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비수사>에서 도사 김중산 역의 배우 유해진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유해진. 영화 <극비수사> 인터뷰 당시 모습. 그가 17년 만에 영화 <럭키>로 단독 주연을 맡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 이정민


26년, 그리고 17년. 배우 오달수와 유해진이 각각 단독 주연으로 한 영화를 책임지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오달수는 올해 3월 개봉한 <대배우>에서, 유해진은 현재 상영 중인 <럭키>에서 단독 주연을 맡았다.

반가운 일이지만 우려 또한 있었다. 연기 내공만큼만 놓고 보면 이들이 전혀 주연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지만 흔히 '티켓파워'로 대변되는 스타성 내지는 대중성이 문제였다. 여심 혹은 남심을 사로잡을 만한 유인이 없다며 투자사와 제작사는 이들을 단편적인 캐릭터로 소모하기 일쑤였지 않은가.

영화가 성공할지언정 관객 입장에선 이들의 진가를 그간 제대로 알 리가 만무했다. 과거 이들의 연극 공연을 찾아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오달수·유해진 등 무대출신 배우들의 절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하나] 주연을 바라지 않았다

 영화 <대배우>의 한 장면.

오달수가 주연을 맡은 영화 <대배우>의 한 장면. ⓒ 대명문화공장


물론 우린 연극배우 출신으로 무명을 경험하다 스타 배우 반열에 오른 이들을 여럿 알고 있다. <넘버3> 속 건달 역의 송강호는 두말할 것 없고,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도부장 이종혁, <쉬리> 속 테러리스트였던 김수로 등. 이들은 대부분 이후 승승장구하며 여러 장르영화의 주연으로 우뚝 서서 한국영화의 한 획을 긋거나 현재까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오달수·유해진이 이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꾸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작품과 장르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특별히 주연 자리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대배우> 주연을 제의받았을 당시 오달수의 말을 들어보자. 참고로 <대배우>는 20년 경력의 무명 배우이자 가장인 장성필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 오달수를 비롯한 한국 배우들의 고단한 삶을 유쾌하게 비유하는 영화기도 하다.

"그렇게 썩 기쁘진 않다. 나와 닮은 캐릭터라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니까. 극 중 장성필처럼 독한 마음을 먹고 연기했으면 지금쯤 좋은 배우가 됐을 텐데 난 그냥 연극이 좋아서 살았으니. 아, 장성필의 성격은 실제의 나와는 많이 다르다." (오달수, <대배우> 제작보고회 당시 발언)

극단 연희단거리패 오달수는 대학로를 전전하며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생활고였지만 오달수는 "'연극에게 날 잡아 잡수시오'라는 심정으로 날 바쳤다"고 고백한 바 있다.

유해진 역시 마찬가지다. 극단 목화 등을 경험하며 20대 시절 긴 무명을 거친 그가 비데 조립 등의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건 이제 유명한 일화다. 그런 그가 영화 데뷔 17년 만에 <럭키>의 주연이 됐다. 성급하게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는 건 그가 "작품 전면에 서기보단 다양한 캐릭터를 경험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수차례 말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연기자로서 해볼 만한 건지 그것을 본다. 일단 연기자인 만큼 맡은 인물을 충실히 해나가는 게 내 몫인 것 같다. 그렇게 해낸 작품이 사회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유해진,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 중)

[둘] 연기의 본분을 알다

 영화 <대배우>에서 장성필 역의 배우 오달수가 2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오달수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이기도 하다. ⓒ 이정민


많은 배우 혹은 배우지망생들이 "연기하는 게 재밌다"고 말한다. 분명 매력적인 분야다. 연기 역시 창의적 활동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고 정답이 없다는 점에서 치열하지만 그만큼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 쾌감과 보람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크다.

문제는 지속성과 꾸준함이다. 데뷔 직후 스타로 급부상하거나 아이돌 출신 배우가 아닌 이상,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성숙 기간을 필요로 한다. 속칭 버티기인데 그러기 위해선 본인이 왜 연기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되뇌는 게 중요해 보인다. 오달수, 유해진 역시 그런 과였다.

