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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工'자 구조를 보이는 맹씨고택
▲ 맹씨행단 특이한 '工'자 구조를 보이는 맹씨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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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불세출의 구국영웅 이순신의 현충사가 있는 곳. 그러나 그곳에는 황희와 더불어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가장 청렴하고 소탈했던 정승의 대명사 고불(古弗) 맹사성(孟思誠)의 유적도 함께 있다. 맹씨행단(孟氏杏壇)이다.

글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 될 것이다. 행단(杏壇)이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을 말함이니 바로 맹사성이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옛 집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은행나무가 은빛 나는 살구나무라는 뜻이니 말이다.

맹씨행단의 이름을 만든 은행나무 두 그루. 지금도 은행을 다섯가마나 내고 있다고 한다.
▲ 은행나무 맹씨행단의 이름을 만든 은행나무 두 그루. 지금도 은행을 다섯가마나 내고 있다고 한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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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곳은 고려 명장 최영의 집. 어느날 최영이 낮잠을 자는데 용 한 마리가 배나무를 타고 승천하고 있더란다. 놀라 깨어 밖으로 나와 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던 것, 짐짓 혼을 내는 척 꾸짖으니 울거나 도망쳐야 할 서너 살 어린 아이가 예의를 갖춰 잘못을 고하는 것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손녀사위로 삼았단다. 이 집은 바로 그 최영이 손녀사위에게 물려 준 것이다.

사성의 아버지는 맹희도(孟希道), 정몽주와는 막역한 벗이었다. 몽주가 먼저 과거에 급제하자 희도 역시 절간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날 며느리 조씨로부터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부친위독'이라는 급전을 띄워 아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며느리와 동침케 했고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맹사성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의 비범함을 알려 주는 일화들이다.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원래 최영과 친구 사이로 고려의 고위 관리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개경 두문동에 들어가 불타 죽었다. 이른바 두문동 72현 중 하나. 이 때 자신들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끝내 밖으로 내 보냈던 인물이 황희.

맹유의 아들 맹희도(孟希道) 역시 우여곡절 끝에 충청도 한산에 정착했으나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들 맹사성에게는 출사를 권했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 이로써 황희와 맹사성, 고려의 유신 두 명이 조선왕조 최고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명재상이 되었으니 역사는 참으로 얄궃은 것이라 할 만 하다.

맹씨행단, 즉 맹사성의 고택은 우리 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 장군이 살던 곳이라 했으니 대략 14세기 중엽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 멀리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복화반(꽃쟁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양) 구조까지 보이니 실제로는 언제 지어진 것인지 그저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고쳤을 것이며 처음 지었을 때와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지 대충 짐작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논쟁도 많은 집이다.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꽃쟁반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 오래된 옛집임을 알려 주는 복화반 구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꽃쟁반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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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이 집이 과연 살림집이 맞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던 집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부엌이 없다는 것, 구들의 형식도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집 전체 구조가 살림집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차라리 군사적 용도로 쓰이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등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그것은 이 집이 그토록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다는, 조선을 뛰어 넘는 먼 옛날 고려시대의 가옥 구조에 대해 우리가 그만큼 잘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시대에는 이런 형식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아직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학자들의 연구가 더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온 국토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곳곳에 오천년 민족의 숨결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허름한 집 한 칸, 고분 한 기, 비석 하나에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한 나라의 재상이었으나 비가 새는 집에 살았다는 이야기며 다 죽어가던 소를 구해 주어 평생 친구처럼 살았고 죽어서 무덤까지 옆에 두었다는 흑기총(黑麒塚) 설화, 과거 보러 가던 선비와 나누었던 '공당문답' 등 맹사성의 소탈함과 청렴, 검소함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언뜻 보기에는 보잘 것 없이 쇠락한, 흔하디 흔한 시골집 같은 이 맹씨행단처럼 말이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 했으니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청렴한 관리를 뜻하는 청백리(淸白吏)를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여 표창하였던 것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을 위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터.

청백리의 표상이라 할 맹사성의 옛집이 그 주인의 이름과 더불어 그토록 오랜 세월을 힘들게 버티어낸 이유도 후세에 이를 알리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지금 그 누가 있어 맹사성과 같이 역사에 영예로운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맹씨행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지킴이들. 백제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멋진 젊은이들이다.
▲ 맹씨행단 지킴이 맹씨행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지킴이들. 백제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멋진 젊은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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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유, 맹희도, 맹사성의 위패가 있는 사당.
▲ 세덕사(世德祠) 맹유, 맹희도, 맹사성의 위패가 있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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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티나무 세 그루씩 총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한 구괴정(九槐亭). 지금은 두 그루만 전한다. 세 정증이 모였다 하여 삼상당이라는 이름도 있다.
▲ 구괴정(삼상당) 조선 세종 때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티나무 세 그루씩 총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한 구괴정(九槐亭). 지금은 두 그루만 전한다. 세 정증이 모였다 하여 삼상당이라는 이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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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구괴정
▲ 멀리서 본 구괴정 멀리서 본 구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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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괴정은 꼭 정자가 있음직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 구괴정에서 본 들녁 구괴정은 꼭 정자가 있음직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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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괴정쪽에서 본 맹씨행단. 조선 소나무가 멋지다.
▲ 맹씨행단 구괴정쪽에서 본 맹씨행단. 조선 소나무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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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씨행단 근처 함께 둘러 보면 좋을 곳

보물 제536호. 높이 5.4m.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했다. 마치 며칠 전 만든 것 처럼 깨끗한 것이 그저 놀라울 뿐.
▲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보물 제536호. 높이 5.4m.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했다. 마치 며칠 전 만든 것 처럼 깨끗한 것이 그저 놀라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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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명종 때 이정( 李挺)이 낙향해 정착했고 그의 6대손 이간 (李柬)의 호 외암(巍巖)의 호를 따 이름 지었다는 외암마을. 그 뒤 한자만 외암(外岩)으로 바뀌었다 한다.
▲ 외암마을 조선조 명종 때 이정( 李挺)이 낙향해 정착했고 그의 6대손 이간 (李柬)의 호 외암(巍巖)의 호를 따 이름 지었다는 외암마을. 그 뒤 한자만 외암(外岩)으로 바뀌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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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동구밖에서 그네 뛰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난다.
▲ 외암마을 어릴 적 동구밖에서 그네 뛰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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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주아문(溫州衙門). 원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의 행정치소. 흥선대원군 때인 고종8년(1871년)에 지어진 것이다. 1995년 1월1일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아산시가 되었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溫州衙門). 원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의 행정치소. 흥선대원군 때인 고종8년(1871년)에 지어진 것이다. 1995년 1월1일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아산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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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맹씨행단, #맹사성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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