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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더불어민주당의 뿌리에 대해서는 한민당(1945)과 민주당(1955)으로 대립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쪽은 해공 신익희가 창당한 '민주당'을 그 뿌리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엔 민주당(김민석 대표)과 통합키로 한 후 지난 9월 18일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신익희생가를 방문하며 정권교체를 이룩할 것을 다짐하였다.

서울 한복판에도 신익희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일명 효자동 신익희가옥이 바로 그 곳이다.
해공 신익희(1894~1954)
 해공 신익희(1894~195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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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의 동명 유래

위치는 앞서 들른 이광수 가옥과 마주보고 있지만 찾아가기 위해서는 약간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길목 네거리에는 이 일대가 <효자동>이란 이름을 갖게 된 유래를 나타내는 <쌍홍문 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쌍홍문은 조선 선조 때 임천 조씨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을 희생시키며 모친을 구한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두 개의 홍문을 말한다.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를 설명하는 쌍홍문 표석, 사진 속 표석의 우측이 춘원 이광수가옥이며, 좌측으로 돌아들면 해공 신익희가옥이다.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를 설명하는 쌍홍문 표석, 사진 속 표석의 우측이 춘원 이광수가옥이며, 좌측으로 돌아들면 해공 신익희가옥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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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제는 어머니와 조카들을 데리고 강화도에 피신하였는데 왜적이 쳐들어와 어머니를 능멸하려 하자 맨손으로 저지하던 형 희정이 왜적의 칼에 숨졌다. 곧 이어 동생 희철이 이들을 물리치고 모친을 산속으로 피신시켜 초근목피로 봉양하였으나 왜적과 싸우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려 숨을 거두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형제의 효행을 칭송하고 조정에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여 조원의 본가(효자동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현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가 된 것이다.

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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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쌍홍문 터를 돌아가면 이내 <해공 신익희 가옥>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신익희는 이곳에서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 숨질 때까지 살았다. 가옥은 대지 47평에 30평짜리 건물이다. 팔짝지붕에 겹처마 한옥인 평범한 도시형 한옥구조이다.

국회의장을 지냈고 숨지는 순간까지 대통령후보였던 이의 집이지만 당시로서도 그저 평범한 가옥이라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신익희는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 출생하여 일본유학을 하였고 3.1운동에 연루돼 체포령이 떨어져 이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줄곧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그 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6.25전쟁이 발발하던 순간에는 국회의장의 지위에 있었다.

이승만과의 악연

당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일화가 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의 빠른 남진 속도에 이승만정권은 당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 4시 국회가 소집되어 총 210명의 의원 가운데 100여 명이 모였는데 국회에 참석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조차 당시의 전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원 전원은 100만 애국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리고 결의문을 전달하기 위하여 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 등 몇몇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갔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새벽 3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이미 탈출한 뒤였다.

결국 이른 새벽 모여 서울사수를 결의했던 의원들은 이 보고를 듣고 소리없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에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도교량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모두 폭파되고 말았다. 당시 서울인구는 150만명을 약간 넘겼다. 그 중 1/10인 15만명은 한강 이남 즉 영등포에 거주하였다.

한강 이북의 140만명 중 강을 건넌 사람은 약 40만명인데 이중 80%는 월남자이고 나머지 20%는 고급공무원, 자본가, 우익정치인, 군인, 경찰관 가족이었다. 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한강을 넘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인민군 부역자로 처벌받거나 그렇지 않다는 사상검증을 혹독하게 거쳐야만 했다.

위와 같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현실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 여의도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입구에는 지난 2000년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동상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였다고 쓰여 있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 없을 뿐이다.

[관련기사]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피신시켰다고?

어쨌든 전쟁시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이런 일화를 갖고 있던 신익희가 그로부터 불과 6년 뒤인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과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야말로 중세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의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받은 이승만이 돌연 불출마선언을 했다.

이유는 "박력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국토통일을 이룩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자 자유당은 이승만의 불출마선언을 번복해 줄 것을 대대적으로 촉구하는 관제데모를 연출한다. 경무대 주변, 그러니 지금의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주변에는 연일 데모대가 몰려 오고 그곳에서 호소문, 결의문 뿐 아니라 혈서를 쓰는 등 그야말로 난리가 벌어졌다.

급기야 2주가 조금 지난 3월 23일 "민심에 양보하여 불출마를 번복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중세의 정치쇼이며 엄연한 사전선거운동이다.

1956년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의 민주당 신익희후보 한강 유세
 1956년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의 민주당 신익희후보 한강 유세
ⓒ 서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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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대결에서 신익희 후보측에서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유권자들의 심장을 울렸다. 이에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며 물타기를 했지만 그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런 기세 속에서 5월 3일 이촌동 한강백사장에서 개최된 선거유세는 우리 정치사에 기록된 최고의 유세이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시에 승용차는 1730대, 버스 637대 뿐이었으며, 노면전차 180대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오후 1시를 넘자 용산 삼각지 이남으로 가는 전차와 버스는 수많은 인파에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서울시 대중교통이 마비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속속 몰려들어 그야말로 구름떼 같은 인파가 신익희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 운집한 것이다. 당시 서울인구는 150만명 남짓 되었으며 유권자는 70만 3천명인데 이날 유세 현장에 몰려든 인파는 약 30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록을 깨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듯 싶다.(<서울의도시계획이야기 1>, 손정목, 한울)

신익희의 사망, 병사인가? 암살인가?

이런 역사적인 대규모 유세가 벌어졌고 이틀 뒤인 5월 5일 지방유세를 위하여 호남선열차를 타고 이리로 향하던 새벽 4시 신익희 후보는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45분 뒤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의 죽음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고 신문 호외는 낙엽처럼 뿌려졌다. 지지자들은 통곡을 하였고 대중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은 순식간에 전 국민을 울리는 유행가가 되고 말았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을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이 노래가 유행하자 당황한 것은 이승만정권이었다. 그래서 졸지에 작곡가 박춘석과 작사자 손로원은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신익희 후보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않냐며 집요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익희 사망 3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풀려났다. 훗날 이 노래에서 착안하여 김수희의 노래 '남행열차'도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1956년 신익희 후보의 승리가 당연시되던 그 때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그는 호남선 열차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0년 2월 15일 조병옥 후보 역시 선거를 29일 앞두고 미국육군의료센터에 사망하였다. 이런 절묘한 사망시기로 인하여 여전히 암살설은 떠돌고 있는 것이다.


태그:#신익희가옥, #서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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