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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개신교회사에 그렇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성경을 전해주려다가 대동강변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최초의 순교자고, 감리교 첫 내한 선교사는 매클레이 목사였다고 말이죠. 그런가하면 깡패 이기풍이 마페트 목사에게 돌을 투척해 턱이 패일 정도였는데, 훗날 이기풍이 변화돼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죠.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 책표지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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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개신교의 초기 수요저녁예배와 금요기도회는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예배 형태였다는 이야기, 또한 새벽기도회는 그 옛날 선조들이 정화수를 떠 놓고 빌던 무속적인 신앙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들도 그렇죠. 그런 내용들이 초기 개신교 역사에서 아주 자연스런 흐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간된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에서는 그런 내용들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순교라기보다는 19세기 무력선교를 앞세운 그의 과욕이 부른 죽음일 뿐이고, 감리교의 첫 내한선교사로 알려진 매클레이는 단순한 방문선교사일 뿐, 진정한 공식 주재선교사는 알렌 의사였다고 말이죠.

새벽기도회도 무속신앙을 차용한 것과는 달리, 4대문의 파루(罷漏) 시각에 맞춰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에 모여 기도하던 것이 그 시초였다고 하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동아시아에서 토마스의 방식처럼 무력에 의존한 선교는 부정되었다. 1890년대 초 마페트 등이 평양에서 전도를 시작할 때, 주민들은 여전히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사람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며, 서학의 일부인 예수교를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마페트와 다른 선교사들이 불식시키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바로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토마스 식의 힘을 앞세운 선교였다. 그들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없었다면 평양에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46쪽)

"굳이 따지자면 목사가 아닌 평신도에 의해, 신학이 아닌 의술에 의해, 기독교 복음보다 기독교 문명에 의해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이 열렸다. 1884년 9월 22일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날이 개신교 첫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다. 그는 10월 26일 가족과 함께 서울에 다시 와서 정착했다."(90쪽)

"성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반이나 5시에 모여 새벽기도회를 가진 뒤 곧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 운용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반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이나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던 것과 달리,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418쪽)

뭐랄까요? 옥성득 교수의 주장은 완전히 대 반전을 가져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철석같이 믿었던 신념들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것과 같죠.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아닙니다. 1차 사료를 비롯해, 1차 사료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1차 자료 그리고 잘못된 2차 자료가 생산된 과정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신빙성이 크죠.

그것은 마치 교회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교회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되는데, 한국개신교 초기 역사에서 겪었던 그런 모습들을 바로 잡고자 한 것이죠. 그래서 한국개신교 초기 1세대가 생산한 원자료로 되돌아가 차근차근 되짚어주고 있습니다. 뭔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역사적인 오류와 적폐를 제거하고 바로잡는 게 필요하죠.

그래서 그는 백낙준의 〈한국 개신교사〉에 나오는 선교사관 곧 '선교의 확장사'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선교사가 주체가 된 피선교지에서 기독교의 확장이라든지, 타 종교인의 개종, 타종교와의 혼합 반대 그리고 기독교의 정체성 유지 등을 밝힌 백낙준의 주장은 우리나라 교회가 직면한 과제라기보다는 미국 기독교의 당면 주제였다는 것이죠. 한 마디로 미국기독교를 한국 기독교에 이식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백낙준 교수가 해방 후 연세대 총장과 문교부장관직, 그리고 참의원 의원과 의장을 맡는 정치가로서의 길을 걸어갈 때,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사 연구는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하죠.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요구가 너무 거셌던 걸까요? 그 까닭에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런 선교사관에 입각한 한국개신교 초기 역사를 써 내려갔던 것일까요?

그런데 옥성득 교수는 백낙준 교수의 선교사관만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1960-1970년대 민경배의 민족교회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죠. 이른바 박정희 독재 정권 치하의 고통받는 민족과 민중의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화되고 이원론적인 신비주의가 충만한 한국개신교가 어찌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느냐는 주장이 그것이죠.

