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포토뉴스

[남자 찾아 산티아고 17]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 정효정
10월 중순이 넘어서자 점점 추워진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쪼그리고 잤는지 허리가 굳어있었다. 길을 나서면 풀 위에 앉은 하얀 서리가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바에 들어가서 카페콘레체(우유를 넣은 커피)를 사서 등산용 컵에 담았다. 날은 춥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커피는 맛있어졌다.
매일 아침 즐기는 커피 한잔 앉아서 마실 여유는 없어서 보통은 걸으면서 마셨다. ⓒ 정효정
하얗게 서리가 앉은 들판 특히 갈리시아 지방은 높은 산이 많아서 더욱 춥게 느껴진다 ⓒ 정효정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남겨놓은 메시지가 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다. 로그로뇨에서 헤어졌던 한국 순례자 수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가 전해준 이야기는 브라질에서 온 에릭의 러브스토리였다. 그는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겪고, 이번이 두 번째 순례길이라고 했다.

그는 첫 순례길에서 한 헝가리 여성을 만났다. 한눈에 반한 그들은 마주칠 때마다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포옹하고 내일 다시 만나자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그녀와는 계속 엇갈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를 찾던 어느 날, 길 위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그녀의 메시지였다. 다음 마을에서 이틀간 머물테니 찾아오라는...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나 산티아고까지 함께 걸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헤어졌고 에릭은 지금 새 여자친구와 이 길을 걷고 있다. 원래 원거리 연애라는 게 잘되기가 힘든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길 위에 남겨진 메시지들을 찾아봐도 나를 찾는 로맨틱한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3일 정도 앞서 걷고 있는 다비드의 메시지는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들의 사진을 출력해 전봇대에 붙여놓고 크게 "현상수배! 미친 순례자들"이라고 적어 놨다. 전봇대 앞에서 나는 양팔을 허리에 얹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까 내 인생에 로맨스가 없지...
"현상수배, 미친 순례자들!" 이러니까 내 인생에 로맨스가 없지... ⓒ 정효정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이제 길은 점점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 Camino)의 공립 알베르게에 묵었다. 하지만 아침에 쫓겨나듯이 알베르게에서 나와야 했다. 독일 출신의 깐깐한 호스피탈레로는 8시에는 무조건 알베르게를 비우게 했다. 대체 1분이라도 지나면 폭탄이라도 터지는 건지... 우리는 투덜거리며 나섰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8시지만 여전히 어둡다. 등 뒤를 보니 불이 붙는 것처럼 해가 뜨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는 레온산 해발 1500미터의 고지를 넘는다. 이 산에는 라 크루즈 데 이에로(La Cruz de Hierro)라는 철 십자가가 세워져 있있다. 과거 이 지역은 켈트족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산을 넘을 때마다 돌을 놔두며 산신에게 감사하고 산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빌었다고 한다.
라바날 델 카미노의 아침 오전 8시인데도 아직 어둡다 ⓒ 정효정
이 풍습은 오늘날 다르게 변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돌을 가져와 이 철십자가 주변에 놓는다. 그렇게하면 자신의 짐과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돌 뿐 아니라 사람들이 가져온 다양한 물건과 메시지로 가득했다. 

사실 길을 떠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듣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낭만적인 속죄의 풍습에 동참해볼까 생각했지만, 한 가이드북을 보다가 포기했다. 거기에는 그 돌이 자신이 지은 죄만큼 커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아니, 그럼 대체 얼마나 큰 걸 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보다 내 짐과 죄라면 내가 지은 흑역사일 텐데, 여기다 내려놓고 올 성격의 것들이 아니다. 평생 껴안고 가면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두고두고 되새겨야 한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배울 게 있어서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끔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아쉬워 하지만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으면,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때의 무지는 지금의 깨달음을 위해서다.  
철의 십자가 주변엔 돌과 여러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놓여있다 ⓒ 정효정
철 십자가를 지나 미첼과 만났다. 언제나 진지한 얼굴의 미첼,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인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출발하여 1년 4개월째 걷는 중이었다. 그는 남의 집 헛간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대부분의 요리는 코펠과 버너로 직접 해먹었다. 솔직히 겉모습만 보면 그냥 이탈리안 홈리스였다. 그가 1년 4개월을 걷는 동안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자신감이라고 한다.

"대학에서는 내가 똥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 살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적은 돈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일단 살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리게 되었지."

실제로 그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지저스'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주는 인상도 그랬고, 무엇보다 최소한의 재료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저녁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며 우리는 감탄하곤 했다. 내겐 순례길에서 두 번째로 만난 '지저스'인 셈이다. (참고 기사 : 산티아고에서 만난 '지저스', 빛이 났다)

그는 요리뿐 아니라 기타도 연주할 줄 알고, 간단한 마사지도 가능했다. 이탈리아에서 그가 하던 일은 물리치료사였다고 한다. 한번은 다리 근육이 살짝 비틀렸는지 조금 절뚝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불러서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는 그의 손이 내 다리에 닿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모두에게 외쳤다.

