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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한 달 간 제주에 머무셨던 장모님이 육지로 돌아가셨다. 장모님 효도 관광을 핑계로 우리 역시 9월 한 달 내내 제주 구석구석을 누비며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이어지는 제주의 변화를 한껏 즐겼다. '그 놈'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놈, '차바'

난생 처음 눈 앞에서 본 Full HD급 화질의 무지개의 풀 버전. 카메라를 연신 누르는 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난생 처음 눈 앞에서 본 Full HD급 화질의 무지개의 풀 버전. 카메라를 연신 누르는 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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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주 후 처음으로 경험한 태풍의 위력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제18호 태풍 '차바'(CHABA) 이야기다.

단독주택도 아닌 아파트, 그것도 신축 건물이었기에 태풍의 상륙 소식에도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건만 해안건물용으로 설계된 시스템 이중창을 뒤흔드는 강풍(광풍이 더 적합한 표현 같다)과 난생 처음 보는 빗줄기(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의 콤비네이션은 육지 촌 것의 혼백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이었다.

공포의 절정은 비바람이 최절정에 이르며 동네 전체가 정전과 단수로 마치 유령마을처럼 변해버린 새벽 4시께였다. 이때부터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태풍이 지나가길, 냉장고의 음식이 상하기 전 전기가 다시 살아나길, 그리고 아침에 세수라도 하고 나갈 수 있게 수도공급이 다시 이뤄지길 기도할 뿐.

차바의 영향으로 봉쇄되었던 바닷길이 간신히 다시 열렸다. 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택배도 저기 어딘가에 실려 있겠지.
 차바의 영향으로 봉쇄되었던 바닷길이 간신히 다시 열렸다. 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택배도 저기 어딘가에 실려 있겠지.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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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포의 밤이 지나고 동이 트자 차바가 휩쓸고 간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건물의 잔해와 상처 입은 자동차들, 고개가 꺾이거나 뿌리부터 뽑힌 나무, 쓰러져서 제 기능을 상실한 신호등,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깊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동안 뉴스로만 접했던 농민들의 아픔이었다.

여름 내내 온 동네에 진한 귤꽃 향기를 뿜어내며 수확을 기다리고 있던 조생귤, 가지가지마다 탐스러운 과실을 매달고 있던 감나무, 수확을 앞두었던 콩과 메밀…. 이 모든 것이 태풍에 휩쓸려 쓰러지고 떨어지고, 고개가 꺾이고 말았다. 이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농민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울산에 이어 제주도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돼 태풍으로 상처 입은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길 기원할 뿐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쓸데 없이 멋지게 물든 석양이 얄밉게만 느껴진다.
 남의 속도 모르고 쓸데 없이 멋지게 물든 석양이 얄밉게만 느껴진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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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지난 여름, 제주도민들조차도 아는 사람만 알고 조용히 즐기던 오라동의 메밀밭이 결국 매너 없는 SNS 인증족들의 습격을 받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가 너무나 빨랐다.

지난 9월 초 마지막으로 찾은 오라동 메밀밭의 모습.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지난 9월 초 마지막으로 찾은 오라동 메밀밭의 모습.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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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마지막으로 찾았던 오라동 메밀밭은 광활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인위적인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한라산 중턱에서 바다를 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메밀꽃의 향연은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절경 중 최고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적함과 아름다움은 불과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9월 12일께부터 시작된 메밀꽃밭 나들이 행사를 계기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메밀꽃밭으로 몰려들어 주변 도로는 주차된 차량으로 마비가 될 정도였다. 사유재산임에도 관광객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됐던 메밀밭은 짓밟히고 더럽혀지고 말았다.

특히 메밀밭에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은 남들과 다른 각도의 인증샷을 뽑아내기 위해 메밀꽃밭 한 가운데로 파고들던 SNS인증족들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 남의 밭을 짓밟고 인증샷을 찍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나중에는 밭 한가운데 군화발로 짓밟은 듯한 길이 생길 정도였다. 선의로 사유 재산을 개방한 밭 주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리라.

해안도로의 어느 카페 전경. 멋진 해안풍경과 따사로운 햇살도 그들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하진 못했다

※ 위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합니다.
 해안도로의 어느 카페 전경. 멋진 해안풍경과 따사로운 햇살도 그들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하진 못했다 ※ 위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합니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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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오라동 메밀밭이 엉망이 된다면 그 원인은 중국 단체 관광객들일 것이라 예단했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다. 우리에게는 중국 관광객의 무질서한 행동을 욕할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아니 조금 다른 구도의 인증샷을 찍기 위해 사유재산을 함부로 훼손하는 이들은 분명 국내 관광객이었으니 말이다.

우리에겐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제주도가 온통 억새로 뒤덮이는 가을이 찾아왔다. 따라비 오름 입구의 전경.
 제주도가 온통 억새로 뒤덮이는 가을이 찾아왔다. 따라비 오름 입구의 전경.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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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주이주, #중국인, #한국인, #오라동, #메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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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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