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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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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양 목사는 이 논리가 한국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는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로 진행합니다. - 기자 말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 / 작사·작곡 김민기 / 노래 양희은)

10월 7일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세 번째 시간에 참석한 이들은 강의 시작 전 '아침이슬'을 함께 불렀다. 가사 구구절절 어두운 역사를 겪어온 우리의 가슴을 울렸다. 가을 곡식은 찬 이슬에 영근다고 했다. 이슬 내리는 때를 따라 우리의 역사 공부도 무르익고 있다. 함께 배우는 이들의 작은 미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날 주제는 한국 교회사였다. 한국 교회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중요한 맥을 같이 한다. 강사는 하나님나라연구소 부소장이자 가향교회 담임목사인 양진일 목사다. 밝은 얼굴로 힘차게 좌중 앞에 선 그는 서른여섯 끼째 굶고 있다고 했다. 단식하는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교육문화연구학교가 내딛는 걸음의 의미와 맥이 닿아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3시간을 쉬지 않고 한국 교회사의 발자취를 짚었다.

모든 역사는 편파적이다

"중립적 역사란 없습니다. 모든 역사는 편파적이고, 해석된 것입니다."

양진일 목사는 이 사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긍할 만한 중립적인 역사는 없을까'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건 '역사'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했다. 기술과 역사는 다르다. '1947년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을 당했다'는 사실은 기술이다. 여기에 '왜 암살을 당했는가'에 대한 입장이 들어서는 순간 역사가 된다.

이때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1492년 콜럼버스는 미 대륙을 발견했다.'

이 표현은 기술일까 역사일까. 전형적인 서구적 해석이 들어간 역사다. 미 대륙은 이미 오래전부터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의 입장에서 1492년은 학살이 시작된 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역사는 편파적이다.

역사의 편파성은 한국 교회사의 맹점을 잘 설명한다. 양 목사는 교회가 역사를 은혜 중심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바라는 바, '은혜'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감동을 연출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이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새벽이었다는 이야기는 어둠을 물리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최근 자료와 고증을 근거로 선교사들의 도착 시간이 대낮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교회 입장에서는 이 사실이 달가울 리 없다. 사실을 교정하려는 노력도 찾아보기 힘들다. 양 목사는 한국 교회사에 이처럼 감동을 주기 위해 과장되거나 사실을 빗나간 이야기들이 많다고 했다.

또 한 가지 맹점은 많은 교단이다. 교회는 교단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므로 무수한 역사가 분분하게 된다. 일례로 1959년 합동과 통합 교단의 분열을 기술할 때 통합 측은 학장의 횡령 사실을 거론하고, 합동 측은 WCC 찬반 문제를 강조한다.

이처럼 각 교단이 자기 교단 중심의 역사를 쓰기 때문에 한국 교회사에는 모든 교단이 수용할 만한 통합 교회사 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사 책을 보기 전에 꼭 저자의 교단을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양진일 목사는 모든 역사는 해석된 역사이고 따라서 편파적이라고 말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양진일 목사는 모든 역사는 해석된 역사이고 따라서 편파적이라고 말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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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집필진의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역사 해석의 권한을 정부가 갖겠다는 것, 이것이 국정교과서의 실체라고 양 목사는 설명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동의한다는 것은 교과서 집필진의 해석을 따르겠다는 것인데, 현 정부는 정작 교과서 집필진을 공개하지 않아 국민들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역사는 '교과서'라는 권위만으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 될 수 없다. 역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역사는 편파적이다.

한국 교회사의 기원, 피눈물의 고개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의 입국. 한국 교회는 이때를 한국 개신교의 시작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때 처음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많은 신자가 있었고 많은 박해가 있었다.

"1784년 이승훈이 영세를 받은 이후 100년의 기간 동안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최소 8천 명 최대 2만 명 이상의 무수한 순교의 피가 흘렀습니다.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39년 기해,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 모두 천주교 박해의 기록입니다."

