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녀는 결코 산티아고에 닿지 못했다
▲ [남자 찾아 산티아고 16] 그녀는 결코 산티아고에 닿지 못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여행을 많이 했지만, 사실은 길치다. 가장 큰 문제는 지도를 못 읽는 거다. 그래도 여태껏 큰 곤란은 없었다. 신은 내게 지도 읽는 능력은 주지 않았지만, 대신 얼굴에 깔 수 있는 철판을 주셨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낯선 사람들에게 길을 잘 물어보는 편이다. 언어가 안 통해도 상관없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끝까지 가서 다른 사람 잡고 또 물어보면 되니까.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며, 최소한 여기선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도 다른 순례객들이 있고 노란 화살표와 하얀 조개껍질이 방향을 표시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길을 잃곤 했다. 걷다보면 어느새 화살표가 안 보일 때가 있다.

일단 스스로 길을 잃었음을 인식했을 때는 마지막으로 노란 화살표를 본 곳까지 이동해서 다시 움직이는 편이 낫다. 문제는 길을 잃은지도 모르고 그냥 가고 있을 때다. 길치들의 특징이 잘못된 길을 확신있게 간다는 거다.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데 그걸 못한다
▲ 순례길의 노란 화살표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데 그걸 못한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다행인 건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다. 한참 걷다보면 저 멀리서 누군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를 부르는 건가 싶어서 되돌아보면, 현지인이 나를 향해 스페인어로 뭘 물어본다.

"블라블라블라 까미노(Camino)?"

순례길을 뜻하는 현지어 까미노만 알아듣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가 가는 방향 반대길을 가리킨다. 아, 혼자 엉뚱한 산을 넘을 뻔했다. 그런 일이 한 3번 정도 반복되자 학습능력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 주변에 사람이 없고 화살표도 없으면 다른 순례자가 올 때까지 좀 기다려본다. 이 길을 매년 23만 명이 걷는데, 아무도 안 오면 내가 잘못 가고 있는 거다. 그럼 마지막 화살표를 본 지점까지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

마지막에 본 장소까지 되돌아가는 것이 낫다
▲ 길을 걷다가 노란 화살표를 잃어버리면? 마지막에 본 장소까지 되돌아가는 것이 낫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산티아고에서부터 거꾸로 오는 사람들을 위한 표시다
▲ 파란 화살표 산티아고에서부터 거꾸로 오는 사람들을 위한 표시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가급적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시간대에 걷도록 해야한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건 당연히 위험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하기에 혼자 너무 늦게 출발하는 건 피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순례 23일 차의 오후 1시, 나는 혼자 레온을 떠나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aramo)을 향해 출발했다. 다른 친구들은 아침 일찍 떠나고, 함께 가기로 한 릴리는 갑자기 더 이상 걷지 않고 기차를 타겠다고 선언했던 터였다.

레온시를 빠져나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주변의 위성도시를 통과하자 길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갈림길을 두고 어디로 가야하나 싶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오후 시간이다 보니 다른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다른 순례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길을 걸으며 한두 번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다. 물어보니 이 방향이 맞다 한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고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 레온시를 떠나 걷는 길 도로를 따라 걷는 길고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길은 줄곧 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한 코스다. 그런데 중간에 길은 차도 옆을 벗어나 터널로 이어졌다. 앞서 간 그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노란 화살표는 여기로 향해있긴 하지만 터널이 꽤 어두워서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 갑자기 터널 저쪽 끝에 아까 마주친 그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손동작으로 그쪽으로 가는 거냐고 묻자, 그는 OK 사인을 한다.

터널을 지나자 그는 또 보이지 않는다. 저쪽 길 끝에 그가 보였다. 길 위에는 그와 나뿐이다. 그는 앞서서 걷다가 내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걷곤 했다. 내가 안 보일 때는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내가 나타나면 그는 멀리서 손을 들어 보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나를 인도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오후 6시. 기진맥진해서 들어가자 먼저 와있던 지블란과 미첼이 깜짝 놀란다.

"너 혼자 온 거야? 릴리는?"

릴리가 기차를 타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래서 여태 혼자 걸어 온 거야?
"아니, 방금 전까지 누구 있었는데..."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찾아보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발가락양말 천사에 이어 또 다른 천사였나 보다.

잘못된 이정표

아스트로가(Astorga)로 향하는 날, 아침에 지블란이 오더니 말한다.

"아스트로가 근처에서는 꼭 사람들하고 같이 움직이도록 해." 
"왜?"
"거기가 얼마 전 사고 났던 데야."

얼마 전 사고... 2015년 4월 산티아고를 순례하던 미국인 여성이 실종 5개월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녀는 아스트로가에서 8km 떨어진 인근 마을의 외딴 농장에서 살해당했다. 범인은 노란 페인트를 사용해 순례자가 자신의 농장에 오도록 화살표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 아스트로가를 떠난 그녀는, 홀로 1시간을 걸었고, 잘못된 이정표인지도 모르고 그의 농장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이 길이 아니니 돌아가라는 표시가 있기도 하다
▲ 노란 화살표 이 길이 아니니 돌아가라는 표시가 있기도 하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가끔 순례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우려 섞인 말들을 주고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착잡하다. 나 같은 길치가 당하기 딱 좋은 함정이었다. 새삼 운 좋게 다니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순례객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건 사고도 늘어나는 추세다. 2015년 1월, 한 한국순례자가 산티아고 근처에서 권총강도를 만난 일도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친 곳 없이 배낭만 빼앗기고 끝났다고 한다. 눈앞의 권총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한 결과였다고 들었다. 정말 천운이 아닐 수 없다.

