회와 스페인 컵대회에 참가하며 클럽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창단과 동시에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한 감페르는 1899년부터 1908년 바르셀로나 회장 당선 전까지 51번의 공식전에 나서서 120골을 넣는 기염을 토했다.

그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는 1901-02시즌 마야컵 우승, 1902-03시즌 바르셀로나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덕분에 카탈루냐에 FC바르셀로나와 조안 감페르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때 감페르가 자신이 몸담았던 FC바젤의 유니폼을 차용해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마누엘 토마스 'FC바르셀로나 기록-연구센터장'은 스위스 언론 <SWISS INFO>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이야기가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라는 것이지 직접적 영향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따라서 유니폼색이나 엠블럼에 대한 확실한 기원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 라고 밝혔다.

이후 1908년부터 바르셀로나 회장직을 수행한 감페르는 가장 먼저 관중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FC바르셀로나의 첫 번째 홈구장 '카렐 인더스트리아'를 완공했다. 이전까지는 경기장조차 없었던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감페르가 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제대로 된 경기장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1922년에는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레스 코르트'를 건설했고, 증축을 거쳐 최대 6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바르셀로나의 역사적인 선수 중 하나인 파울리뉴 알칸타라 역시 감페르가 회장으로 있던 시기에 영입한 선수였다. 감페르가 처음 바르셀로나 회장직을 수행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개신교 신자(스페인은 가톨릭이 우세)이자 외국인인 감페르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카탈루냐어로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념을 이해하며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자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호했다.

길지 않았던 행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창단 당시 조안 감페르와 그 친구들.

바르셀로나 창단 당시 조안 감페르와 그 친구들. ⓒ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감페르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군사독재를 확립한 프리모 데 리베라는 카탈루냐 독립의 이념 축이었던 바르셀로나와 회장 조안 감페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가도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1925년 6월, 바르셀로나 홈구장 '레스 코르트' 에서 치러진 축구경기에 독재자 리베라 역시 관람을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관중들은 스페인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일제히 야유를 보냈고, 반대로 이 날 초청된 영국 왕실 해군 군악대의 'God saves the Queen' 연주에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상반된 관중들의 모습은 독재자 리베라의 심기를 거슬렀고, 리베라는 이 모든 책임을 바르셀로나의 회장 조안 감페르에게 돌렸다. 리베라는 6개월 동안 바르셀로나 홈구장 운영 금지와 조안 감페르의 스페인 국외추방을 명했다. 또한 만에 하나 감페르가 다시 스페인에 입국할 것을 대비해 감페르와 FC바르셀로나 사이의 모든 연락 방법을 통제할 것을 명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감페르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반평생에 걸쳐 일군 클럽에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 당한 것에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된 감페르는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운영하던 사업마저 몰락하게 되어 다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무너졌다.

결국 1930년 7월 30일, 그는 친구가 보는 앞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축구를 너무도 사랑한 호안 감페르가 세상을 떠난 날, 우루과이에서는 첫 번째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모두가 들떠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에는 비극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우연이었다.

1966년부터 조안 감페르를 기리기 위해 '조안 감페르컵'이 만들어졌지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행사를 치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바르셀로나의 아버지는 프리시즌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컵대회를 통해 많은 팬들 앞에서 헌사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훈련장 이름인 'Ciutat Esportiva Joan Gamper' 역시 그의 이름을 따 공로를 기리고 있다. 또한 FC바르셀로나 역사박물관은 주기적으로 <1877-1930: the Men, the Club, the Country>란 이름으로 조안 감페르 전시회를 개최해 팬들이 그의 삶과 클럽 창단 면밀히 알려주고 있다.

21세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찬란했던 펩 과르디올라는 캄프 누에서 빛을 발할 수 없었다.다만 이것이 바르셀로나의 객관적 전력을 평하는 것은 아니다. 펩 과르디올라가 떠날 때만해도 바르셀로나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위대한 한 개인보다 더 위대한 클럽이란 사실을 이번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오늘의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루이스 엔리케나 리오넬 메시의 역량 보다, 100년 전 명운을 달리한 '꾸레(Cule)의 아버지'가 남긴 뿌리 깊은 유산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이유다. 오늘도 조안 감페르는 바르셀로나 속에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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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은 어마루 시민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hxnakfn)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바르셀로나 챔피언스리그 조안 감페르 창단 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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