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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아 식물원에는 이름 모를 꽃이 만발하다.
 봄을 맞아 식물원에는 이름 모를 꽃이 만발하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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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다. 특히 동남아에 살 때는 한두 달이 멀다고 집을 비웠다. 그러나 단체 여행의 기회를 가져보지는 못했다. 가끔 길을 잃으며 황당한 일도 경험하는 비효율적인 여행만을 다녔다. 아마도 관광보다는 생소한 환경을 기웃거리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변명은 가지각색이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는 산악인의 궤변이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으며 여행객은 길을 떠난다. 나의 궤변은 무엇일까. 특별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가장 근사한 이유는 떠나고 싶어 떠나는 것뿐이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는 산악인의 변명처럼.

타즈마니아(Tasmania)에 가기로 했다. 시골에 사는 우리 집을 찾은 지인과 이야기하다 뜻이 맞아 함께 가기로 했다. 우리가 먼저 가면 직장 생활에 얽매인 지인은 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합류하기로 했다. 

타즈마니아는 호주 남쪽에 있는, 호주의 제주도라고 불러도 좋을 섬이다. 그러나 규모는 남한의 70~80% 정도 되는 큰 섬이다. 섬의 25% 정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환경이 좋은 곳이다. 20년이 넘는 아주 오래전에 일주일 정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다. 호주에서는 여름인 크리스마스 때였지만 무척 추웠고 호바트(Hobart) 항구에서 맛보았던 참치회가 맛있었다는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짐을 챙긴다. 추울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는 곳이라 두툼한 옷과 등산화도 챙긴다.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워야 하기에 전기 스위치도 끄고 화분에는 물도 듬뿍 준다.

적당히 게으름도 피우면서 떠나는 850km 여행길

800km가량을 신호 하나 받지 않고 달린다, 달린다, 또 달린다.
 800km가량을 신호 하나 받지 않고 달린다, 달린다, 또 달린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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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까지 내려가 지인의 집에서 하루 묵고 타즈마니아로 향한다. 아니, 멜본(Melbourn)으로 향한다. 멜본에서 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멜본까지는 850km 이상 되는 거리지만 자동차로 하루에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리하며 운전하고 싶지 않다. 가는 길에 적당한 곳에서 쉬며 게으름을 피울 생각이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이상으로 여정도 중요하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출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시드니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골 도로에 익숙한 사람은 참기 어려울 정도의 서행이다. 드디어 시드니를 벗어나 고속도로(Hume Highway)에 오른다. 이 길만 따라 800km 정도를 달리면 멜본 근교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거리를 신호등 하나 받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봄 풍경이 예쁘다. 멀리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 떼가 하얀 꽃이 피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도로 양편으로는 와틀(Wattle)이라는 호주 토종의 노란 꽃이 막 피어오르고 있다. 유채꽃으로 뒤덮인 들판을 만나기도 한다. 집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를 빠져 알버리(Albury)라는 동네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기로 한다. 제법 큰 동네다. 호주의 유명한 머리 강(Murry River)이 동네 한복판을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한복판에 들어서니 하얀 기념비가 보이는 작은 산이 동네 끝자락에 보인다.

동네를 한눈에 보기에 좋은 곳이다. 굽은 도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가니 전쟁 기념비가 있다. 물론 한국전쟁도 기록돼 있다. 호주를 여행하다 보면 작은 동네까지 전쟁 참전 기념비가 많다.

노부부의 친절, 호주의 순박함

알버리 전쟁 기념탑. 호주는 군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알버리 전쟁 기념탑. 호주는 군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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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시내를 내려 보고 있는데 노부부가 다가온다. 지난 며칠 동안 비가 많이 내려 강이 얼마나 불었는지 보러 왔다고 한다. 꾸밈새나 말투로 보아 이곳 토박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숙박할 곳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즐거운 여행하기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호주 시골의 순박함을 본다.  

모텔에 짐을 풀고 동네를 돌아본다. 1810년 지었다는 고전풍이 넘치는 건물을 비롯해 옛 석조 건물이 많다. 역사 있는 동네라는 인상을 준다. 숙소 가까운 곳에 있는 식물원도 둘러본다. 봄을 알리는 꽃들이 기지개 켜는 모습을 본다. 어린이를 위한 식물원도 있다. 아이들이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공원이다. 

다음 날 아침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며 일어나 다시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점심쯤 되어 비가 흩날리는 멜본에 도착했다. 타즈마니아 가는 배를 타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로열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을 찾아 나선다. 식물원을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몇 번 들렸던 곳이다. 호수 곁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커피 향을 돋운다. 

배 타는 곳에 도착했다. 이미 긴 자동차 행렬이 배에 오르고 있다. 캐러밴이나 자그마한 배를 끌고 가는 자동차도 보인다. 타즈마니아는 11월부터 관광 철이지만 지금도 찾는 사람이 많다. 호주 사람은 여행을 참 좋아한다.

직원 서너 명이 배에 오르는 자동차를 일일이 조사한다. 우리에게도 다가와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라고 한다. 채소와 과일 등은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서부호주(Western Australia)에 갈 때도 조사를 했다. 과일이 아까워 서부호주 경계에 앉아 사과를 먹던 생각이 난다. 많은 사람도 우리처럼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먹고 있었다. 

배가 떠난다. 난간에 나가 멜본을 사진에 담는다. 육중한 배에 바다가 갈라지며 흰 거품을 내뿜는 밤하늘에는 갈매기가 떼를 지어 따라온다. 광장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를 보며 죽은 애인을 떠올리던 주인공, 남과 북의 이념에 짓눌려 삶을 마감하던 모습이 애련하게 떠오른다.  

잠자리에 든다. 큰 바다로 나와서인지 배의 흔들림이 크다. 내일 아침이면 타즈마니아에 도착할 것이다. 평소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태그:#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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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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