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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지난 5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무리한 공무집행에 항의한 것이 위법한지 따지는 재판이 있었습니다.
  • 34살에 복직투쟁을 시작해 올해 42살이 되었습니다. 그간 집시법 위반, 일반교통방해, 공무집행방해 등 수많은 죄목이 따라 붙었습니다.
  • 해고된 동료와 그 가족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러한 고통의 시간이 이제 끝나길 바랍니다.
문득 기억날 때가 있습니다. 즐거웠던 일이든, 고통스러웠던 일이든 살다 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으니까요. 평상시에는 몸 안 어딘가에 있다가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오는 기억은 가끔 기대 못 한 선물 같습니다. 친구와 사이가 좋지 못할 때 떠오르는 좋았던 기억은 불편해진 관계를 상쇄할 만큼의 치유력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기억으로만 존재합니다. 애써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겠죠.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참담함을 느낄 만한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좋은 기억만 오랫동안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다수의 범죄경력, 언제 구속될지 모름'이란 낙인

지난 2013년 4월 4일 오전 기습철거당한 쌍용차 분향소 자리에 화단이 들어선 모습을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자지부장이 바라보고 있다.
 지난 2013년 4월 4일 오전 기습철거당한 쌍용차 분향소 자리에 화단이 들어선 모습을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자지부장이 바라보고 있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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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4일 이른 새벽, 대한문 분향소에서 잠을 자던 저를 서울 중구청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끌어냈습니다. 300여 명의 경찰과 공무원들은 도로점용을 허가받지 않았다며 3명의 해고자가 지키고 있던 분향소를 철거했습니다. 집회신고를 한 곳이었습니다.

그 분향소를 철거하는 1시간 동안 중구청 복장을 한 남성 6명이 얼굴과 양팔, 양다리 그리고 등을 눌렀습니다. 저는 강제로 바닥에 눕혀졌습니다. 숨만 쉴 뿐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철거가 끝나가도록 온몸이 눌린 채로 계속 풀어달라는 요구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새벽에 느꼈던 무력감과 패배의 기억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저는 이렇게 참담하고 무력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왕왕 생깁니다. 쌍용차 투쟁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희미한 일이지만, 몇 년 전 집회에 참석하거나 사회를 봤다는 이유로 기소를 당해 재판정에 서야 할 때도 괴로운 기억을 되짚어야 합니다.

지난 5일에도 재판이 하나 있었습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이뤄진 경찰의 무리한 공무집행에 항의한 것이 위법한지 따지는 재판이었습니다. 계속 추가 기소되고 병합돼 판사가 세 번이나 바뀌었던 재판입니다. 검사는 담담한 어조로 구형했습니다.

굴뚝 농성 했다고 3년, 집회를 방해하는 경찰에게 항의했다고 4개월, 막무가내로 캡사이신을 뿌려대는 경찰에게 저항했다고 1년, 천막 철거하려는 경찰에게 항의했다고 1년, 집회 참석하기 위해 온 시민들을 둘러싼 경찰들을 밀어내라고 이야기했다고 1년 6개월,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했다고 6개월,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맨 앞에서 싸웠던 지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1년 6개월의 구형을 선고했습니다. 검사의 기소 내용은 건조물 침입, 집시법 위반, 일반교통방해, 공무집행방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채워졌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쌍용차 해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는 쌍용차에 언제 쳐들어갈지 모른다는 의미로 바뀌었고, 불꽃놀이용 폭죽 소리는 총 맞을 것 같은 공포심을 자아냈다고 했습니다. 쌍용차에서 해고돼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하려고 해도 그 앞을 막고 서 있던 것은 늘 경찰의 방패였습니다. 면담요청서를 들고 있던 우리를 가로막는 방패를 흔들면 경찰은 캡사이신을 뿌려댔고 항의하면 연행했습니다.