양 목사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를 격렬한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설명했다. 신분에 따른 위계가 엄격한 성리학적 질서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천주교의 평등사상. 신분제와 가부장제를 뒤흔드는 천주교 사상은 곧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사돈에 팔촌까지 죽임을 당하는 비극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 한국 교회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양 목사는 단군이 이스라엘 '단' 지파의 후손이라는 일각의 재밌는 주장도 소개했지만, 신빙성 있는 추측으로는 고려시대, 좀 더 올라가 신라시대까지는 제법 일리가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 충렬왕은 야리가온('복음을 섬기는 자') 신앙인이었던 원나라 쿠빌라이의 사위였고, 신라에는 당나라에 유행하던 기독교의 한 분파인 경교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양진일 목사는 우리 민족이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고 설명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양진일 목사는 우리 민족이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고 설명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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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인 신앙의 흔적은 없을까? 양 목사는 조선 중기로 향했다. 전란의 참상 속에서 찾은 그 흔적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일본의 선봉부대는 십자가 문양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천주교 부대로 알려진 고니시(소서행장) 부대였다. 왜군 20만 명 중 2만 명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 대부분이 고니시 부대 소속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 천주교 교세를 꺾기 위해 최전방에 천주교인들을 대거 투입한 것이다.

이때, 세스페데스라고 하는 종군 신부가 고니시 부대와 함께 했는데, 그는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에 반대했고, 일본에 남은 많은 조선인 포로들에게 신앙을 전했다. 그 후 1601년부터 37년간 일본에서는 천주교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는데, 이때 희생당한 순교자 상당수가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이후 포로로 잡혀간 5만 명 중 7천여 명이 조선에 송환되었다. 그중 1천 명 정도는 기독교 신앙을 접하고 돌아왔을 것이고, 신앙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양 목사는 추정했다.

공포의 대상으로 만난 십자가, 그리고 타국에서 신앙을 품고 순교한 사람들. 신앙을 머금은 채 슬픈 기억을 안고 살아야 했던 삶. 피의 천주교 박해 100년. 우리 조상에게 신앙의 길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숙연하게 돌아보게 된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 된 까닭

"한국 교회는 독특하게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조선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어요.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는 이수정이라는 조선인이 일본에서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선교사가 그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을 들고 들어온 일은 세계 교회사에 유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교인도 100여 명이나 있었어요.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접한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러 왔는데 열매를 거두기에 바쁘다'고 했습니다."

조선을 두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앗을 뿌리러 왔는데 열매를 거두기 바쁜 나라”라고 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조선을 두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앗을 뿌리러 왔는데 열매를 거두기 바쁜 나라”라고 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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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왜 유독 평양이었을까.

양 목사는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두 차례 전쟁의 격전지가 된 평양은 '생존'이 절대적 우선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인들은 조선인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미국 성조기가 걸린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생존과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선교사들은 기존 신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회개를 촉구한 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양 목사는 초창기 한국 기독교가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초기 기독교는 기존 조선사회의 가치와 문화에 저항하며 신분을 떠나 상호 존중의 문화를 실천했고, 여성 교육에 앞장섰으며, 민족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뭇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았다. 안중근, 우덕순, 장인환, 이재명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연착륙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있다. 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선교사들은 개신교 신자 1명 얻는데 10년이 걸릴 정도로 애를 먹었다. 유독 한국만이 열광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다른 식민 국가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매국노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한국은 같은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었다고 양 목사는 설명했다.

또한 교회는 합법적으로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민족 독립을 모색할 수 있는 외피가 되어 주어 의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

미국 기독교에 배신감을 느끼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세워진 이 동양의 예루살렘은 곧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기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를 양 목사는 한국 교회사만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1884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 들어온 총 선교사 1529명 중 1059명이 미국 선교사였다. 그러나 1905년 미국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일본의 조선 점령을 상호 묵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입지는 제한됐다.

조선 백성의 편을 들어 일본에 맞서려 했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됐고 조선 땅에 머물렀던 선교사들은 일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거나 일본에 우호적이 되었다.

"한국 교회사에서 1907년이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은 대부흥운동 기간에 조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일본 사람들을 미워한 것, 일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까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걸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봤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수탈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할망정 정당화시켜 주고 있는 선교사들의 행태에 의식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1907년 결성된 민족운동그룹이 '신민회'예요. 1907년은 순수 종교운동그룹과 순수 민족운동그룹이 분리된 해입니다."

강의를 듣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참석자들의 모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강의를 듣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참석자들의 모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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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양 목사는 교회 비정치화의 결정적 계기로 3.1운동을 짚었다.

3.1운동은 종교 협력운동으로 민족대표 33명이 모두 종교인 대표였다. 그중 기독교 대표가 16명이다.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3퍼센트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가히 전 기독교적 운동이라 할 만한 사건이다. 이때 6월 말까지 수감된 조선인의 22퍼센트, 여자 수감자의 66퍼센트가 개신교인이다.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선언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앞세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그것은 완전한 오해였다.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를 겨냥한 구호였을 뿐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애초에 해당사항에 없었다.

