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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천지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이도백하(얼다오바이허, 二道白河)로 향했습니다. 허한 웃음만 나옵니다. 안개와 구름 때문에 천지를 보지 못했다면 "내가 복이 없어서!"라고 자위하겠지만. 관광객이 많아 천지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변해버린 이도백하 모습에

이도백하는 백두산 관광의 관문입니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백두산을 다녀옵니다. 버스 정류장과 기차역이 있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편리하고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여 먹고, 자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도백하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개발 바람은 백두산 자락 시골 마을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을 곳곳에 리조트와 호텔 건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족의 영혼이 깃든 '백두산'이 관광지 '장백산'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변해버린 시내
▲ 이도백하 시내 모습 너무나 변해버린 시내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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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을 아세요?"라고 물었는데 한족 택시 기사는 조선족 식당에 내려놓았습니다. "뱅겁습내다!" 주인이 평안도 사투리로 인사를 건넵니다. '개고기 랭면부 레스토랑'이라는 식당 이름도 정겹습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조선족 자치구'인데도 조선족 인구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식당 종업원도 손님도 모두 중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없어요!"라는 주인장 푸념이 이해됩니다.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해소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차가운 것을 싫어합니다. 물도 맥주도 밍밍합니다. 얼음처럼 시린 맥주 한 잔으로 천지에 대한 미련을 날려버렸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주위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리 표지판과 상가 간판은 중국어와 우리말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녹지대에는 미인송(美人松)과 장백낙엽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8월 초의 뙤약볕인데도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이도백하의 백미 '미인송' 숲길
▲ 미인송 이도백하의 백미 '미인송' 숲길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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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백하'의 조선족 식당 모습
▲ 조선족 식당 '이도백하'의 조선족 식당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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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역(바이허, 白河)입니다. 아침에 도착했던 곳인데.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요녕성(랴오닝성, 辽宁省) 성도인 심양(선양, 瀋阳)으로 떠납니다. 오라는 곳도, 반기는 사람도 없지만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밤 기차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료와의 간격도 좁혀줍니다. 밤을 함께 지새우면 자신도 모르게 속내가 터져 나옵니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깼습니다. 문틈으로 담배연기와 이야기 소리가 흘러들어옵니다. 승무원들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담배에 대해 관대합니다. 기차 객실은 금연이지만 객차 사이 공간에 재떨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담배 연기와 성조가 있는 그들의 대화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었습니다.

백하에서 심양으로
▲ 백하역 백하에서 심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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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과 객실 사이에 비치되어 있음
▲ 재떨이 객실과 객실 사이에 비치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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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흔적이 있는 '심양'

심양은 요녕성 성도로 동북삼성의 중심지이자 북경, 상해, 천진과 더불어 중국 4대 도시 중 한 곳입니다. 심양은 고구려 영토였으며, '소현세자의 한'이 서린 곳이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배경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 땅에 살 수 없었던 백성과 독립군이 이주하였습니다. 도시 전역에 우리 역사의 흔적이 있습니다.  

심양고궁(瀋陽故宮)입니다. 청나라 시대 고궁으로 한족, 만주족, 몽고족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베이징 고궁의 12분의 1로 작은 규모지만 궁의 보존 상태가 좋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후금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두 명의 황제가 8년간 수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심양 고궁 입구
▲ 패방 심양 고궁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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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표지판
▲ 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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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 제곱미터의 왕궁은 동로, 중로, 서로를 구분하여 20개의 정원과 90채의 건물로 구성되었습니다. 북경의 자금성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존 상태와 건축적 아름다움은 뒤지지 않습니다. 35도를 넘나드는 더위 속에서는 관광도 사치입니다. 따가운 뙤약볕을 피해 조심스레 왕궁을 둘러봅니다.

고궁 안에 있는 봉황루 모습
▲ 봉황루 고궁 안에 있는 봉황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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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과 역적 사이

고궁 인근에 있는 '장씨사부(張氏帅府)'로 향했습니다. 마적단 출신으로 동북 지역 최대의 군벌로 성장한 장작림(장쭤린, 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학량(장쉐량, 張學良)의 사저입니다. 친일 군벌이었던 장작림은 일본의 배신으로 1931년 철도 폭발 사고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장학량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가담하여 일본과 전면전을 주장하였습니다. ​

오늘날 중국 정부가 국민당원이었던 장학량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서안사변' 때문입니다. 서안사변은 일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소탕에 전념했던 장개석을 장학량이 감금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으며 공산당이 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 주원래(저우언라이, 周恩來) 수상은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하였지만 대만의 장개석(장제스, 蔣介石)은 그를 대만으로 끌고 가서 1990년까지 40년을 연금하였습니다. ​

아버지 장작림이 사용했던 사저 모습
▲ 사저 모습 아버지 장작림이 사용했던 사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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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사부 앞 광장에서
▲ 장학량 동상 장씨사부 앞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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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사부'는 1914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3만 600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거대한 규모의 중국과 서양의 혼합식 건축물이 만들어졌습니다. 규모나 화려함이 인근 고궁 못지않습니다.

중국 근·현대사의 주역이었지만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풍운아의 모습을 심양에서 만났습니다. 혈기와 이상으로 세상을 바꾸려했던 젊은 혁명가는 2001년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그의 사저 앞에서 젊은 시절의 이상을 간직한 체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왕조도 권력도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심양에서 깨닫습니다.


태그:#심양(선양), #고궁, #장작림, #장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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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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