"내가 일어섰어. 내가 일어섰다고! 오 마이 지저쓰!"
병든 자를 치유하는 미첼의 모습 요리도 잘하고 마사지도 할 줄 알고, 그야말로 '금손'이었다 ⓒ 정효정
우리는 가끔 그에게 생수병을 들이대며 와인으로 바꿔보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지저스'로 불리는 미첼, 그도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런 그도 사랑의 고민에서 벗어날 순 없나보다. 그는 철의 십자가에 전 여자친구의 머리끈을 놓고 왔다고 했다.

"그녀를 못 잊어서? 안 좋게 헤어졌어?"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달렸던 자기 자신과의 결별이라는 것이다. 이 친구는 1년 4개월을 걷더니 이대로 출가라도 할 기세다.
철의 십자가에 두고 간 누군가의 짐 하단에 미첼이 묶어 두고 간 파란 머리끈이 있다 ⓒ 정효정
우리는 사랑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류가 사랑을 하는 것은 아기가 귀여운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아기의 토실토실한 볼살과 오동통한 엉덩이는 사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학설이 있다. 종의 보존을 위해 아이는 귀여운 방향으로 발달되었는 거다. 미첼은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인간이 사랑을 느끼는 생명체인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일 거야. 인류는 서로 사랑을 하고 협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을 더욱 잘 느끼도록 진화된 거지."
"그럼 그것도 인류의 위대한 능력 중 하나겠네. 그렇다면 인류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선 사랑을 좀 더 잘 느끼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러니까 전 여자친구의 머리끈 같은 건 버리지 말고 말이야."

하지만 미첼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은 중요한 능력이기 때문에 큰 책임이 뒤따르는 거야. 그러니 이 감정을 잘 쓰기 위해선 잘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때문에 집착하거나 속박당해서는 안되지."

아아, 저 진지함이라니...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영화<스파이더맨>의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 모두가 미첼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짝사랑으로 가슴 아플 일도, 상대의 잘못된 집착으로 고통을 받는 일도 없게 되겠지. 아마 인류진화의 최고봉은 수련으로 사랑에 대한 내공을 기르고, 필요한 순간에 장풍처럼 쏠 수 있는 단계가 될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오게 되길 바랄 뿐이다. 
만하린의 화장실 표시 철의 십자가를 지나면 있는 만하린 알베르게 ⓒ 정효정
이 길에 서려있는 에너지

철의 십자가에서 10km 정도 내려가면 만하린(Manjarin)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는 버려진 마을의 옛 병원을 개조한 알베르게가 하나 있다. 중세의 수도원처럼 전기도 없고 씻을 물도 없다. 심지어 화장실도 재래식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호스피탈레로 토마스는 어느 날 까미노를 여행하다가 꿈을 꿨다고 한다. 이곳에 순례자를 위한 쉼터를 세우라는 계시였다. 그는 템플 기사단 소속이라고 한다. 템플 기사단은 중세 때 설립된 서방 교회의 기사 수도회인데, 아직도 그 가르침을 이어받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해준 것은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온 초르키였다. 그는 이곳에서 린다라는 개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둘은 자전거로 순례중이었는데, 이 똑똑한 개는 자전거가 달릴 때 매달린 짐수레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만하린의 알베르게 불편해 보이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곳이다 ⓒ 정효정
자전거로 여행중인 순례자와 개 이번이 3번째 순례라는 초르키아저씨와 첫번째라는 개 린다. ⓒ 정효정
초르키와 함께 여행이야기를 했다. 그는 인도의 라다크나 네팔의 히말라야에서도 트레킹을 했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다. 걷다보면 이 순례길을 몇 번씩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체 산티아고에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람들은 반복해서 이 길을 걷는 걸까? 

"에너지 때문이야. 이 길은 기독교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성지였어. 이 루트를 따라 특별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거든."

초르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길의 에너지 때문에 고대 켈트족뿐 아니라 동물들이나 철새들도 이 길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런 맑은 기운이 이 루트를 성지로 만들었고, 지금은 가톨릭 교도가 아닌 이들까지 이곳을 걷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갈리시아 지역의 아침 초르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성한 땅이었다고 한다. ⓒ 정효정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도전에 나선 사람은 깊은 영혼을 지니게 되지. 특히 네팔의 히말라야나, 인도의 라다크, 산티아고 순례길... 이렇게 특별한 에너지가 있는 장소에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밝음과 직관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이벤트야."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정말 중세의 템플 기사단 복장을 한 토마스가 등장했다. 나는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양 펄쩍 뛰어올랐다. 세상에, 영화에 나오는 복장과 똑같다! 그에게 부탁해 인증샷을 찍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묵시아에 가도록해. 사람들은 피네스테라에 가지만, 그것은 지도상의 끝일뿐이야. 이 땅에 흐르고 있는 고결한 에너지는 사실 묵시아로 통하거든."

초르키의 당부를 듣고 산을 내려왔다. 아래 마을에서 친구들을 만나 진짜 템플 기사단을 만났다고 자랑하며 사진을 보여줬다. 내 눈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아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만 한  믿음이지만, 세상엔 이렇게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하린의 주인장 토마스 정말 템플 기사단의 옷을 입고 있다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순례길, #CAMINO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