미국이 도와줄 것을 믿고 전 기독교가 투신했던 3.1운동의 실패는 커다란 상처와 실망을 남겼다. 이후 기독교는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세 지향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손을 내밀었고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대거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 한국 초기 사회주의자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로 구현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역사 청산, 한국사와 한국 교회사의 공통 난제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매주 예배를 드린 교회는 다 신사참배를 한 교회예요. 목사들은 일본식 군복을 입고, 교인들 모두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고, 천황을 향해 동방요배를 드렸고요, 출애굽기와 같은 일제가 보기에 선동적인 본문은 모두 빼고 복음서만 설교했어요. 예배 후에는 모든 교인들이 신사로 가서 참배하는 것이 주일 예배였어요."

신사참배는 분명 가장 부끄러운 한국 교회사의 일면이다. 그러나 양 목사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해방 후에 벌어졌다고 봤다. 신사참배 반대로 50명이 순교했고 2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다. 1945년 8월 17일 모든 신사참배 반대자가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해방 후 출옥 성도들은 일제에 굴복한 목사들을 향해 백번 양보하여 2개월만이라도 자숙하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끝내 거부하며 이렇게 변명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신사참배 반대해서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는 일본 등쌀 견디면서 교회 지키느라 고생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양 목사는 이 논리가 한국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했다. 언제 하나님이 우상에게 절하면서까지 교회를 지키라고 했는가. 그렇게 교회를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밥벌이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1997년 평양노회에서, 2007년 통합총회에서 복권되었다. 복권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면직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주기철 목사는 1940년 장로교 총회에서 지시 불이행 즉,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는데,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그토록 존경했던 주기철 목사가 면직된 상태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진지하게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참석자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진지하게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참석자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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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목사는 해방 후에도 50년이 넘도록 복권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계의 요직을 꿰차고 있던 인물들이 모두 부끄러운 역사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역사 청산 문제는 기독교도 피해갈 수 없다. 친일인명사전 등 역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부각될 때마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이들 상당수가 기독교 인사들이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권력과의 밀월을 즐기며 낯 뜨거운 역사를 이어갔다. 미군정 시기 교회는 일본이 남긴 적산을 불하받아 몸집을 키웠고, 1951년 아시아 국가 최초로 군목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군대의 비호 아래 특혜를 누렸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국가조찬기도회, 3선 개헌지지, 유신지지 등으로 권력에 힘을 실어 준 대신 건물 및 토지 불하, 불법 건축 승인, 그린벨트 해제 등 유무형의 혜택을 받으며 군사정권의 보호 아래 크게 성장했다. 군사정권이 지켜주는 준성역. 양 목사는 당시 교회를 그렇게 묘사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비빌 언덕이 사라지자 교회의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간 덕지덕지 붙은 고질적인 문제가 표면으로 올라왔을 뿐이다.

한국 교회사의 새로운 이정표

양 목사는 전 세계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기독교의 스펙트럼은 지나치게 근본주의로 쏠려 있다고 짚었다.

1974년 전 세계 3000명의 복음주의자들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 공동의 신앙고백문인 '로잔 언약'을 만들며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 전파와 정치 사회 참여라는 두 가지 사명 중 후자를 소홀히 해 왔음을 회개했다.

한국에서도 대표단이 참여했지만 군사정권하의 한국에서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지금도 한국 신앙인 대부분은 자신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로잔언약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한국 교회는 당당하게 로잔언약을 신앙고백으로 꺼내들지 못한다. 이는 한국 교회사가 머물고 있는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성장한 것일까. 있어서는 안 될 살들이 덕지덕지 붙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양 목사는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음을 강조했다. 선지자들이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외치는 순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단지 바알도 함께 섬겼을 뿐. 그것은 지금의 한국교회와 다르지 않다.

양 목사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에 당부한다. 우상숭배를 그만두고 한국 교회사가 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도록 말씀에만 근거한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펼쳐 가자고.

단식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동안 덕지덕지 붙어 있던 한국 교회사의 불편한 살들, 나아가 한국사의 부끄러운 잔재까지 청산해 내고자 하는 소망이 그의 강의에서 읽혔다. 그것은 또한 초청이었다.

지금 함께 하는 이 배움을 통해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우리 역사의 부적절한 살들을 청산하는 단식에 함께 하자고. 지금부터 써 나갈 새로운 역사 위에 동양의 새 예루살렘을 함께 건설하자고.

함께 배우는 이들의 작은 미소에서 참된 역사의 길을 본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함께 배우는 이들의 작은 미소에서 참된 역사의 길을 본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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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coIz/108)

덧붙이는 글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coIz/108)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태그:#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역사, #과거현재미래,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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