결투에 진 300인의 기사는 산티아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지도록 했다
▲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를 벌인 다리 결투에 진 300인의 기사는 산티아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지도록 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이 마을에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한 기사의 결투가 펼쳐졌다
▲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의 이야기가 묘사된 표시 이 마을에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한 기사의 결투가 펼쳐졌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산티아고 순례길 뿐 아니라, 어딜 여행하든 남녀를 불문하고 지켜야 할 수칙이 있다. 가능한 남들이 다니는 시간대에 다녀야 하고, 늘 앞뒤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당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 역시 큰 문제를 일으키기보다, 가진 돈을 원하는 경우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걸까. 여행의 매력은 여행을 하며 아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매사에 무감각한 어른의 탈을 벗고, 다시 아이의 눈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다. 우리를 여행으로 이끄는 것은 그 짜릿함이 아닐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즐거움을 위해 낯선 곳을 선택한 만큼, 여행지에서 여행자는 아이만큼 무지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여행의 이면이다.

이미 한 번 한 이야기지만, 길이 성스럽다고 이 길의 모든 사람이 성스러운 건 아니다. (관련 기사 :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변태오빠들) 변태가 있을 수도 있고, 강도가 있을 수도 있고, 좀도둑이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자신의 행동반경을 벗어나 낯선 곳에 갈 때는 늘 기억해두어야 한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그녀는 결국 산티아고에 닿을 수 없었다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긴 다리가 있다. 1434년 레온출신의 한 기사가 여인에게 사랑고백을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한다. 그는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표시로 이 다리를 지나는 기사들에게 창 시합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300개의 창이 부러질 때까지 싸워 승리하고 용맹한 기사가 되어 실연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싸움에 진 기사들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 다리를 끝으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 길은 1km 정도 짧지만 마을 끝 도로를 따라가고, 다른 길은 조금 돌아가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산길이다. 산길을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슬슬 지쳐가고 목도 마를 무렵, 크레파스로 무지개가 그려진 특이한 간판을 하나 만났다. "신의 집 (House of God)" 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형형색색 요란한 간판을 따라가면 사랑스런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다
▲ 길을 걷다 발견한 간판 이 형형색색 요란한 간판을 따라가면 사랑스런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수지는 산티아고에 가지않고 데이비드 곁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 수지와 데이비드의 보금자리 수지는 산티아고에 가지않고 데이비드 곁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신의 집이라... 설마 이 길로 가면 거기(?)로 가는 건가. 벌써 내가 거기에 갈 때가 되었나. 별의별 상념이 다 스친다. 의문을 느끼며 오르막을 다 오르니 가판대가 있다. 산티아고 길에는 이렇게 기부금을 내고 음료나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가판대가 곳곳에 있었다. 그 가판대의 주인공은 딱 봐도 히피 같아 보이는 두 사람이다. 수지와 데이비드 커플이었다.

7년 전 브라질에서 온 데이비드, 이혼을 하고 설상가상 회사까지 망했다고 한다. 그때 구원이 되어 준 것은 바로 이 길, 산티아고였다. 그는 이곳에 정착해 오가는 순례자들에게 봉사를 하며 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호주에서 온 수지, 그녀는 3개월 전 이곳에 와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데이비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결국 산티아고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아, 내 꿈이 저렇게 이루어지다니. 나는 아무리 찾아도 사랑에 빠질 남자가 안 보이던데. 굳이 산티아고까지 안 가고 싶은 건 나인데... 절망스럽다. 늘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손잡고 이 길을 내려가 바르셀로나로 떠나겠다고 외쳤지만, 어느새 산티아고 도착이 대략 열흘 앞으로 가까워진 터였다.

평원 너머로 우뚝 솟은 아스트로가 대성당이 보인다. 중세에 길을 걷던 사람들도 힘들고 지쳤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성당의 존재에 안도감이 들었을 거다. 아스트로가에는 이 산타마리아 대성당과 안토니오 가우디가 지은 주교관(Palacio Episco-Pal)이 있다. 가우디의 천재성을 믿어주던 주교가 죽고 나자, 건물은 애초 가우디의 설계와는 많이 달라진 채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지금 주교관은 카미노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가까워 보이지만 거의 희망고문 수준이다. 꽤 멀다
▲ 아스트로가 성당 가까워 보이지만 거의 희망고문 수준이다. 꽤 멀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시작할 때와 달리 결과는 가우디의 설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까미노 박물관 시작할 때와 달리 결과는 가우디의 설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정효정

관련사진보기


다음날 아스트로가를 떠나며 생각했다. 이 길의 모두가 산티아고를 향해 걷지만, 모두가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의 이유나 부득이한 상황으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길을 걷는 동안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 인연은 우리를 멈추게 하기도 하고 계속 걷게 하기도 한다. 

다행히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 선한 인도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길에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악인도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산티아고로 가는 것을 멈추게 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길 위에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자의 도착점은 달라진다. 오늘 나의 무사한 하루는 내가 만난 수많은 선한 인연들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CAMINO, #아스트로가, #순례길 살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