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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코끼리의 코와 얼굴같이 생겼다.
▲ 아리야발 사원 원경. 마치 코끼리의 코와 얼굴같이 생겼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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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북동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테를지(Terelj) 국립공원. 나는 아내와 함께 거북바위 위에 올라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먼 산을 보고 있으려니 아스라히 보이는 산 중턱 위에 신기하게 생긴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행길을 함께 한 몽골 친구에게 산중턱에 자리잡은 사원이 어떤 곳인지 물어보았다.

우리 여행길에 운전을 도와준 몽골 친구는 가이드 경험이 없었지만 몽골인의 삶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7년간이나 일을 하고 몽골에 돌아왔다는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주었다.

"저 건물, 코끼리 같이 보이지 않아? 사원 본전에 올라가는 계단은 코끼리의 코같이 보이고. 저 사원은 불교사원인데 코끼리 사원이라고 불리지."
"너무 멀어서 완전히 잘 안보이기는 한데, 정말 코끼리 코같이 생겼네. 코끼리가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동물이라 코끼리 모양으로 불교사원을 지은 건가?"
"저 코끼리는 부처님이 타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코끼리야. 그 코끼리를 형상화해 지은 불교 사원이 바로 저 사원이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즐기는 젊은 여행자들의 모습이다.
▲ 트레킹을 즐기는 여행자.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즐기는 젊은 여행자들의 모습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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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발 사원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꽤 먼 곳에 있어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갔지만 가는 도중에 사원까지 가는 길에서 여유있게 트레킹을 하는 여행자들 여러 명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온 젊은 배낭여행자들이었고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배낭을 메고 걷는 젊은 여인의 하얀 종아리 근육이 탄탄해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몽골의 초원에서 차 안에 앉아있는 내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나는 괜히 이 여행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리야발 사원은 테를지 국립공원의 북쪽, 깊은 산속 중턱에 마치 조립한 레고같이 박혀 있었다. 이 사원은 단체 투어 여행을 오면 그냥 생략하고 가버리는 은밀한 여행 포인트와 같은 곳이다. 일반 여행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나 테를지 절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나는 여행자들이 복작거리지 않는 한적한 사원 안에 들어서는 것이 행복했다.

사원 입구, 한 몽골 장인이 사원 정문의 여닫이 문 위에 색을 칠하고 있었다. 그가 그려놓은 불화들이 사방을 지키며 세상의 선악을 살펴보는 사천왕들인 것을 보니 이 문은 사천왕문(四天王門) 이었다. 그는 사천왕을 다 그려놓고 페인트로 마감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네 불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사천왕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사천왕문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사원이 점점 복원되고 있는 몽골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장인이 한창 작업 중인 중앙문 오른쪽의 쪽문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 입구에서 사천왕을 그리는 몽골의 한 장인을 만나게 되었다.
▲ 사천왕문 벽화. 사원 입구에서 사천왕을 그리는 몽골의 한 장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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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과 설화를 설명하는 그림판들이 언덕길 위에 줄을 서 있다.
▲ 불경 그림판. 불교 경전과 설화를 설명하는 그림판들이 언덕길 위에 줄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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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턱의 숲 속에 자리한 사원을 향해 나는 넉넉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불교 설화를 묘사한 수십 개의 나무 그림판이 사원으로 오르는 긴 언덕 오른편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득 세워져 있다. 그림판 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의 문구들이 마치 이 교훈을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빽빽이 적혀 있다. 경전의 내용은 외국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몽골어 위에 영어로도 적혀 있다. 얼핏 보면 쉬운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인생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내용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교훈과 같은 것들이다.

그 교훈들은 이런 것들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을 닦아버리는 옷과 같은 것이다. 인생의 장애물들은 덕을 쌓는 행동들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이 사원에서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하겠지만 나는 맑은 공기 속에서 마음 한 구석이 정화되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아내는 이 그림판들을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굳이 교훈적인 글들을 해석해가며 복잡하게 산길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는 오르막길인 이 산길을 조금 힘들어했다. 아내의 작은 육체적인 고통은 산길의 정상인 사원의 본당에 도착해야 끝나는 것이었다.