그래도 민경배 교수를 높이 평가하는 게 있죠. 대선배인 백낙준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새 길을 열었다는 게 그것이죠. 그야말로 정치적인 입지 면에서도 자유롭지 않았을 그 시대에, 도전과 개척과 비판정신이 없었다면, 어찌 그런 백낙준의 선교사관을 비판할 수 있었겠냐는 뜻입니다.

지금 옥성득 교수가 한국개신교 초기 역사에 대해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지 않을까요? 뭔가 그릇된 선교사관이나 엉뚱한 민족교회론을 바르게 잡고자 하는 것 말이죠.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입니다. 한국개신교 초기 교회사에 분명한 교회론도 존재하고 있었고, 신비주의적이지 않는 현실 참여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애썼고, 외세에 물들지 않는 토착적인 민족교회론을 세우고자 했다는 점들 말이죠.

그 중에서도 초기 한국개신교가 급성장한 이유에 대해 옥성득 교수는, 사회학이나 거대담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 민족주의 형성'과 '기독교 문명'에 이어, 세 번째로 '기독교 토착화'를 들고 있죠. 개신교는 그만큼 민족의 문제에 참여적이었고, 봉건적 가치를 부정한 채 근대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문명을 소개했고, 동시에 전통 종교들과 접촉점을 찾아 기독교화하는 토착화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개신교 정치 지형도(1905-08년경), 이 책 371쪽에 있는 도표입니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좌측 상쪽에 무게중심이 있었다고 하죠. 그 뒤 1910년에는 애국계몽파가 해외로 이주하면서 약화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문명론의 교육 운동이 오른쪽으로 옮겨갔다고 평가하죠.
▲ 초기 개신교 정치 지형도 초기 개신교 정치 지형도(1905-08년경), 이 책 371쪽에 있는 도표입니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좌측 상쪽에 무게중심이 있었다고 하죠. 그 뒤 1910년에는 애국계몽파가 해외로 이주하면서 약화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문명론의 교육 운동이 오른쪽으로 옮겨갔다고 평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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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한국 초기 개신교의 민족주의 지형도를 위 도표와 같이 설명합니다. 기원 후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4개의 종파가 민족문제를 놓고 각각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면, 1905-1907년 어간의 한국개신교는 초월적인 부흥파와 교육을 내세운 애국계몽파가 서로 겹치면서 주류를 이뤘다는 것이죠. 더욱이 의병투쟁이나 암살 운동에 가담한 소수의 무력항쟁파도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친일파나 세상을 등지는 은둔파는 없었다고 하죠.

"총독부는 이러한 기독교 민족주의를 탄압하기 위해 1910년의 안명근 사건을 계기로, 1911년에는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600여명을 체포하고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체포되어 유죄 선고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이 개신교인이었다. 105인 사건 이후 개신교는 상당 기간 성장세를 멈추었다. 외부적으로 총독부의 탄압과 교육령과 같은 규제가 작동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약화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그 운동을 가져간 만주나 해외에서의 개신교는 성장하였다."(372쪽)

왜 이와 같은 내용들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1910년 이전의 한국개신교는 그래도 건전한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한 운동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걸 주장하고자 한 것이죠.

그만큼 한국개신교는 반봉건 근대화 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했고, 그러한 정치사회적인 토착화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신학과 의례와 건물 등에서도 한국적인 기독교를 만들어가는 토착화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오늘날의 한국개신교가 초기개신교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들이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강압적인 선교형태는 배제하고 타종교의 문화를 포용하는 정책도 중요할 것이고, 신비주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믿음보다는 현실참여적인 민족교회를 이루는 것도 절실하겠죠. 그를 위해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도 경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한국개신교 초기 1세대가 생산한 원 자료를 차근차근 되짚어주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개신교가 어떤 진실을 추구해야 할지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한 손으로는 하나님과 영교하는 수직성을 담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기도회부터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옥성득 지음, 새물결플러스(2016)


태그:#토마스 목사, #백낙준, #민경배, #조선총독부, #새벽기도회 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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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오래 남는 법이죠. 일상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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