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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에 발라 먹어보니 눅눅한 사과잼과 달리 쫀득하게 사과가 씹혔다. 잼도 아닌 것이, 젤리도 아닌 것이, 묘했다.
28년 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는 직장을 잃었다. 아빠는 퇴직금으로 트럭을 한 대 샀다. 한 차 가득 사과를 싣고 이곳저곳으로 팔러 다녔다. 하지만 아빠에겐 장사 수완이 없었다. 아침에 싣고 나간 사과를 다시 그대로 싣고 오기를 며칠 동안 반복했다.

하필 아빠가 팔러 다닌 사과는 연두색 아오리였다. 늦여름에 잠깐 나오는 아오리는 조생종이라 저장성이 좋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는 상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장사를 접었다. 팔다 남은 사과는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나눠주고도 몇 짝이 남았다. 남은 사과를 아무리 먹어도 썩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마당 한쪽 퇴비장에는 갈색으로 썩은 사과들이 굴러다녔다.

아빠가 팔러 다닌 사과는 하필 아오리였다. 썪지 않는 사과가 있었다면 부모님의 마음도 덜 타들어갔을 것이다.
 아빠가 팔러 다닌 사과는 하필 아오리였다. 썪지 않는 사과가 있었다면 부모님의 마음도 덜 타들어갔을 것이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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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만 하던 엄마는 지인이 소개해준 속옷가게에서 가게 보는 일을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썩은 사과를 도려내 사과잼을 만들었다. 연탄불에 오랫동안 졸인 잼은 식빵에 발라 먹었다. 고급 간식도 질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사과잼을 먹기가 싫어졌다. 나중엔 엄마가 사과잼 만드는 것만 봐도 진저리가 쳐졌다.

우리 옆집엔 서울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족이 살고 있었다. 세련된 외모도 그렇고, 투박한 경상도 사람들과는 말투부터가 달랐다. 우린 그 집을 '윤미네'라고 불렀다. 어느 날 윤미 엄마가 그릇에 뭔가를 담아 가지고 왔다. 사과를 납작하게 썰어 잼처럼 만든 것인데, 우리 집 사과가 분명해 보였다.

빵에 발라 먹어보니 눅눅한 사과잼과 달리 쫀득하게 사과가 씹혔다. 잼도 아닌 것이, 젤리도 아닌 것이, 묘했다. 잼에 지친 우리는 "이건 더 먹을 수 있겠다"며 반겼다. 그날 퇴근한 엄마는 윤미 엄마가 준 정체불명의 사과요리를 자세히 살폈다.

다음 날 엄마는 사과를 납작하게 썰어 설탕을 넣고 끓였다. 그 다음날도 끓였다. 세 번째로 실패한 뒤 엄마는 포기했다. "여기다 뭘 넣은 거지?" 혼잣말 하는 엄마에게 "윤미 엄마한테 물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엄마는 싫다고 했다. 한창 젊었던 엄마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우는 집안을 떠받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바로 자존심이었을 테니. 어렸지만, 당시 내 마음도 엄마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마멀레이드'라는 걸 알았다. 마멀레이드는 과육만으로 만드는 잼과 달리 과일을 껍질 째 설탕과 함께 졸인 것이다. 주로 귤이나 오렌지, 레몬으로 만드는데 사과도 물론 가능하다. 엄마는 "대체 뭘 넣었을까" 하고 궁금해 했지만, 허무하게도 마멀레이드의 재료는 잼과 똑같았다.

우선 사과를 2밀리미터 정도 폭으로 껍질 째 얇게 썰고, 사과 양의 절반 조금 못 미치는 양의 설탕에 버무려 놓는다. 설탕이 녹으면 중불에 올려 끓기 시작할 때 약불로 줄인다. 천천히 뒤적이며 끓이다가 국물이 자작해지면 불을 끈다. 취향에 따라 계피가루를 넣어도 좋다.

마멀레이드를 만들 땐 불을 끄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설탕 국물은 식으면서 끈적끈적해진다. 그래서 국물이 없게 바짝 졸이면 굳어서 먹기가 불편하다. 만일 너무 굳었다면 물을 조금 부어 다시 끓이면 된다.

엄마의 마멀레이드가 실패한 것은 설탕을 조금 넣었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사과가 아깝다고 해서 설탕까지 함부로 먹을 순 없었던, 무엇이든 절박한 시절이었다.

어느 덧 가을이 왔고, 사과도 제철을 맞았다. 이맘때면 그 시절의 젊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어린 내가 떠오른다. 혼돈과 가난을 이길 수 없어 혹시나 부모님이 삶을, 그리고 나를 포기할까 두렵고 초조했던 그 가을. 부모님이 살아야했듯, 아이인 나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 시절은 내게 우울한 기억만이 아니라 깨달음도 남겼다. 결국엔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가끔, 사과잼 졸이던 냄새가 그립다.


태그:#단짠단짠 그림요리, #요리에세이, #사과 마멀레이드, #사과잼,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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