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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한산한 모습이다.
▲ 아르바트 거리 비가 내려 한산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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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다섯. 아르바트 거리의 푸시킨과 빅토르 최

우산을 받고 걷는 아르바트 거리(улица Арбат)는 색다른 느낌이다. 워낙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한산한 거리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는 러시아 거리 문화와 예술을 상징하는 곳으로 흔히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과 비견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골리, 차이코프스키와 푸시킨이 살며 낭만을 풍미했던 거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근자에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 생활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아나톨리 리바코프(1911-1998)의 소설 <아르바트의 아이들>이나 음유시인 불라트 오쿠자바(1924-1997)의 노래로 더욱 유명하다.

너의 낯선 이름과 너의 아스팔트는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처럼 투명하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나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부름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불행이다.
- 오쿠자바,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 가사 중에서

그는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소련 공산당에 의해 사형당했고, 그의 어머니도 18년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의 시와 노래는 1980년에야 해금되었으며, 러시아 젊은이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 기타치며 노래하는 음유시인 불라트 오쿠자바 동상 그는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소련 공산당에 의해 사형당했고, 그의 어머니도 18년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의 시와 노래는 1980년에야 해금되었으며, 러시아 젊은이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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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간판에 '1831년 2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시킨이 살던 집'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 푸시킨이 잠시 살았던 집 입구 간판에 '1831년 2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시킨이 살던 집'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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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아르바트 거리는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운명 같은 장소였나 보다. 호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오쿠자바의 동상은 그의 노래와 삶만큼 인상적이다. 그러나 나를 더욱 상념에 잠기게 만든 것은 푸시킨의 흔적들이다.

그가 잠시 살았다는 집 앞에 푸시킨 부부의 동상이 다정하다. 어릴 적 시골 집 대청마루 위에 붙어 있었던 푸시킨의 '삶'이라는 시는 내가 외운 첫 번째 시였다. 밭 가는 농부의 고단한 표정과 함께 적힌 그 시화 액자는 내 유년의 문학적 자양분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여기까지 외우자니 느닷없이 그의 슬픈 삶이 떠올랐다. 동상의 다정한 모습과는 달리 푸쉬킨은 서른여덟의 나이에 아내의 정부와 권총 결투를 하다 허망하게 '삶'을 마쳤던 것이다. 그의 '삶'은 과연 '기쁨의 날'을 맞았던 적이 얼마였을까?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는 빼어난 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상으로 보아도 특출한 미모로 보인다.
▲ 푸시킨 집 맞은 편에 서 있는 푸시킨 부부 동상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는 빼어난 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상으로 보아도 특출한 미모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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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검은 머리의 빅토르 최 얼굴 그래피티가 보인다.
▲ 빅토르 최 추모 벽 가운데 검은 머리의 빅토르 최 얼굴 그래피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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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상은 그래피티가 어지러운 빅토르 최의 추모벽 앞에까지 이어진다. 빅토르 최는 한국계 러시아의 록 가수로서, 소비에트 지역 젊은이의 반항과 자유를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이다.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로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스물여덟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비극적 운명이 푸시킨과 삶과 오버랩 된다. 누가 더 비극적일까? 10년 더 산 푸시킨이 더 행복했을까? 

한 눈에 봐도 자유 그 자체인 가죽점퍼 차림의 히피 몇몇이 무어라고 말을 건다. 오늘이 그의 추모일이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8월 15일이다. 그런데도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없다. 1962년생, 동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은 시대를 관통해 왔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나처럼 성근 머리칼과 주름진 눈매로 이 거리 어느 골목에서 걸어 나올 것 같은 날이다.


태그:#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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