지난 2015년 3월 23일, 쌍용차 희생자 26명 명예회복과 해고자 187명 복직을 요구하며 101일째 굴뚝농성을 벌인 이창근 '와락' 기획팀장(쌍용차 해고노동자)이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70m 굴뚝 위에서 농성을 풀고 내려오자, 경찰이 쌍용차 정문을 에워싸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굴뚝 농성 끝낸 이창근 실장 접근 막는 경찰 지난 2015년 3월 23일, 쌍용차 희생자 26명 명예회복과 해고자 187명 복직을 요구하며 101일째 굴뚝농성을 벌인 이창근 '와락' 기획팀장(쌍용차 해고노동자)이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70m 굴뚝 위에서 농성을 풀고 내려오자, 경찰이 쌍용차 정문을 에워싸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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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를 흔든 일도 죄가 되었고, 항의했던 일도 죄가 되었습니다. 방패를 들고 있던 경찰들은 진단서를 끊었습니다. 또 죄가 추가됐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이 '경찰을 진단한 의사가 본인 이름으로 나간 진단서는 자신이 발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 변론했지만 공소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죄목을 쌓아갔고 쌍용차 해고자들은 다수 범죄 경력이 있는 범법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하면 불법집회라고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집회에 참석하면 일반교통방해로 기소합니다. 집회신고를 안 하면 불법집회라며 해산명령을 내리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연행합니다. 집회신고를 해도 민원이 들어온다며 음향을 줄이라고 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불법이라고 협박합니다. 증거라는 것도 명백하지 않습니다. 항의하는 사진 몇 장과 연행한 경찰들의 진술서면 검찰에서 기소하고 법원은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경찰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겠냐는 이유가 주된 근거입니다.

전 검사 표현대로라면 저는 '다수의 범죄경력을 가진, 언제 구속될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해고가 부당하다고 거리에 나왔고, 그 거리에서 만난 경찰들의 공무집행에 대해 부당하다고 항의한 결과입니다. 비단 쌍용차 해고자들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수많은 해고 노동자들, 국가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진 제주 강정·밀양·성주의 주민들, 용산 참사 유가족, 세월호 참사 유가족, 고 백남기 농민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뭐든 한 것뿐입니다

지난 2015년 3월 23일, 이창근 실장이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70m 굴뚝 위에서 농성을 풀고 내려오기로 한 가운데,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굴뚝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 무사귀환 바라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지난 2015년 3월 23일, 이창근 실장이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70m 굴뚝 위에서 농성을 풀고 내려오기로 한 가운데,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굴뚝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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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은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보세요."

장장 4년을 끌었던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쌍용차 복직투쟁을 34살에 시작해서 올해 42살이 되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지난 8년간 많은 싸움을 해왔습니다. 고공농성도 하고, 단식도 하고, 길거리에서 농성도 해왔습니다. 무언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논해서 한 일들이 아닙니다. 해고된 동료들과 가족들의 이어지는 죽음을 막을 수가 없어서, 살아남은 해고자들의 고통이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대단한 사상무장이나 결의를 갖고 한 것도 아닙니다. 뭐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떠밀려서 싸움을 이어왔습니다. 갈등하고 뒤를 계속 돌아보지만 포기할 수 없는 마음들로 8년을 견뎌왔습니다. 저는 존엄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싸움들 끝에 어렵게 합의를 했습니다. 그 합의로 공장에 복귀한 동료들과 복귀를 희망하는 저의 동료들이 다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재판장님의 선처를 요구합니다. 고통의 시간이 이제 그만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완벽한 패배는 없습니다. 어떤 싸움이든 일단 시작하면 결과와는 무관하게 패배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의미로 남든 정치적 의미로 남든, 그 싸움에 함께 했던 이들의 기억에 새겨진 그 싸움은 세상 어딘가를 바꾸고 건강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적당히 타협한 것처럼 느껴질 때, '애당초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시작했을까'라는 자괴감이 패배로 비칠 뿐입니다.

물론 하나의 싸움이 일단락될 때 느꼈던 자괴감은 '뭘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절망으로 전이되기도 하지만 그 절망을 뚫고 누군가는 다시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싸움도 있는 것이니까요. 해야만 하는 싸움의 기억이 온통 상처뿐이라도 누군가는 이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다만 그 고통의 기억들이 이제 그만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태그:#쌍용차, #정리해고, #해고자복직, #사법정의, #공무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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