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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강 너브내길. 낚시하는 사람들.
 홍천강 너브내길. 낚시하는 사람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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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 관광단지부터는 홍천강을 따라 걸었다. 너브네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널찍한 길이었다. 르 그랑샤리오, 테라스의 아침, 까사모로 따위의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웅장한 펜션들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강물 위로 젊은 남자들을 태운 노란 배가 덩실덩실 떠다녔다. 길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팟에 (드디어 꺼낸) 휴대용 스피커를 꼽았다. 볼륨을 최대로 높였지만 소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스피커를 들고 있는 더스틴에게서 한 발자국만 멀어져도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뒤처지고 따라잡기를 반복하는 동안 음악 소리도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흙을 짓이기는 발소리, 드문드문 들리는 더 블랙 키스의 음악이 오늘의 비지엠이다.

"저런 집 사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 거 같아?"


강 건너에는 나무로 지어진, 꽤 멋지고 큰 펜션이 있었다. 이름이 뭘까. 슈퍼 우드 더 그레이트?

"혹시나 해서 한 번 계산해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만큼 많이."

 응아지길. 이름만큼 예쁜 숲길이다.
 응아지길. 이름만큼 예쁜 숲길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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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곡리 마을의 하얀 집
 제곡리 마을의 하얀 집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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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산해봤다. 택도 없겠지만, 내 멋대로 집값이 5억이라고 쳐보자. 내 평균 월급 200만 원. 더스틴 평균 월급 200만 원(물론 훨씬 덜 벌 때가 더 많고, 고용계약이 끝나 몇 달 놀 때도 있지만 아무튼). 월세 및 생활비, 수도요금, 통신료, 전기요금 따위로 들어가는 비용 200만 원. 부모님 용돈 한 푼 안 드리고 급하게 돈 쓸 일이 없다고 치면(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월 200만 원이 남는다(물론 지금껏 한 달에 200만 원을 저금해 본 적은 없다). 그렇게 모아 5억을 뽑으려면 200만 원 곱하기…. 영겁의 세월. 음….

그만두자. 집 하나를 사기 위해 저금해야 할 돈이 너무 많다. 그 돈을 벌기 위해 다녀야 할 회사생활과 야근을 감내할 만큼의 가치는 없어 보인다. 번 돈을 아끼기 위해 포기해야 할 친구와의 만남과 제주도로의 짧은 여행, 수요일 저녁의 기분 좋은 외식은 또 어떻고. 이제 강 건너의 목재 펜션이 저주의 애물단지로 보이기 시작한다.

가당치도 않은 돈을 모으기 위해 반평생 욕망을 죽이고 사느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텐트와 모텔을 전전하며 사는 편이 나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설사 5억이란 돈이 모인다 해도, 집 한 채 따위에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바칠 순 없다는 생각도. 이 생각들을 오늘 밤 반드시 일기에 적어놓고, 60살이 되는 생일날 다시 읽어봐야겠다. 비루한 노인네가 되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으려나. 몰라 몰라. 미래의 늙은 나야, 넌 알아서 잘 살아주리라 믿는다.

 홍천강따라 걷는 너브내길
 홍천강따라 걷는 너브내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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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곡리 마을
 제곡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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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계산해보니까 네 말이 맞아."
"시간 낭비라니까 해봤어? 알잖아. 우리가 부자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어떤 남자는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을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고 한다. 어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여자만은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내 남자는 우리가 부자가 될 일은 없을 테니 그런 환상일랑 집어치우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남자와 결혼해서 손에 물 한 방울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을 뒤집어쓰고 철원에서 부산까지 걷고 있다.

 용암리. 용이 승천했다는 마을에서도 안전이 제일이다.
 용암리. 용이 승천했다는 마을에서도 안전이 제일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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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덕리.
 명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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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면가는 길. 길 양옆에는 깻잎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그 뒤로는 논이 있다. 배고프다. 깻잎에 밥 싸먹고 싶다.
 남면가는 길. 길 양옆에는 깻잎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그 뒤로는 논이 있다. 배고프다. 깻잎에 밥 싸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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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혼하면, 인생이 쉽지는 않을 거야."

북악산 자락에서 프러포즈를 했을 때, 더스틴이 한 말이다. 어느 토요일, 더스틴은 느닷없이 산에 가자고 했다. 올라가는 길목에 철봉이 있었다. 더스틴은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더니 철봉에 올라 턱걸이를 하기 시작했다. 뭐야?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철봉을 하고 내려온 더스틴은 몇 걸음 못 가 다시 멈춰 서더니 이번에는 팔벌려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정상쯤 가서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자고.

우리가 결혼하면 각자의 인생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돈은 못 벌겠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하지 않겠냐고. 나는 그러마고 했고, 우리는 결혼했고, 예상한 대로 각자의 인생은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같이 걷는다. 조금 더 걸어보자고 말하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쭉 가난할 삶을 예감하며, 각자의 배낭을 메고 걸었다. 원주 방향이었다.