마니차의 바늘이 가리키는 번호가 자신의 운세라고 한다.
▲ 거대한 마니차. 마니차의 바늘이 가리키는 번호가 자신의 운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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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그림판이 끝나는 곳에는 사방이 뚫린 정자가 있고, 그 안에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마니차(摩尼車) 1개가 육중하게 서 있다. 한 몽골인 가족들이 정자 안에 들어오더니 불교 경전을 새겨 넣은 마니차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소원을 빈다. 이들은 경통 주변을 3바퀴를 돌고 경통 위의 초침같이 생긴 바늘이 멈추는 곳을 유심히 쳐다본다. 마니차의 경통 위 천장에는 묘하게도 1~150까지의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경통 위 저 숫자가 무슨 뜻이지? 정말 빽빽하게 숫자가 적혀있는데?"
"소원을 비는 마니차를 돌리다가 마니차의 눈금이 멈추는 곳에 있는 번호가 자신의 운명과 맞닿아 있지. 마니차 번호들이 적혀있는 번호 설명판이 저 위 언덕길에 이어지고 있어. 거기에서 마니차를 돌릴 때 나왔던 번호를 찾아서 보면 바로 그 내용들이 자신의 운세가 되는 거지."

경건해야 할 불교 사원 안에 무슨 복권 뽑기 같은 마니차가 있고 그 마니차가 가리키는 번호가 한 사람의 운세라고 하니 내심 의아했다. 하지만 아내는 한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는 좋은 종교적 격언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나는 마니차를 힘껏 돌리고 그 마니차 눈금이 어떤 번호를 가리키는지 열심히 따라갔다. 그리고 사원 본당으로 이어지는 언덕길 위에서 그 번호에 대한 격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나는 예상치 않았던 인생의 격언을 읽어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 격언에는 내가 최근에 겪고 있는 인생의 경험들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녹아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들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잠시 신비한 느낌에 휩싸였다.

세 명 이상이 건너면 위험하다는 다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건넜다.
▲ 흔들 다리. 세 명 이상이 건너면 위험하다는 다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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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넓은 사원의 경내로 계속 들어갔다. 우리가 계속 걸어가는 앞길에 작은 계곡 사이를 연결하는 흔들 다리가 나타났다. 별 생각 없이 건넜는데, 나와 아내 그리고 몽골친구 3명이 함께 건너니 다리가 생각보다 아주 심하게 흔들렸다. 자칫하면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졌다.

같이 다리를 건너던 몽골 친구에게 다리 앞 안내문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물어보았다. 불교에 심취한 이 친구는 계속 알듯말듯한 이야기를 했다.

"다리가 전혀 튼튼해 보이지 않는데 안내문에 뭐라고 적혀 있어?"
"위험하니 세 명 이상이 동시에 건너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뭐? 그럼 우리는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건넌 거야?"
"실제로 몽골 사람들은 이 정도의 흔들림에도 큰 공포심을 느껴. 그래서 이 절을 설계한 사람은 몽골 사람들이 이 다리를 천천히 건너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설계한 거야. 이 다리는 절의 본당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고, 이 다리를 건너면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속세와 피안(彼岸)의 경계를 건너면서 느끼는 공포지. 우리가 저쪽 언덕에서 건너왔으니 이곳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경지인 피안인 거야."

흔들 다리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들어서자 이 사원의 본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본당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버티고 서 있어서 사원은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가장 큰 암벽 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작은 바위들에는 총천연색으로 선명한 불화와 몽골 국기, 몽골 문자 등 최근 그려진 듯한 암벽화들이 강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경사가 심한 계단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 백팔 계단. 경사가 심한 계단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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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앞까지 도착하자 본당 앞에는 백팔 개나 되는 계단이 놓여 있다. 몇 시간 전에 거북바위에서 보았던 코끼리의 코를 닮은 곳이 바로 이 백팔 계단이다. 이 계단은 경사가 아주 급해서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올라가는 것이 조금은 힘들 수도 있는 계단이다. 이 백팔 계단을 허리를 숙이고 한 계단씩 올라가다 보면 마음이 겸손해진다고 한다.

나는 계단 숫자가 진짜 백팔 개인지 세어 가며 계단을 올라갔다. 짧은 시간이나마 험한 계단을 오르며 계단 오르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마음이 한 곳에 모이고 일순간 편안해졌다.

