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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경찰의 부검영장 재신청이 이뤄진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남기대책위와 시민들이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영결식장 입구와 연결 통로 위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경찰의 부검영장 재신청이 이뤄진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남기대책위와 시민들이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영결식장 입구와 연결 통로 위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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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낯선 서울 혜화동 아스팔트 바닥에서 이틀 동안 한뎃잠을 잤습니다.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첫날은 골판지 깔고, 신문지 덮고 잠을 잤습니다. 둘째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서성거렸습니다. 저는 왜 깊어가는 가을 서울거리에서 노숙자가 되었을까요?

어느새 319일이 지났습니다. 2015년 11월 14일, 제 삶에서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불도장이 찍힌 그 날로부터 이렇게나 멀리 지나왔습니다. 멀리 제주도에서 그 날 그 장면을 스마트폰 작은 화면으로 지켜본 후 제 삶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이 바뀌었습니다.


물대포가 한 늙은 농민의 머리 위로 쏟아졌습니다. 하늘색 작업 조끼를 입고 맏딸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바지와 신발을 신은 그 늙은 농민은 물대포를 맞자마자 무릎이 꺾이고 쓰러졌습니다. 찬 기운이 서린 아스팔트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습니다. 늙은 농민의 온몸으로 물대포는 나아이가라 폭포보다도 더 거세게 쏟아지고 또 쏟아졌습니다.

빨간색, 하얀색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늙은 농민에게 달려왔습니다. 아스팔트에 누운 채 온몸으로 폭포수와 같은 물대포를 맞고 있는 늙은 농민을 감싸 안았습니다. 등으로 물대포가 쏟아지며 물보라를 일으켰습니다. 우비 입은 사람들은 늙은 농민을 쫒아오는 물대포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젖 먹은 힘까지 냈습니다.

사람들이 늙은 농민을 둘러쌌습니다. 앰뷸런스가 도착했습니다.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사람들이 늙은 농민을 들어 올렸습니다. 물대포를 등으로 받아내며 사람들은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물대포는 집요했습니다. 늙은 농민을 끈질기게 쫓아갔습니다.

그날의 참상, 괴로웠습니다

백남기 농민은 70년대 반독재 학생운동와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에 돌아와 농사지으면서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여 우리밀살리기, 우리농촌살리기 농민운동을 했다.
 백남기 농민은 70년대 반독재 학생운동와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에 돌아와 농사지으면서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여 우리밀살리기, 우리농촌살리기 농민운동을 했다.
ⓒ 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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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농민 백남기. 전라남도 보성에서 밀밭 갈고 씨 뿌리고 나서 마을 농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습니다. 11월 14일, 전국에서 상경한 농민 중 한 사람입니다. 손이 거칠고 대부분 주름이 깊이 팬 늙은 농민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밥쌀 수입 중단', '쌀값 21만 원 대선 공약 이행'을 소리쳐 외쳐보기라도 하자고 모인 농민 중 한 사람입니다. 쌀의 죽음, 농민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매고 종로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물대포는 상여를 산산이 부서뜨렸습니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머리와 몸조차 부수었습니다.

정권에 의해 백남기 농민의 몸이 부수어진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정권와 맞서 싸웠던 대학생 백남기는 학교에서 제적되어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청년 백남기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도피하여 농사지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에 수도원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온 청년 백남기는 5.18 광주 학살을 하며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군부 세력에게 잡혀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을 나와 농부가 되어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생명평화농사를 짓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며 사제의 길 대신 농부 성자의 삶을 올곧게 살았습니다. 그런 농민 백남기의 몸과 영혼이 살인 물대포로 산산히 부숴진 것입니다.

단양 산골 젊은 농민은 팔자에도 없는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가족 나들이 갔다가 SNS로 이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말문이 멎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실려 간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당장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비행기를 알아보았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나 제주도에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어쩌다 내가 저 자리에서 아버지 연배의 저 늙은 농민 대신 물대포를 맞지 않았는가?'하는 자괴감에 잠도, 식욕도 잃어버렸습니다.

