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의 정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수로 나타낸 것'이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고,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은 그의 절반인 428만 9651분의 1이라 한다. 도대체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숫자들이다. 그저 나한테는 그런 일이 없으려니 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하지만 아주 가끔은 확률 상으로 벌어지기 힘든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것인지 모른다.

<내가 사랑한 OOO> 기사공모 메일을 받은 건 휴가 때였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았다. 새 기타를 사기 위해 용돈을 모으는 중이어서 당선작 상금에 혹했던 것도 사실이나, 공모 내용을 읽는 순간 바로 한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갔기에 그 자리에서 펜을 들고 초고를 작성했다. 기사를 송고하는 순간까지도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운이 좋아 당선되면 기타를 살 수 있다는 생각뿐.
(관련 기사 : 배우 박중훈이 건네는 위로... 왜 이렇게 위안이 되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희훈


배우 박중훈의 전화 "우리 만납시다"

그로부터 며칠 후, 편집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마 하는 당선의 기대와 함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내용은 기대와 상상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맙소사, 내가 쓴 기사를 박중훈씨가 우연히 보고, 매니저를 통해 연락처를 물어왔다는 것이다. 뒷덜미 쪽으로 벼락이 내려쳤다.

"전화번호 알려드려도 되나요?" 마음 속에서는 전화번호뿐이겠습니까, 원하시면 주민등록번호,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 결혼기념일 날짜에 군번까지 번호란 번호는 죄다 알려드려도 됩니다, 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최소한의 교양과 자존심을 지켜냈다.

몇 시간 후, 매니저로부터 박중훈씨한테서 곧 전화가 갈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곧, 이라는 단어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심장을 녹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의 단위라는 것을 나이 마흔에 처음 느꼈다. 혹시나 전화를 못 받을까 걱정되어 주머니에 넣고 일을 하며 5분단위로 확인했다. 평상시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아예 받지 않는데, 벨이 울림과 동시에 모든 전화를 받았다.

덕분에(?) 정수기 도우미 아주머니와 오랜만에 통화도 하고, 카드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음과 동시에 새로운 혜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는 고객님의 역할도 해냈다. 그 외에도 시시껄렁한 전화 몇 통을 가까스로 받아 넘기며 하루가 지났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한 그 다음날, 점심 식사를 막 한 숟가락 떠 넣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정혁 기자님이시죠? 저 박중훈입니다."

영화에서 들리던 그의 목소리가 전율과 함께 내 온 몸을 뒤흔들었다. 이후로 나눈 대화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배우 박중훈과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한 달간 들뜨게 할 마지막 멘트를 건냈다.

"제가 어디 좀 다녀올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9월 말쯤에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나 나눕시다."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마치 오래알고 지낸 동네 친형처럼 푸근한 그의 목소리와 가식 없는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어투, 그리고 나를 만나겠다는 어마어마한 약속까지. 전화를 끊고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톱스타>의 박중훈 감독이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희훈


나는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


그 후로 한 달여간 꿈에 부푼 시간을 보냈다. 그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밥을 사준다면 어떤 메뉴를 고를까? 그래도 유명 연예인인데 삼겹살보다는 소고기 정도는 사달라고 해도 되겠지? 아니, 오랜 팬으로써 식사 한 끼쯤 내가 대접해야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일까? 하루에도 수천 번 그와 만나는 상상을 했다.

그와 만나서 어색하게 있다가 대화가 끊기면 일찍 집에 가라고 할지 모른다. 지치지 않고 이야기할 만한 '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편, 이미 여러 차례 본 영화도 있고, 시간이 안 맞아 놓치고 지나간 영화도 있었다. 그의 영화 대사를 따라 연습하다보니 그가 되기 위해 했던 예전의 노력들도 떠올랐다. 어떤 때는 그가 모니터를 뚫고 나와서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를 위해 기타 연주도 연습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스타'에 삽입되었던 최곤의 히트곡, '비와 당신'이었다. 아직 초보 단계라 여전히 서툴지만 진심은 전달 될 거라 믿었다. 새로 산 기타에 유성매직으로 사인도 받아서 가보로 전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영화 <라디오 스타>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그렇다고 핑크빛 꿈에만 젖어 있던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 나만 만나줄 정도로 한가하겠어? 팬 미팅 자리에 초대되어 번호표 120번쯤 받아가지고 맨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있다가 멀리서 손 한번 흔들어주는 걸로 끝나고 말걸, 이란 암울한 생각부터, 바쁜 일정에 나를 잊고 연락이 오지 않는 최악의 악몽까지, 때론 피가 마르는 하루를 보낸 적도 있다.

박중훈과 통화했다는 사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급이 같았다.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정도였으나, 입방정을 찧고 다니면 내가 사랑한 배우 박중훈의 격이 떨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몇몇 지인들에게만 털어놓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뜨겁고 한결 같았다. "나도 데려가 줘!"

휴가 내고서라도 따라오겠다는, 갑자기 열혈 팬이 된 지인들의 극성을 잠재우는데 술값이 적잖이 나갔다. 어떤 녀석은 다음에는 고현정이나 손예진에 관한 기사를 자기 이름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벼락이 아무한테나 치는 건 줄 아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을 달래느라 또 술값이 나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마침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눈물겹게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

(하)편에 계속

박중훈 비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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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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