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육영수 영부인이 논산훈련소 훈련병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1972. 9.) .
 육영수 영부인이 논산훈련소 훈련병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1972. 9.) .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제1화 - 육영수 영부인 부대 방문] 부인 덕을 본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후 40년이 가까운 지금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좋아함과 싫어함도 뚜렷하다. 나는 그분과 동향으로 코흘리개 시절부터 '상모 양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언젠가는 그분의 참 모습을 그려보고자 멀리 중국 지린성 성도 창춘 근교 날랄툰에 있는 옛 만주국 육군군관학교까지 애써 답사하기도 했다.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도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진보 지식인들은 대체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돼 민족정기를 흐려놓았다고 비판했다. 그 까닭은 박 대통령은 위만국(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만주국 장교였다는 점, 5.16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중단시켰다는 점, 그리고 유신으로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킨 점 등이었다. 

하지만 경제면을 중시하는 백성들은 박 대통령은 강력한 국가주도 체제로, 단군 이래 이 나라에 가난을 비로소 물리친 가장 뛰어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 평가가 극과 극인데 견줘 육영수 영부인에 대한 평가는 별다른 이론이 없이 사후에도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들은 육영수씨가 비명으로 갔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절제치 못하고 볼썽사나운 최후를 맞았다고 몹시 애통해 했다.

육영수씨가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게다. 청와대 내의 야당이었다든지, 생활이 검소했다든지, 여성·장애인·아동 등 소외된 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와 그들에 대한 진정어린 봉사활동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1971년 전남 나주의 한센인촌을 방문하여 그들을 보살펴 준 점이었다. 또 1973년에는 청계피복노동자들의 실태를 듣고, 이들을 적극 챙겨 지원한 점도 역사의 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분은 영부인으로서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림이 없이, 오히려 헐벗고 굶주린 소외 계층에 더 사랑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으로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두 번 당선된 외에도 세 번이나 직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바 있었다. 나는 그 직접 선거 때마다 박 후보는 부인의 덕을 단단히 봤다고 생각한다. 특히 근소한 표 차로 당선된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부인의 지원 덕이 당선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974년 8․15 경축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영부인이 대통령 대신 비명에 생을 달리했다. 그때 국장 기간 중 세종로와 광화문 일대에 해방 후 최대의 조문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이는 평소 육영수씨의 덕을 기리는 시민들이 많았음을 입증한 것일 게다.

초병을 가장 먼저 만난 영부인 

1970년 4월 하순, 육영수 영부인이 우리 중대 병사들을 위문하고자 방문했다. 군단, 사단, 연대에서는 영부인이 방문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그때 부중대장으로서 부대 환경과 병사들의 취사 위생상태를 빈틈없이 점검하노라 꼬박 일주일 남짓 고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매일 같이 상급 부대에서 감독이 나왔고, 영부인 방문 예정일 이틀 전부터는 사단 참모가 아예 우리 중대로 출근해 채근했기 때문이다. 전 중대원 이발, 손·발톱 깎기는 물론 심지어 영부인이 볼 리도 없는 팬티까지 사단 보급창에서 가져다가 모두 새것으로 갈아 입혔다. 그밖에 부대 안팎의 일이야 덧붙여서 무엇 하랴.

마침내 영부인이 오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별 판을 단 지프차들이 우리 중대로 우르르 몰려왔다. 영부인 도착 예정시간이 되자 중대 위병소 앞에서 군단장·사단장·연대장이 도열한 채 대기했다. 그런데 막상 영부인이 탄 검은 승용차는 곧장 부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부대 들머리에 있었던 초소에 멈췄다.

육영수 영부인이 부대를 방문하여 내무반의 사병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1970. 4.)
 육영수 영부인이 부대를 방문하여 내무반의 사병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1970. 4.)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영부인은 승용차에서 내려 초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그들에게 직접 선물(사탕봉지)을 전달했다.

육영수씨는 부대에 들어와서도 행정실은 들르지 않았다. 그때 중대장은 만일을 대비해서 상황판을 새로 만들고, 여러 날 브리핑 연습을 잔뜩 했다.

영부인은 중대 연병장에 몇 시간째 도열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자마자 즉각 내무반으로 들어가 쉬게 했다.

그런 뒤 영부인은 병사들의 각 내무반과 취사장을 들러 잠자리는 편한가, 급식에는 부족함이 없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알뜰히 보살폈다. 부대 현황 브리핑도 받지 않고, 마이크를 잡고 장병들에게 한 마디 연설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져온 통닭과 사탕 봉지, 배구 볼과 축구 볼을 중대원들에게 선물로 남기고 잠시 후 훌쩍 떠났다. 그후 보름쯤 지나자 청와대로부터 두툼한 봉투가 배달됐다. 영부인이 초병, 취사병들과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대장과 부중대장인 내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제2화. CAP 소대장이 되다]

보병제26사 73연대 1대대 1CAP 소대원들(뒷열 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기자다).
 보병제26사 73연대 1대대 1CAP 소대원들(뒷열 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기자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1970년 봄, 중대 부중대장으로 지내고 있던 중, 대대 직할 탄약작업소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 대대 직할 소대는 일명 'CAP 소대'라고 불렀는데, 당시 우리 연대에서는 3개 소대 모두 외지 경계취약지대로 파견을 내보냈다. 그래서 군대에는 이런 파견 소대를 '특과'라 하였고, 파견 소대장은 그 지역사령관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1 CAP 소대는 한강 하류 심학산 동쪽 능선에 주둔했다. 이는 만일 한강 둑인 제1선을 무장 공비나 간첩들이 뚫었다면, 다음 그 경유지를 차단하는, 그들의 예상 거점 및 예상 통과지점에 잠복초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이 CAP 소대에 부임하고 보니 30여 명의 단출한 소대원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소대원들은 내게 왜 마을로 외출치 않느냐고 물었다.

