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42장>

무영객의 최후를 배웅한 예진충은 검을 거두고 담곤을 향했다. 담곤은 주춤주춤 뒷걸음치다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 수월정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진충은 천천히 담곤을 향해 갔다. 예진충이 정자 계단을 올라 담곤과 마주 섰다. 담곤은 정자의 난간에 섰다. 지난 3개월이 한순간처럼 뇌리에 스쳤다.

5개월 전 동창의 첩형관이란 자가 비룡표국에 나타났다. 그자는 은화사 비첩을 꺼내며 무극진경의 행방을 물었다. 담곤은 모른다고 답했다. 아니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는 그다지 믿지 않는 기색였다. 태허진인의 제자가 알지 못하면 누가 알겠느냐 식이었다. 담곤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걸 설명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진경을 입수할 수 있도록 움직여 보겠다고 했다. 첩형관은 진경을 입수하면 필히 은화사에 넘기라고 했다.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무덤에서 잠자던 송장도 벌떡 일어난다는, 동창의 태감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인 만큼 부디 성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떠났다.

담곤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관(官)의 명령보다 자신의 무공 회복이 중요했다. 그동안 망설이고 망설여왔던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어차피 동창이라는 최고 권력기관이 입질하기 시작했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말만 믿고 물러설 은화사가 아니다. 그들의 권력과 무력과 금력으로 볼 때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입수코자 할 것이다. 동창의 협박·매수·이간에 의해 강호인은 크게 동요할 것이고 무림은 큰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면 선수를 치자. 진경을 먼저 입수한 후 동창과 거래를 하자. 그들이 진경을 입수한들 하루아침에 그 비결을 해독할 순 없다. 진인의 제자인 자신의 주석과 시현이 필요하다. 그걸 빌미로 진경에 씌여 있는 현문지공의 요결을 터득하자. 자신의 막혀 있는 기맥을 뚫고 무공을 회복하자.

그가 당대 최고수 무영객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적어도 습평과 모충연을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진. 그러나 이후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신이 노출됐을 뿐만 아니라 부상까지 당했다. 다행이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 묘적암까지 무영객의 추적이 이어졌다. 그는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개봉에 있는 상대부에게 연락했다. 이레 후 낙수의 수월정에서 만나기로. 그때쯤이면 네 가지 유품이 자신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는 이 거래에서 모든 걸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과 무공과 더불어 금전까지도.

"푸하하하, 인생이 한낱 꿈이라면 무림은 뜬구름이 아니런가. 강호의 은원일랑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바탕 바람에 불과했던 것을. 노부의 헛된 꿈이 우스꽝스럽구나."

담곤이 돌연 고개를 젖히며 목젖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윽고 관조운과 혁련지를 쳐다보며 외쳤다.

"너희들은 부디 강호의 헛된 명성을 좇지 말거라. ……저승에서 사부님과 사형들 뵙기가 미안하구나."

말을 마친 담곤이 홀연 난간 너머 천길 벼랑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예진충도 신법(身法)을 전개하여 담곤을 잡으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사숙님!"

관조운과 혁련지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정자 안으로 달려갔다. 관조운이 담사숙이 몸을 날린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낙수의 푸른 몸통이 휘휘 감기며 달빛 아래 눈을 부라리고 있다. 제아무리 경신술의 신이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하물며 무공을 잃은 사숙이야. 관조운은 담사숙의 행보에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상대부의 위협에 제자들을 보호하려 했고 마지막 순간에 회한에 찬 절규를 들으니 사숙에 대한 연민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앞에 닥친 엄중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갑자기 송림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금의위 장반 풍천의 알현이오."

키 큰 인영이 소리쳤다.

"금의위 영반 신렵 또한 알현하오."

키 작은 인영이 인사를 했다.

평교자에 앉은 상대부가 흠칫 놀랐다. 가마 좌우에 시립해 있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예진충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두 분께서 마침 적당한 시점에 오셨구려."

상대부가 얼굴을 붉히며 풍천의와 신렵을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금의위라고 했나? 금의위 따위가 본 태감의 뒤를 밟았단 말이냐? 너희가 과연 무사하리라고 보느냐?"

"저희가 비록 신분이 낮은 무관이라 하나 대감은 전직 태감일 뿐. 어찌 관명을 들먹이며 관직의 세를 들먹이십니까."

풍천의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놈들! 내,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금의위 지휘사 모빈의 모가지도 내 손 안에 있거늘 어찌 장반 따위가 감히 나에게 말대꾸 한단 말이냐. 예총관!"

상대부의 목청은 높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의 얼굴빛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에서는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예진충은 금의위 대원을 향해 칼을 뽑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부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로는 좌우에 시립해 있는 호위무사를 향해 명령했다.

"상대부 어른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자네들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

직속상관인 예진충의 명령이 있자 호위무사들은 열 보 가량 뒤로 물러 공터와 숲의 가장자리에 도열했다.

"뭐냐, 예총관, 저 무례한 놈들을 먼저 처치하고 나중에 말하라."

"아니올시다. 상대부께 먼저 볼 일이 있소이다."

예진충의 당돌한 태도에 상대부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의 얼굴색이 또 한번 바뀌었다.

"예총관, 무례하구나. 먼저 나의 명령을 따르라."

"상대부! 당신의 권도(權道)는 인도(仁道)에 기반하지 않고 궤도(詭道)와 변사(變詐)만을 따라 쥐꼬리만한 명분이라도 있으면 대신들을 파리잡듯 잡아 권세를 휘두르니, 당신의 탐욕에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소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네 말이 심히 방자하다. 네 이놈!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나."

상대부는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당신의 그 한없는 술수와 무자비한 공작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고 그 핏값을 받기 위해 당신 곁에 온 사람이오."

"나, 나는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없다."

상대부가 손을 저으며 사래쳤다.

"물론 당신이 고운 손에 직접 피를 묻힌 적은 없소이다. 하지만 당신의 희디 흰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항상 피가 튀고 목이 달아나고 가문이 절멸했소이다. 칼춤을 춘 꼭두각시는 따로 있으나 어찌 그들에게만 죄를 묻겠소이까. 이제 그만 당신에게도 죗값을 받아야겠소이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예진충을 가리키는 상대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저승길에서 곰곰 생각해보구려."

예진충이 챙, 하고 검을 뽑았다.

"예, ……예총관"

상대부가 입으로 예진충을 부르며 한편으로 고개를 돌려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물러나 있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고 나서려는 순간 으악! 하는 단말마가 숲을 갈랐다. 예진충의 검이 상대부의 심장에 깊숙이 꽂혀 있다. 예진충은 검을 뽑지도 않고 호위무사를 들을 향해 나아갔다.


태그:#무위도 104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