사원의 본당에 들어가려다가 보니 본당 밖의 양 옆과 뒤쪽을 수없이 많은 마니차가 둘러싸고 있다. 본당에 이른 몽골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본당 왼쪽의 마니차들을 손으로 돌리며 걷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계바늘 방향으로 본당 건물을 한 바퀴 삥 돌고 있었다.

외국 여행자가 신나게 마니차를 계속 돌리고 있다.
▲ 본당 옆 마니차. 외국 여행자가 신나게 마니차를 계속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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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통 한 개를 돌릴 때마다 불경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니 나도 이 소망의 통돌이에 동참해서 나와 가족의 소원을 빌었다. 내 앞에 가던 서양인 아저씨는 신나고 정열적으로 마니차를 계속 돌렸다. 무슨 생각으로 경통을 그렇게 세게 돌리는지 알 수 없지만 경통을 돌리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앞사람을 따라서 경통을 돌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코끼리의 머리에 해당되는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본당 안은 우리나라 사찰같이 마루 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마루를 걸으니 본당 안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사원 외부는 작고 우아하게 보이지만 사원 내부는 넓어 보이는데다가 이색적이고 화려하다.

본당 안에는 티베트 전통신앙이 스며든 티베트 불교의 주술적인 양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관세음보살을 의미하는 아리야발(Aryapala)이라는 사원 이름답게 본당 정면 한 중앙에는 8개의 팔을 펼치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 우뚝 서 있다. 관세음보살의 여러 손 뒤로도 수십, 수백 개의 팔들이 마치 공작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관세음보살 좌우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藥師佛)이 모셔져 있으니 우리나라 불교 신자들이 보았다면 불상의 배치가 아주 파격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차분하게 중생을 계도하는 우리나라의 관세음보살과 달리 몽골 사원의 관세음보살은 금빛 찬란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주술적이다.

본당의 네 벽면에는 여러 고승들의 행적과 불교의 설화를 그린 불화들이 액자에 담겨 빼곡히 걸려 있다. 사원의 중앙 마루에는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 있고, 몽골 게르 같이 뚫린 천장을 통해 따스한 햇빛이 양탄자 위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는 본당 내에 부족한 빛을 모으기 위한 채광용으로 만들기도 하였겠지만 본당의 정신적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었다.

화려한 관음보살상 앞에서 절을 올리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
▲ 불공을 드리는 몽골인들. 화려한 관음보살상 앞에서 절을 올리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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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던 본당 안에 한 몽골인 가족이 들어오면서 일순 활기가 돌았다. 관세음보살에게 절을 하는 포근한 양탄자 위에 몽골의 불교신자 가족들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나란히 온몸을 던져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 절은 오체투지(五體投地)지?"
"맞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있지. 온몸을 완전히 땅에 붙이는 모습을 통해 관세음보살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있는 거야."

뒤이어 본당 안에는 한 몽골인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어린 세 명의 아이들을 명상석 한쪽에 놔둔 채로 한참 동안 명상석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그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향해 몰입을 하고 있었다. 본당 안 공간에는 몽골인들이 이루고 싶은 소망과 마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테를지의 산맥이 둘러싼 전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 본당 앞 전경. 테를지의 산맥이 둘러싼 전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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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에서 나와 잠시 한숨을 돌리고 보니 산 아래에 장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었다. 사원 앞으로는 물결 치듯 뾰족하게 솟은 테를지의 산맥이 병풍처럼 아득하게 감싸고 있고, 산 사이로 길이 난 것처럼 구불구불한 푸른 초원이 이어지고 있다.

몽골 친구가 알려준 방향을 보니 초원의 길이 갈리는 곳에 키 큰 전나무들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거북바위가 보였다. 이곳에서 보이는 거북바위는 몽골 친구의 말대로 영락없이 남근바위였다. 사물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이렇게 보는 방향과 높이에 따라서 바위가 거북으로도 보이고 남근으로도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사원 안으로는 포근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망이 탁 트였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망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풍광은 절경이고 시야는 뻥 뚫려 있다. 시야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는 것도 이곳에서 알게 되었다. 아내도 그렇고 몽골 친구도 그렇고 이 전망을 두고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몽골 사람들의 삶과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 코끼리의 코 위에 앉아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편이 있습니다.



태그:#몽골, #몽골여행, #테를지, #아리야발, #불교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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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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