그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부대를 죽 지키니까 그들이 마음대로 마을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슬며시 마을 외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내 전임자 부산 동아대 출신 배아무개 소위는 저녁이면 거의 매일 마을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그 산 아래 마을은 동패리, 삽다리, 송포마을 등으로 그 무렵 가내 가발공장들이 마을마다 한두 곳 있었는데 거기에는 여공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는 거의 매일 밤 주막에 들러 술도 한 잔 하고, 그 가발공장을 기웃거렸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연히 마을 청년들과 시비가 붙게 돼 결국 대민사고를 저지르고 후방으로 전출을 갔기에 내가 졸지에 그 후임이 된 것이다.

소대장이 마을에 내려가면 곧 분대장은 다른 마을로 내려가고, 이어 분대원은 또 다른 마을로 내려가기 마련이다. 소대원들은 그렇게 여러 달 보내다가 새로 온 소대장이 부대에서 꼼짝하지 않자 그들은 좀이 쑤셨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보름 지나자 마침내 그들은 마침내 밤 마을 외출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신 그들의 스트레스를 발산할 방안으로 부대 연병장에 배구장을 만들어 날마다 시합을 하게 조치했다. 그렇게 대민 접촉을 차단하자 대민 사고가 근원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산중생활

사실 산중부대 생활은 단조롭고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CAP 소대에서도 주간에는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병력은 모두 취침을 하고, 야간에는 경계초소 잠복근무로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었다. 나도 부임한 처음에는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생활이 몹시 힘들었다. 무료한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막사 주변을 맴돌았다.

하루 24시간이 48시간이라도 되는 듯, 마냥 지루하고 따분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청취도 신물이 나고 바람소리에도 신물이 났다.

주간에는 그런대로 시간이 잘 갔다. 새벽녘에 철수하는 잠복근무조를 맞아 군장검사와 일조점호를 하고 아침 운동, 세면, 조식, 청소, 오전교육 및 자유시간, 중식 등 일과시간표에 따라 시간을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식사 후 잠복근무 조를 떠나보낸 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시간은 고역이었다.

입산 수도승도 한 달이 고비라더니, 나도 산중생활 한 달이 지나자 그만 산 사내가 됐다. 그렇게 지루하던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나의 직속상관인 대대장에게 매일 아침에 이상유무 보고만 하면 특별한 간섭이 없었다.

그때 내가 체득한 가장 좋은 부하 통솔 방법은 솔직하고 담백한 처사가 최선이었다. 열 마디 훈시보다 나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했다. 상급자라는 권위의식이나 군림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들과 함께 고락을 나무면 소대원들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열고 따르게 마련이었다.

각자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켜는 것이 그 집단이나 그 사회의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때 체험으로 알았다. 아마도 나라도 그럴 것이다.

부대 이동

1CAP 소대장 부임 후 두 달이 지나자 어느 날 갑자기 또 부대이동 명령이 내렸다. 이번 부대 이동은 사단 내 우리 73연대와 75연대가 관할지역 교체 명령으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래비라는 곳에 위치한 부대로 이동이었다. 부대 이동 배경에는 새로 부임한 75연대장은 손영길 대령으로 그분 끗발이 셌기 때문이라는 말이 유언비어처럼 떠돌았다.

박익주 연대장 따님 박은경 양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 속지
 박익주 연대장 따님 박은경 양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 속지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 무렵 76연대장은 김복동 대령이었고, 우리 73연대장은 새로 부임한 박익주 대령이었다.

이 분은 군에서 전역 후 고향 남해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했으나, 다음 선거 때는 훗날 골프장 캐디 성추행 논란으로 그 유명한 박희태라는 검사에게 밀려 연임치 못했다.

차라리 박 연대장은 군에 있었다면 승승장구했을 분이었는데,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아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것은 본인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분은 연대장 부임 선물로 일선 소대장에게 워커 한 결레씩 보내 나는 전역 후 동원예비군 훈련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그 군화를 잘 신었다. 그분의 따님을 이대부고에서 만나 교과지도뿐 아니라, 교지편집지도까지 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그물코와 같다.

그때 우리 소대 근무지인 경기도 고양군 심학산에서 양주군 가래비까지 그 먼 길을 완전군장으로 밤새 행군해 부대이동을 하자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등 무척 힘들었다. 이른 새벽에 부대에 이르자 군악대들이 나와 행진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절름거리던 병사들은 그 행진곡에 맞춰  보무도 당당하게 부대에 이르렀다.

새 부대는 대대 전체가 한 곳에 모여 근무하는 교육 중심부대로, 이전 경계 중심 부대와는 달리 부대생활이 확연히 달라졌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댓글1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