사흘이나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와서 마늘, 고추, 참깨 판 돈 100만 원을 봉투에 욱여넣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이 차려진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11월 14일부터 백남기 농민과 함께하고 농성장에서 밤을 세워온 선배 농민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주머니에 넣어온 봉투 하나 내밀며 대신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젊은 농민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보냈습니다. (관련 기사 : 백남기 선생 쾌유 농성장에 백만원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정보과와 수사과 형사들이 두 차례나 집으로 찾아와서 채증사진이 있다며 11월 14일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날 제주도에 있었는데 홍길동의 분신술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한날한시에 제주도와 광화문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사례는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농민운동, 전교조, 진보정당, 진보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저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민중총궐기 국가폭력조사단에 제보하고 오마이뉴스 기사로 써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보낸 날들, 참담했습니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 참여 초기인 지난해 11월 전국에서 올라온 농민들과 함께 피켓 시위를 했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 참여 초기인 지난해 11월 전국에서 올라온 농민들과 함께 피켓 시위를 했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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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이후, 전 아스팔트 농민이 되었습니다. 8년을 흙과 뒹굴며 살아온 흙의 농민이 아스팔트 농민으로 바뀐 겁니다. 가을 파종하는 마늘 농사가 채 끝나지 않아 11월에는 단양과 혜화동을 왕복했습니다. 12월 크리스마스 전날부터는 아예 농성장을 집으로 삼았습니다. 겨우내 농성장 천막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농성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성장에서 살며 전국에서 올라오는 농민들과 시민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SNS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또 알렸습니다. 백남기 농민과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농민들의 처참한 지경을 작은 스마트폰과 키보드 하나에 의지하여 타전했습니다.

백남기 대책위 활동가로서 거리 피켓팅을 하고 지하철 선전전에 나서고 페이스북을 통해 농성장 소식을 전했습니다. 낯선 서울 거리에서 어색하게 '백남기를 살려내라', '강신명을 처벌하라', '박근혜는 사과하라' 구호를 외치는 농민들 기운을 북돋기 위해  기타를 메고 '농민가', '아스팔트 농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불렀습니다.

대학로 혜화역 인근에서 가톨릭농민회 전남 나주 김경호 농민과 농민가를 부르며 피켓시위를 하다
 대학로 혜화역 인근에서 가톨릭농민회 전남 나주 김경호 농민과 농민가를 부르며 피켓시위를 하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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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아이는 갑자기 서울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겨울방학이 되었는데 아빠는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지 않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산골에서 태어나 한 번도 아빠와 떨어져 겨울을 보낸 적 없는 아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는 전화로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백남기 할아버지가 누구야?", "물대포가 뭐야?", "경찰이 왜 백남기 할아버지에게 물대포를 쏘았어?", "아빠, 언제 집에 돌아오는데?" 아스팔트 농사지으며 노숙인이 된 아빠는 대답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하고 물대포 쏜 경찰이 혼나면 집에 갈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춥고도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 부는 3월이 올 때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없었습니다. 강신명 경찰청장과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없었습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농성과 거리 시위를 하고,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했습니다.

밤이면 농성장에서 노숙을 하며 하루하루 몸과 마음은 지쳐갔습니다. 흙과 뒹굴던 농부에게는 한겨울 시린 추위보다도 아스팔트의 독기와 차량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백남기 농민을 떠올리기만 하면 이내 죄송한 마음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봄이 오고 농번기가 되어 백남기 농성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삼일절에 백남기 농민의 아내이신 박경숙 여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습니다. 더 있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을 뭐라 말로 설명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슬픈 눈으로 두 손 잡아주는 여사님께 '농사지으러 돌아가지만 자주 들리겠다'는 약속드렸습니다.

농사지으며 한 달에 한 번은 농성장으로 찾아왔습니다. 한 달 한 달 지날 때마다 농성장 주변은 초록으로 물들며 풍경이 바뀌었지만 상황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총선에서 여소야대 만들어야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이 해결된다는 절박함으로 농사 외에도 정치활동과 언론활동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지난 6월 25일 대학로에서 열린 2016년 제1자 전국농민대회 장면. 대회를 취재하여 <전국농민대회 이모저모_농성장 사람들> 기사를 썼다.
 지난 6월 25일 대학로에서 열린 2016년 제1자 전국농민대회 장면. 대회를 취재하여 <전국농민대회 이모저모_농성장 사람들> 기사를 썼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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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총선에서 그렇게 소망하던 여소야대가 되었지만 기대한 바와는 달리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 해결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결국 지난 9월 12~13일 이틀에 걸쳐 '백남기 청문회'가 열렸지만 강신명 전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 당시 백남기 농민을 조준 사격한 충남경찰청 홍성경찰서 소속 최 모 경장과 김 모 경장의 청문화 증언은 백남기 농민 가족을 비롯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멀리 단양에서 농사지으며 지켜보는 젊은 농민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지난 6월과 9월, 올해 두 번이나 백남기 농민 농성장이 있는 대학로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하여 '백남기 농민을 살려내라', '박근혜는 사과하라'를 외쳤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그쳤습니다.