"그러니까 신이 공평하다는 게 행복과 만족감 둘 다 가질 수 없거든. 또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다를 수도 있고. 근데 결국 어려움을 겪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처음에 뭔가 하나는 버려야지. 그러다 보면, 그렇게 오래 버티면 자기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게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자도 아니잖나. 그렇지만 예술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물으신다면, 세상을 향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냐 때문인 거 같다. 배우는 그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일종의 대변자로서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던지느냐가 중요하다. 명확성이랄까. 나 역시 그런 걸 찾아가고 있다." (오달수, <오마이스타>와 인터뷰 중)

애초부터 성급한 마음과 큰 욕심을 갖지 않고 임했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20대를 보낸 오달수는 30대 이후 각종 영화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며 본인의 장기를 살리게 된다.

오달수가 묵묵히 견딘 도인형이라면 유해진은 더욱 처절해 보인다. 의상학과에 진학했다가 두 차례 연기 입시에 도전한 전력이 있다. 그 역시 20대를 연극 무대에서 버텼다. "재미와 잘 사는 게 인생 화두"라 고백했을 당시 발언을 더 들어보자.

"(왜 연기 하냐고?) 거창한 얘긴 못하겠다. 좋아서 연기했고, 생계 때문에 연기했다. 달리 말하면 좋아하는 일 가지고 돈 번다는 건데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얘기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을 순 없다. 다 떠나서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살게끔 하는 것이기에 행복하다 할 수 있다. 적어도 휘뚜루마뚜루 살진 않은 거 같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그 범위는 참 넓다. 내 기준에선 어떤 자세로 사람을 만나는지, 삶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아가면서 사는 게 잘사는 거다." (유해진, <오마이스타>와 인터뷰 중)

[셋] 반성하는 삶, 그리고 일상의 중요성

 영화 <럭키> 스틸컷

최근 개봉한 영화 <럭키>는 2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 (주)쇼박스


뜨거운 열정과 꾸준함도 중요한 덕목이지만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반성하는 자세야말로 방향을 잃지 않고 앞을 향하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오래 자신의 길을 바르게 걸어온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일상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사실.

이 지점에선 유해진의 자세가 독보적이다. 그는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민박집 주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여행 광이다. 낯선 곳을 다니며 자신을 충전하고, 환기하는 걸 꾸준히 한다. 동시에 사람과의 깊은 교감을 피하지 않는다. <삼시세끼>에 출연한 계기 역시 "오랜 동료인 차승원과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라고 밝혔으니.

"연기는 독하게 할 때가 있어야겠지만 일상조차도 그러면 안 된다. 내 주변 사람들과 잘 살자 주위에서 벗어나 있진 않은지 돌아보곤 한다. 화를 내다보면 '이게 결국 인간의 삶이구나'를 느낀다. 잊지 말고 노력하며 사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유해진, <오마이스타>와 인터뷰 중)

영화계 진출 이후 한동안 연극을 등한시했다는 자책 비슷한 감정 때문에 오달수는 상당 기간 대학로 대로를 걷지 않았다. 뒷골목을 숨어 다니는듯하다가도 후배들이라도 발견한다 치면 어김없이 지갑을 털었다. 지난해 말 참여한 한 연극에선 받은 출연료보다 동료들과 후배들 회식비로 본인이 낸 돈이 더 많았다는 후문. 그만큼 사람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 많은 부분이 구조적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게 있는데 결국 시스템에 대한 문제잖나. 그런 건 함께 고민하면서도 청춘 특유의 밝음은 좀 찾았으면 좋겠다. <대배우> 속 극단 단원들 역시 좋아하는 걸 하면서 밝지 않나. 누구는 또 그걸 이기심으로 볼지는 몰라도 자기가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이 좀 어깨를 펴고 살았으면 좋겠다." (오달수, <오마이스타>와 인터뷰 중)

다시 생각해보자. 드라마 혹은 영화 스크린에서 주연이 아니라고 하찮거나 그저 그런 연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생김새 혹은 느낌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잣대는 어쩌면 배우를 판단하는 가장 교만하고 불확실한 잣대가 아닐지. "문화 예술계를 위시한 창작자의 의무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모 배우의 말을 인용해 본다. 이 관점에서 오달수, 유해진, 그리고 숱한 조연 배우들은 그 세계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훌륭한 재료가 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다.

오달수 유해진 럭키 송강호 대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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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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