 제곡리 마을
 제곡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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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노일리 마을
 남노일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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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요?"

차 한 대가 섰다. 운전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더니 백발의 머리를 곱게 파마하고 보라색 안경테를 쓴 예쁘장한 할머니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어디로 가냐고? 부산? 홍천 한복판에서 웬 부산….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실 거야. 원주? 아니. 원주도 너무 멀어. 미친놈들이다 생각하실 거야. 남면?

"네? 음…. 아. 남면이요. 남면으로 가요."
"아 남면. 난 또 서울 가는 줄 알고. 대명 콘도에 수영하러 가는 길인데. 서울 가는 길이면 대명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

 제곡리 마을에서 만난 쪼꼬미. 쪼꼬만게 엄청 짖는다.
 제곡리 마을에서 만난 쪼꼬미. 쪼꼬만게 엄청 짖는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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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덕리.
 명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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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 생활은 어떨까. 그래도 밥은 먹고 살겠지. 설마 못 먹으려나…. 더스틴은 아직 곁에 있을까. 없으면 슬플 텐데. 만약 함께이지만 함께 하기 싫은 관계라면, 곁에 있지 않은 것보다 더 슬프겠지. 몸은 건강할까. 동네 친구는 조금이라도 있을까. 이 할머니처럼, 고급 차를 끌고 리조트로 수영을 가는 일은 없겠지. 그런 건 바라지 않더라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내 나름의, 어느 정도의 기준은 만족하며 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아마 그건, 지금부터 성실히 준비해야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거겠지.

그러니까 사람들은 오늘도 출근하고 저축하고 운동하는 거겠지. 그래 봤자 배우자와의 관계, 친구 관계, 건강 같은 건 완벽히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모르겠다. 비루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갈 늙은 나야, 미안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너를 지켜줄 수는 없을 것 같아, 오늘도 난 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그냥 걷기나 해야겠다. 네가 비루하고 가난한 건 안타깝지만 그건 조금 먼 얘기고, 난 당장에 점심밥 해결이 시급하거든.

 제곡리에서 남면으로 이어지는 길. 농부가 밭에 약을 뿌리고 있다.
 제곡리에서 남면으로 이어지는 길. 농부가 밭에 약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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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강에서 흘러나온 양덕원천. 해가진다.
 홍천강에서 흘러나온 양덕원천. 해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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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광관지에서 남면(양덕원리)까지 걷기

경로: 팔봉산관광단지 - 너브내길 - 응아지길 - 제곡리 - 남면(양덕원리)
거리: 약 22.1km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이도: 하
추천: ★★★★☆ (대부분 도보 길로 조성해 놓은 길이라 걷기 좋다. 널찍한 홍천강을 따라가다 가끔 숲을 따가 걷기도 한다. 여행의 끝에는 시내인 남면이 기다리고 있어 쉬기에도 좋다!)


경로 소개

팔봉산관광지 - 너브내길

팔봉산관광지를 나서면 펜션이 많이 보인다. 너브내길이 시작하는 길목에 커피숍이 하나 있으니 잠시 쉬었다가(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가도 좋다. 우리는 여기서 쉬다가 점심쯤에나 걷기 시작했다. 수두룩한 펜션 사이사이로 더 많은 펜션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라 가끔 시끄럽긴 하지만, 대부분 한적하고, 평화롭다.

너브내길 - 남노일리

수두룩하던 펜션들이 조금씩 드물어질 때 즈음이 남노일리다. 꽤 예쁜 마을이라 잠시 들어서서 구경해봐도 좋을 것 같다. 몇 개 안 되는 집 앞에는 그 집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 하시는 일들(벌꿀 농장이라든가)이 적혀있다. 막국수를 파는(밥은 없고 막국수만 있다) 식당 겸 펜션이 있다. 이후에는 남면까지 식당이 없으니 참고.

남노일리 - 응아지길

남노일리에서 계속 너브내길을 따라가면 홍천읍이고, 남쪽 길을 따라가면 남면이다. 찻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응아지길이 나온다. 아무도 없는 숲길. 빽뺵한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살 사이를 걷다보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뭐, 그런 기분까지 든다. 가끔 뱀이 출몰해 낭만을 깨긴 하지만. 끝 무렵에 펜션이 하나 있다.

응아지길 - 용암리 - 제곡리 - 남면

용이 승천했다는 용암리를 지나면 제곡리다. 최승희 무용수의 생가가 있다. 민박이 두 군데 정도 있는데 하나는 더  이상 민박을 안 한다고 하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예산에 전혀 맞지 않는 가격이라 패스했다. 작은 냇물과 논밭을 따라 10km를 더 가면 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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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을 썼습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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