경찰은 백남기 농민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25일 자정 경찰병력을 병원에 투입하였습니다. 오랜 사투 끝에 살인 물대포 피격 317일째이자 칠순 생신 다음 날인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결국 백남기 농민은 숨을 거두셨습니다. 경찰병력이 동원되어 서울대병원을 겹겹이 봉쇄하고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관련 기사 : 경찰의 출입문 봉쇄, 백 농민의 친구는 담을 넘었다)

호소합니다, 서울대병원으로 와주십시오

지난해 민중총궐기 도중 경찰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317일만에 사망한 가운데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한 시민이 고인의 사망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다. 경찰이 병원 출입문을 막고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습니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도중 경찰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317일만에 사망한 가운데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한 시민이 고인의 사망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다. 경찰이 병원 출입문을 막고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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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맞물려 검찰은 백남기 농민 사인의 원을 밝히기 위해 부검하겠다며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했습니다. 사인의 명백한 원인이 살인 물대포에 의한 뇌 손상임에도 부검을 하겠다는 검찰의 어이없는 행동에 대해 법원은 일부 기각을 통해 부검의 부당성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병원의 진료기록을 압수한 검찰은 어제 부검 영장을 다시 법원에 청구했습니다. 오늘(27일) 새벽 법원은 재청구된 부검 영장에 대해 부검의 필요성을 입증할 증거 자료를 보충하라며 영장 발부를 유예했습니다.

경찰의 백남기 농민 시신 탈취 시도 소식이 백남기 대책위를 통해 알려진 지난 24일 밤 이후로 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25일 아침 첫 기차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달려와서 오늘까지 이틀 밤을 시민, 농민, 청년, 학생들과 보냈습니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에 자주 뵈었던 농민들과 시민들을 장례식장에서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백남기 농민을 지키기 위한 결의를 두 손 맞잡고 어깨 두드리며 다짐했습니다.

이제 이틀 밤이 지나고 사흘째 밤을 기다리며 지난겨울 집 삼아 살았던 백남기 농민 농성장에 앉아 이 호소문을 씁니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피눈물로 꾹꾹 찍어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을 한 번 죽인 것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네 번 죽이고 있는 박근혜 정권과 검경의 반인륜 범죄 행위에 대해 함께 싸우자고 시민, 동료 농민들에게 호소합니다. 지난밤을 300여 명의 의인들과 함께 꼬박 뜬 눈으로 세우고 퀭한 눈으로, 떨리는 손으로 이 호소합니다.

오늘 밤 부검 영장 발부를 위한 추가 자료를 제출한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의학적으로 사망 원인을 따지는 부검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정렬 전 판사는 법리적으로 강제부검의 부당성을 논증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가족과 백남기 대책위와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강제부검이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조문객의 행렬과 장례식장을 메우고 촛물문화제를 하는 시민들의 마음 또한 같습니다. 이번에도 법원이 부검 영장을 기각하는 것이 의학적, 법리적, 국민의 상식에 맞습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남기 농민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강제부검 영장이 발부된다면 경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백남기 농민을 가족과 농민 동지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갈 것입니다. 지난밤 300여 명이 밤을 지새웠습니다. 오늘 밤, 수천수만 명의 경찰들이 장례식장으로 진입한다면 몇백 명의 농민과 시민들이 백남기 농민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비장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농민과 시민들에게 호소합니다. 서울대병원으로 와 주세요. 백남기 농민을 지키기 위해 함께 해 주세요.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는 것은 법과 상식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우리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호소문에 응답한 농민과 시민들과 밤을 지새우고 싶습니다. 이제 펜을 놓고 백남기 농성장을 떠나 장례식장으로 향합니다.

경찰의 백남기 농민 시신탈취를 막기 위해 전주 장종혁 농민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 부회장), 상주 박희준 유기농 농민 (친환경농업인연합회), 본 기자인 단양군 농민이 백남기 농성장에서 결의를 다지고 있다.
 경찰의 백남기 농민 시신탈취를 막기 위해 전주 장종혁 농민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 부회장), 상주 박희준 유기농 농민 (친환경농업인연합회), 본 기자인 단양군 농민이 백남기 농성장에서 결의를 다지고 있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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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유문철 시민기자는 충북 단양에서 아홉해째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18일 백남기 농민 농성장에 방문하여 후원금을 전달한 후 농성장 겨울농성을 했습니다. 이후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필명 유기농민)으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과 농성장 상황을 리포트하고 있습니다.



태그:#백남기, #시신 침탈, #부검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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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한결농원 농민이자 한결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 아빠입니다. 농사와 아이 키우기를 늘 한결같이 하고 있어요. 시골 작은학교와 시골마을 살리기, 생명농업, 생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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